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골목은 오후의 그림자를 반쪼개고 있었다.
한쪽은 볕이 들어 흙바닥이 하얗게 말라 있었고, 다른 한쪽은 담벼락의 그늘이 짙게 깔려 있었다. 도윤은 그 경계선 위에 멈춰 섰다.
바람이 불었다. 마른 흙냄새. 타다 남은 장작 냄새. 잿골 특유의 매캐한 공기.
그런데 그 사이로, 낯선 향이 섞여 들어왔다.
풀냄새였다. 하지만 잿골의 마른 잡초 냄새와는 달랐다. 이슬을 머금은 듯한, 습기가 살아 있는 초록의 냄새. 도윤은 걸음을 멈추고 그 냄새를 따라 시선을 돌렸다.
그림자 속에, 누군가 서 있었다.
처음에는 그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작은 체구, 등을 벽에 기댄 자세, 팔짱을 낀 손. 그런데 시선이 위로 올라가면서, 도윤의 걸음이 완전히 멈췄다.
그녀는 움직이지 않았다.
녹색 머리카락이 어깨를 타고 흘러내렸다. 색이 이상했다. 염색이 아니었다. 뿌리부터 끝까지 균일한 초록, 자연스러운 색이었다. 뾰족하게 뻗은 귀 끝이 그늘 사이로 살짝 드러났다. 도윤은 숨을 멈췄다.
엘프.
전생의 기억 속에서 게임과 소설로만 접했던 존재였다. 판타지 세계의 클리셰, 흔한 종족, 화면 속에서만 존재하던 그림. 그런데 눈앞에, 실제로 서 있었다. 살아 숨 쉬는 모습으로.
도윤은 자신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손끝이 저릿했다.
이 세계가 게임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다. 감정 능력을 얻은 순간부터, 상태창이 뜨는 순간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어딘가 마음속 깊은 곳에서는, 그래도 익숙한 틀 안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착각이 있었다. 그 착각이 지금, 눈앞에서 산산이 부서지고 있었다.
"뭘 보고 있지."
그녀가 먼저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낮고 건조했다. 나이를 짐작할 수 없는 목소리였다. 어리게도, 늙게도 들리는, 이상한 균형을 이룬 음색이었다.
"귀를 보고 있었습니다."
도윤은 솔직하게 대답했다. 숨기는 게 오히려 더 위험할 것 같았다.
"거짓말은 안 하는 편이 좋을 텐데."
"거짓말이 아닙니다."
그녀의 눈이 가늘어졌다. 초록빛이 도는 눈동자였다. 그 눈동자 속에서, 사람을 판단하는 저울질이 지나가고 있었다. 도윤은 그 시선 아래서 반사적으로 감정을 발동시켰다.
웅—
이름부터 확인하고 싶었다. 상대의 정체를 알면, 최소한의 안전거리를 계산할 수 있었다. 지금까지 그래왔다. 어떤 상대든, 감정을 발동시키면 이름이 떴다. 상태가, 의도가, 급소가 눈앞에 펼쳐졌다. 도윤에게 그것은 세상을 읽는 방법이었다.
[???]
이름이 뜨지 않았다.
도윤은 눈을 몇 번이나 깜빡였다. 시야 속 창을 다시 노려보았다. 상태도, 의도도, 급소도 모두 빈칸이었다. 텅 빈 사각형만이 허공에 떠 있었다.
처음 겪는 일이었다. 지금까지 감정은 예외 없이 작동했다. 박달구에게도, 정칠성에게도, 잿골의 어떤 사람에게도 통했다. 심지어 짐승에게도 통했다. 그런데 이 여자 앞에서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도윤의 표정이 흔들렸다. 아주 짧은, 그러나 분명한 흔들림이었다.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고, 시선이 한순간 허공을 향했다가 다시 돌아왔다.
그녀는 그 미묘한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방금, 뭘 한 거지."
목소리에 처음으로 날이 섞였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거짓말은 안 하는 편이 좋다고 했잖아."
그녀가 한 걸음 다가섰다. 발밑에서 흙이 눌리는 소리가 났다. 아주 작은 소리였지만, 도윤의 귀에는 유난히 크게 들렸다.
도윤은 물러서지 않았다. 물러설 이유가 없었다. 몸이 뒤로 빠지려는 반응을 억지로 붙잡았다. 오히려 이 낯선 존재가 자신의 능력을 감지했다는 사실이 더 중요했다. 상대가 뭔가를 느꼈다는 것은, 상대 역시 뭔가를 가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당신도 뭔가를 느꼈다는 뜻이겠군요."
도윤은 담담하게 말을 받았다. 목소리가 흔들리지 않도록 애썼다.
