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변경백과 폐성녀

3화

명령이신가요, 라고 물었을 때, 나는 이미 마음을 정한 상태였다. 성 안에 있으라니. 나는 그 명령을 지킬 생각이 전혀 없었다. 솔직히 말하면 처음부터 지킬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니다. 그가 성문을 나서기 전, 나는 나름 성실하게 고민했다. 얌전히 방 안에 있는 게 맞는 걸까, 아니면 창밖 구경이라도 해야 하나. 그 정도의 고민이었다. 목숨 걸고 뛰쳐나갈 생각까지는 정말 없었다. 한이헌이 병사들과 함께 성문을 나선 뒤, 나는 잠시 방에 앉아 있었다. 얌전히, 정말로 잠시 동안만. 창밖으로 해가 기울고 있었다. 방 안은 조용했고, 나는 괜히 손끝을 만지작거렸다. 이 손으로 다시는 빛을 부르지 않겠다고 다짐한 게 겨우 몇 달 전이었다. 그런데 벌써부터 손끝이 간지러운 기분이 드는 건 왜일까. 아니, 그냥 방이 답답해서 그런 거겠지. 나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다. 그러다 창밖에서 비명 소리가 들렸다. 나는 곧바로 몸을 일으켰다. 의자가 뒤로 넘어가는 소리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문을 박차고 나가면서도 스스로 물었다. 지금 내가 왜 이러는 거지. 왕도에서 쫓겨난 죄인이 위험을 자처할 필요는 없잖아. 성 안에만 있으라던 그 남자 말대로 가만히 있었어도 아무도 나를 탓하지 않았을 거다. 그런데 발이 이미 성문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결정을 내린 셈이었다. 이럴 때마다 내 몸이 내 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참 편리하게도, 이성이 개입할 틈을 안 준다. 복도를 지나며 지키던 병사 하나가 나를 막아섰다. 나는 그의 팔을 뿌리치고 그대로 밖으로 뛰었다. 뒤에서 뭐라 외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돌아볼 여유가 없었다. 마을 어귀에 도착했을 때,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상상 이상이었다. 검은 늑대 형상의 마물 무리가 마을을 덮치고 있었고, 병사들은 수적으로 밀리고 있었다. 낮게 으르렁거리는 소리가 사방에서 겹쳐 들렸다. 지붕에 불이 옮겨붙은 집도 있었다. 매캐한 연기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아이 하나가 넘어진 채 울고 있었다. 마물이 그 아이를 향해 달려들고 있었다.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나는 손을 뻗었다. 성마법은 왕도를 떠나며 다시는 쓰지 않겠다고 다짐한 힘이었다. 성녀의 신분을 증명하는 유일한 증거이기도 했으니까. 이 힘을 쓰는 순간, 내가 서지율이라는 게 확실히 드러날 터였다. 그동안 숨기고 숨기며 여기까지 왔는데, 단 한 번의 손짓으로 전부 무너질 수 있었다. 어쩌겠어. 아이가 죽는 것보단 낫잖아. 손끝에서 하얀 빛이 뿜어져 나왔다. 오랜만에 몸을 통과하는 그 익숙한 열기가 낯설게 느껴졌다. 빛의 벽이 아이 앞에 펼쳐졌다. 마물의 이빨이 그 벽에 부딪히며 튕겨 나갔다. 아이는 자기 앞에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도 모른 채 그대로 얼어붙어 있었다. "뭐, 뭐야 저건!" 누군가 소리쳤다. 나는 그 소리를 들을 새도 없이 다음 마물을 향해 손을 뻗었다. 빛의 파장이 늑대 무리를 밀어냈다. 두 번째, 세 번째. 손을 뻗을 때마다 빛이 뻗어나가고, 마물들이 그만큼 밀려났다. 몸이 무거워지고 있었다. 성마법은 오랫동안 쓰지 않아 몸이 그 반동을 그대로 받아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관절 마디마디가 뻐근하게 아려왔다. 마치 오래 쓰지 않은 근육을 억지로 움직이는 느낌이었다. 시야 끝이 뿌옇게 흐려졌다. 그래도 멈출 수는 없었다. 마을 사람들의 비명이 계속 들려오는데, 여기서 멈추면 저 빛의 벽 안쪽에 남은 사람들은 그대로 마물의 밥이 될 거다. 그런 생각을 할 여유조차 없었지만, 몸은 이미 알고 있었다. 한이헌이 검을 든 채 내 쪽으로 달려오는 게 보였다.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나를 발견한 순간, 그는 걸음을 멈추지도 않고 곧장 이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당신 지금 뭘…" 그가 말을 다 끝내지 못했다. 