‹ 목록으로 변경백과 폐성녀

1화

재판장의 대리석 바닥은 차가웠다. 무릎을 꿇은 지 벌써 반나절이었다. 처음엔 아팠고, 다음엔 저렸고, 이제는 그마저 감각이 없었다. 다리가 내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어쩌면 이게 편할지도. 어차피 이 다리로 걸어 나갈 곳은 감옥이거나 유배지일 테니까. 천장이 높았다. 재판장은 늘 그런 식으로 지어진다. 죄인이 자신이 얼마나 작은 존재인지 깨닫도록. 나는 그 높은 천장을 올려다보다가 다시 고개를 떨궜다. 목이 뻐근했다. "성녀 서지율." 법관의 목소리가 홀 전체에 울렸다. "그대는 왕실 성물을 훼손하고 그 죄를 은폐하려 한 죄로 사형에 처해야 마땅하나." 사형. 그 단어가 나올 때마다 나는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성물을 훼손한 적도 없고, 은폐한 적도 없으니까. 성물이 있는 신전 근처에도 안 갔다. 그날 나는 지아의 옷을 골라주느라 오후를 다 썼단 말이야. 그런데 죄인은 나였다. 증거라는 게 참 신기했다. 내 방에서 나온 성물 파편. 내 필체와 똑같은 서찰. 나는 필체를 위조하는 법도 모르는데, 세상은 이미 결론을 내려놓고 나에게 서명만 시켰다. 어쩌겠어, 증거가 다 그렇게 만들어져 있는데. 만든 사람이 누군지 모를 만큼 내가 어리숙하진 않았다. 고개를 살짝 들었다. 단상 위, 화려한 예복을 입은 강민재 왕자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눈이 마주쳤다. 그는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오히려 정면으로 나를 응시했다. 미안한 기색 같은 건 없었다. 그 옆에는 내 동생, 서지아가 눈을 내리깐 채 서 있었다. 지아는 한 번도 나를 쳐다보지 않았다. 이상했다. 삼 년 동안 내가 그렇게 예뻐하고 감싸줬던 동생인데. 눈 한 번 마주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인가. 아니면 마주칠 자신이 없는 건가. 나는 후자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야 그나마 지아를 향한 마음이 덜 억울할 것 같았다. "국왕 전하의 관용으로 사형을 면하고, 흑성령으로 유배하여 그곳의 영주 한이헌과 혼인시킨다." 법관의 목소리가 다시 이어졌다. 흑성령. 죽음의 땅이라 불리는 곳. 사람들이 그곳을 입에 올릴 때마다 마치 저주라도 뱉는 듯 표정을 찌푸리곤 했다. 왕국 북쪽 끝, 마물이 들끓고 눈이 일 년 내내 그치지 않는 곳. 그곳을 지키는 영주는 대개 죄인이거나, 왕실이 눈앞에서 치워버리고 싶은 사람들이었다. 관용이라니. 사형보다 더 잔인한 형벌을 관용이라 부르는구나. 차라리 목을 치라고 하는 게 덜 위선적일 텐데. 그래도 살긴 사는 거잖아. 나는 속으로 그렇게 정리했다. 어차피 여기서 죽으나 거기서 죽으나 매한가지라면, 조금이라도 더 살아있는 쪽을 택하는 게 이득이었다. 살아 있어야 뭐라도 해볼 수 있으니까. 복수든, 도망이든, 뭐든. 판결이 끝나자 병사들이 나를 일으켜 세웠다. 팔이 뒤로 꺾이듯 붙잡혔다. 저린 다리로 일어서려니 몸이 휘청였다. 병사 하나가 나를 붙잡지 않았다면 그대로 바닥에 다시 무너졌을 거다. 그 순간, 강민재가 자리에서 내려와 내 앞에 섰다. 예복 자락이 대리석 바닥을 스치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 그가 낮게 말했다. "네가 지아를 위해 물러나 준 거라고 생각하겠다." 내가 물러난 게 아니라 네가 밀어낸 거잖아. 나는 그 말을 삼켰다. 지금 이 자리에서 억울함을 토해봐야 달라질 건 없었다. 오히려 감형을 취소하고 진짜로 목을 칠 핑계나 줄 뿐이겠지. 나는 그렇게까지 멍청하진 않았다. "성은이 망극합니다." 나는 형식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망극할 게 뭐가 있어. 죽는 대신 얼어 죽으라는 소리잖아. 그것도 낯선 남자와 혼인까지 시켜서. 이게 배려인지 저주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강민재는 잠시 나를 응시하다가, 이내 시선을 돌려 지아를 바라보았다. 