그녀의 눈매가 좁아졌다. 대답은 곧바로 나오지 않았다. 침묵이 두 사람 사이에 걸렸다. 골목 안으로 바람이 한 번 더 지나갔고, 그 바람에 그녀의 녹색 머리카락이 살짝 흔들렸다.
"이름이 뭡니까."
도윤이 먼저 물었다.
"먼저 묻는 쪽이 이름을 밝히는 법 아닌가."
"도윤입니다."
이름을 밝히는 데 망설임은 없었다. 어차피 잿골에서는 누구나 그를 도윤이라 불렀다. 숨길 이름이 아니었다.
그녀는 잠시 그를 응시했다. 저울질이 다시 시작되는 눈빛이었다. 그러다 낮은 목소리로, 짧게 말했다.
"…설아린."
짧은 이름이 낮은 목소리로 흘러나왔다. 도윤은 그 이름을 마음에 새겼다. 감정으로 확인할 수 없는 이름이었기에, 오히려 더 또렷하게 기억해야 했다.
"엘프가 왜 여기 있습니까."
"질문이 그거였나. 실망스럽군."
"실망스러워도 답을 듣고 싶습니다."
설아린은 잠시 도윤을 응시했다. 그 시선에는 경계와 함께 미묘한 흥미가 섞여 있었다. 열두 살짜리 아이가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고 있다는 사실이, 그녀에게는 낯선 모양이었다.
"엘프의 숲이 불탔다."
짧은 문장이었다. 하지만 그 안에 담긴 무게는 짧지 않았다. 목소리에 아주 잠깐, 갈라진 틈이 스쳤다가 다시 메워졌다.
"누가."
"몰라. 아니, 알아도 지금은 말할 수 없어."
"그래서 잿골로 왔습니까."
"이곳은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곳이니까."
도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 대답에는 진심이 섞여 있었다. 감정으로도 읽히지 않는 존재였지만, 말투와 표정 사이의 틈은 읽어낼 수 있었다. 전생의 감각이었다. 사람이 진짜로 지친 얼굴을 할 때, 그 눈꺼풀이 어떻게 움직이는지, 도윤은 이미 여러 번 목격했다.
잿골은 그런 곳이었다. 왕국의 지도에서 지워진 것 같은 마을. 세금 관리도, 순찰도, 관심도 닿지 않는 땅. 도망자와 낙오자, 버려진 자들이 흘러들어와 흙바닥에 뿌리를 내리는 곳. 도윤 자신도 그중 하나였다.
"저도 이곳에서 뭔가를 시작하려던 참입니다."
"들었어. 박달구의 시험을 받고 있다지."
"이미 알고 계셨습니까."
"잿골에서 벌어지는 일은 대부분 알고 있어."
도윤은 그 말에서 뭔가를 감지했다. 이 여인은 단순히 은신처를 찾아온 도망자가 아니었다. 관찰하는 존재였다. 며칠 만에 마을의 소문을 다 파악할 정도로, 조용히, 그러나 촘촘하게 잿골을 훑고 있는 눈이었다.
그리고 관찰당하는 쪽인 도윤의 입장에서, 이건 위험이자 동시에 기회였다. 위험한 것은, 자신의 정체가 얼마나 노출되었는지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기회인 것은, 이 여인이 가진 정보력과 능력이 앞으로의 계획에 반드시 필요하다는 점이었다.
"당신도, 뭔가 남들과 다른 능력을 갖고 있죠."
설아린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손을 들어 보였다. 손끝에서 옅은 초록빛이 번졌다. 나뭇잎 모양의 작은 문양이 손등 위에 떠올랐다.
점. 선. 물결. 그리고 그 위에 얹힌 나뭇잎 문양.
빛은 오래 머물지 않았다. 문양이 잠깐 손등 위에서 맥동하듯 밝아졌다가, 다시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 짧은 순간, 도윤의 발밑에서 아주 미세한 진동이 느껴졌다. 흙이 살짝 들썩이는 듯한, 눈으로는 확인할 수 없는 감각이었다.
도윤은 그 문양을 보는 순간, 자신의 시야에도 익숙한 감각이 스쳤다. 감정 능력이 발동될 때 나타나는 창의 테두리와 흡사한 느낌이었다. 세계가 겹쳐 보이는 순간이었다. 자신이 보는 방식과, 그녀가 보는 방식이 서로 다른 문을 통해 같은 곳을 향하고 있다는 확신이 들었다.
"이것도, 세상의 상식과 다른 겁니까."
"엘프 중에서도 극히 드문 힘이야. 대지의 흐름을 읽지."