마물 한 마리가 그의 등 뒤로 뛰어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반사적으로 다시 손을 뻗었다. 빛의 창이 마물을 관통했다. 그의 코앞에서 마물이 그대로 재가 되어 흩어졌다. 그가 나를 돌아보았다. 무언가를 알아챈 듯한 눈빛이었다. 검을 쥔 손이 잠시 멈칫하는 게 보였다. "성마법."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들켰다. 하지만 지금은 그게 중요하지 않았다. 아직 마물이 남아 있었으니까. 등 뒤로 두 마리, 왼쪽으로 세 마리. 셀 겨를도 없었다. 나는 마지막 힘을 짜내 빛의 장벽을 마을 전체에 둘렀다. 손끝에서부터 팔, 어깨까지 전부 저려왔다. 마물들이 그 벽에 막혀 울부짖었다. 병사들이 그 틈을 타 남은 무리를 처리하기 시작했다. 다리에 힘이 풀렸다. 나는 그대로 무릎을 꿇었다. 땅바닥에서 올라오는 흙냄새가 코끝에 닿았다. 눈앞이 캄캄해졌다가 다시 밝아지길 반복했다. 한이헌이 다급히 다가와 나를 붙잡았다. 그의 손이 내 어깨를 받치는 느낌이 낯설게 선명했다. "괜찮습니까?" 그가 물었다. "괜찮아요." 나는 숨을 몰아쉬며 대답했다. "그냥 좀... 어지러워서요." 솔직히 말하면 괜찮지 않았다.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아팠고, 속에서는 뭔가 넘어올 것 같았다. 하지만 그런 걸 이 남자 앞에서 굳이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가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복잡했다. 의심과 놀라움, 그리고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뒤섞여 있었다. 마치 눈앞에서 벌어진 일을 아직도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이었다. "당신이 왕도에서 추방된 그 성녀입니까." 그가 물었다. 확인하는 질문이었다. 부정할 수도 없었다. 이미 마을 사람들 절반이 그 빛을 목격했으니까. 저 멀리서 나를 향해 손가락을 들어 뭐라 속닥이는 사람들도 보였다. "네." 나는 짧게 대답했다. "전 성녀, 서지율. 그게 저예요." 그가 잠시 말을 잃었다. 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나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가늠하는 눈치였다. "왜 나오지 말라는 명을 어긴 겁니까." 그가 다시 물었다. "아이가 죽는 걸 보고만 있을 순 없었으니까요." 나는 대답했다. "그리고, 솔직히 말하면 명령 들을 생각도 별로 없었어요." 그가 헛웃음을 흘렸다. 화가 난 건지 어이없어하는 건지 알 수 없는 웃음이었다. 나는 그 웃음이 어느 쪽인지 굳이 묻지 않기로 했다. 지금 몸을 일으키는 것만도 힘든 판에. "이 일이 왕도에 알려지면, 당신은 다시 위험해집니다." 그가 낮게 말했다. "성마법을 쓸 수 있다는 게 알려지면." 그 말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맞다. 성물 훼손죄로 쫓겨난 전 성녀가 여전히 성마법을 쓸 수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면, 그 자체로 또 다른 죄목이 될 수 있었다. 이번에는 추방으로 끝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이미 늦었어요." 나는 마을 사람들을 돌아보며 말했다. 다들 나를 놀란 눈으로 쳐다보고 있었다. 몇몇은 손을 모으고 뭐라 중얼거리기까지 했다. "저 사람들이 다 봤으니까요." 한이헌의 표정이 더 굳어졌다. 그는 주변을 둘러보며 마을 사람들의 수를 헤아리는 듯했다. 스무 명, 서른 명. 그걸 다 입막음할 수 있을 거라고 정말 믿는 걸까. "입단속을 시켜야겠군요." 그가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미 마을 어귀에서 누군가 말을 타고 급히 떠나는 게 보였다. 방향은 왕도 쪽이었다. 흙먼지가 뭉텅뭉텅 일어나며 멀어지고 있었다. 소문은 이미 퍼지고 있었다. 한이헌도 그것을 본 모양이었다. 그의 얼굴에서 핏기가 사라졌다. 나는 그 뒷모습을 보며 생각했다. 이제 정말로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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