그 눈빛이 어땠는지, 나는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았다. 애틋함과 안도가 뒤섞인 그 표정. 마치 이제야 방해물이 치워졌다는 듯한. 그렇게 사랑하는 여자를 위해 언니를 사형장 대신 얼음 무덤으로 보내는 남자를 어떻게 사랑이라 부를 수 있을까. 그건 그냥 이기심이지. 자기 손에 피를 묻히기 싫어서 대신 나를 눈밭에 묻는 것뿐이었다. "언니." 지아가 처음으로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렸다. "거기서라도, 잘 살아." 잘 살아. 참 쉽게 말한다. 삼 년 전, 내가 지아 대신 성녀 시험을 봐주겠다고 나섰을 때도 지아는 이렇게 쉽게 말했었다. "언니가 있어서 다행이야." 그 말이 지금 얼마나 얄궂게 들리는지, 지아는 알까. 나는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병사들이 나를 끌고 나가는 동안, 등 뒤에서 귀족들의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저 여자가 성물을 훔쳤다지." "흑성령이라니, 차라리 죽는 게 낫지 않나." "한이헌 그자도 소문이 흉흉하던데. 사람 여럿 죽였다고." 웃음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그저 앞만 보고 걸었다. 등 뒤로 쏟아지는 시선들이 마치 화살처럼 박혔지만, 이제 와서 그걸 다 맞아줄 여력도 없었다. 마차에 오르기 전, 마지막으로 왕궁을 돌아보았다. 삼 년을 성녀로 살았던 곳. 성수를 다루고, 병자를 낫게 하고, 사람들의 존경을 받았던 곳. 저 첨탑 아래, 내가 처음 성녀복을 입던 날 사람들이 나를 향해 환호했던 기억이 아직도 선명했다. 이제는 그 모든 걸 두고 떠난다. 성녀복도, 존경도, 심지어 이름조차도. 괜찮아. 어차피 성녀 노릇도 지긋지긋했으니까. 매일 아침 눈뜨면 정해진 기도문을 외우고, 하루 종일 웃는 얼굴로 사람들을 대해야 했던 그 삼 년. 그 시간이 나를 얼마나 갉아먹었는지, 아무도 몰랐다. 마차 문이 닫히기 직전, 호위 대장이 툭 던지듯 말했다. "흑성령까지 나흘 걸립니다. 마차에서 내내 계실 각오하십시오." 나흘. 그 말을 듣는 순간 정말로 속이 울렁거렸다. 잠깐 서 있는 것만으로도 다리가 후들거리는데, 나흘 내내 흔들리는 마차 안에 있어야 한다니. "저 원래도 차멀미 심하단 말이에요……" 나는 작게 중얼거렸다. 아무도 대답하지 않았다. 호위 대장은 이미 등을 돌린 뒤였고, 병사들은 내 쪽을 쳐다보지도 않았다. 이 마차 안에서 내 말에 신경 쓰는 사람은 나 자신뿐이라는 걸, 그제야 실감했다. 마차가 출렁이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창밖으로 왕도의 성벽이 점점 멀어졌다. 익숙한 지붕들, 사람들의 웅성거림, 삼 년간 익힌 거리의 냄새까지도 서서히 흐려졌다. 흑성령. 한이헌. 낯선 이름들이 머릿속을 떠돌았다. 어떤 사람일까. 죽음의 땅을 지키라는 명을 받은 사람이라면, 나만큼이나 버림받은 사람일지도 모른다. 사람 여럿 죽였다는 소문이 도는 남자와 혼인이라니, 이보다 더 최악의 시작이 있을까 싶었지만, 어차피 최악은 이미 오늘 아침에 다 겪은 것 같았다. 동병상련이라도 되면 좋을 텐데. 나는 창에 머리를 기대고 눈을 감았다. 마차가 흔들릴 때마다 관자놀이가 창틀에 부딪혔다. 아팠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 통증이 지금의 나에게는 오히려 현실감을 붙잡아주는 것 같았다. 어쨌든 이제부터는 성녀가 아니라, 그냥 서지율로 살아야 했다. 그게 오히려 마음이 편했다. 다만 흑성령의 영주가 어떤 얼굴을 하고 나를 맞이할지, 그것까지는 도무지 짐작이 가지 않았다. 소문 속의 살인자든, 나만큼이나 버림받은 죄인이든, 나흘 뒤 그 눈밭 끝에서 마주할 사람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을지. 그것만은, 아무리 눈을 감고 상상해봐도 그려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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