"저도, 상식과 다른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도윤은 처음으로,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 존재에게 자신의 비밀 한 조각을 드러냈다. 계산이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상대가 이미 자신의 능력이 발동되는 것을 감지한 이상, 완전히 숨기는 쪽보다 조금 내어주고 신뢰를 쌓는 쪽이 낫다는 판단이었다.
설아린의 눈이 살짝 커졌다.
"인간이 그런 게 가능하다고."
"저도 왜 가능한지는 모릅니다. 하지만 확실히 있습니다."
둘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은 낯선 두 존재가 서로의 비밀을 조심스레 저울질하는 시간이었다. 골목 밖에서 누군가의 발소리가 지나갔지만, 두 사람 모두 그쪽으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설아린이 먼저 침묵을 깼다.
"열두 살짜리가 이런 걸 숨기지 않고 말한다는 건, 계산이 있다는 뜻이겠지."
"계산이 없으면 살아남지 못하는 나이입니다."
"…흥미롭군."
그녀의 입꼬리가 아주 살짝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갔다.
"거래를 하나 하죠."
도윤이 먼저 말을 꺼냈다.
"거래."
"저는 이곳에서 뭔가를 만들 겁니다. 당신의 힘이 필요할 겁니다. 그리고 저도, 당신에게 숲을 태운 자를 찾을 방법을 제공할 수 있을 겁니다."
설아린은 팔짱을 꼈다. 그 표정에는 여전히 의심이 남아 있었지만, 완전한 거절의 기색은 아니었다.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지. 방금 만난 인간 아이가."
"근거는 지금 없습니다. 하지만 지켜보면 알게 될 겁니다."
"말은 쉽지."
"말로 안 되면, 시간이 증명하겠죠."
"조건이 뭐지."
"제 곁에서, 제가 못 보는 것을 봐주는 겁니다."
"그건 너무 일방적인데."
"그럼 당신이 못 보는 것도, 제가 봐드리죠."
설아린의 입가에 처음으로 옅은 웃음이 스쳤다. 아주 짧았지만, 분명한 웃음이었다.
"열두 살짜리가 말은 잘하는군."
"살아남으려면 필요한 기술입니다."
"그 나이에 이미 살아남는 게 뭔지 안다는 거야?"
"모르면 지금 여기 없었을 겁니다."
그녀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눈동자 속의 저울질이 어느 한쪽으로 조금 기운 것 같았다.
"좋아. 지켜보지."
"지켜보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필요할 때 옆에 있어야 합니다."
"욕심이 많군."
"거래는 그런 겁니다."
설아린은 대답 대신 짧게 숨을 내쉬었다. 웃음인지 한숨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소리였다.
두 사람의 대화가 그렇게 끝나갈 무렵, 골목 저편에서 발소리가 들려왔다. 익숙한 걸음걸이였다. 발을 끄는 습관이 있는, 조금 급한 리듬이었다.
정칠성이었다.
"도윤. 박달구 님이 다시 부르신다."
정칠성은 골목 안으로 들어서며 두리번거렸다. 그늘 속에 서 있는 설아린의 형체를 스치듯 보았지만, 특별히 의식하지 못한 눈치였다. 그저 누군가 서 있다는 정도로 지나쳤다.
도윤은 설아린을 향해 눈짓했다. 그녀는 이미 그늘 속으로 반쯤 몸을 숨긴 채였다. 녹색 머리카락이 그늘의 색과 거의 겹쳐, 자세히 보지 않으면 사람의 형체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또 봅시다."
도윤이 낮게 말했다.
"살아 있으면."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그 말에는 감정이 얹혀 있지 않았다. 그저 사실을 말하는 투였다. 그런데도 그 안에는 묘한 무게가 있었다. 이 잿골에서, 살아 있다는 것 자체가 이미 조건부라는 뜻이었다.
도윤은 그 말을 곱씹으며 정칠성을 따라 걸음을 옮겼다.
"누구야, 저 여자?"
정칠성이 골목을 빠져나오며 물었다.
"그냥, 지나가던 사람입니다."
"묘하게 생겼던데. 머리색이."
"그렇습니까. 저는 잘 못 봤습니다."
도윤은 대답을 흘리며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정칠성은 더 캐묻지 않았다. 원래 남의 일에 오래 신경 쓰는 성격이 아니었다.
두 사람은 좁은 골목을 벗어나 큰길로 나섰다. 잿골의 오후는 여전히 조용했다. 대장간 쪽에서 망치 소리가 규칙적으로 들려왔고, 어딘가에서 아이들이 뛰노는 소리가 섞여 들었다. 평범한 마을의 소리였다.
하지만 도윤의 머릿속은 평범하지 않았다.
[???]
그 빈칸이 계속 눈앞에 어른거렸다. 지금까지 감정은 실패한 적이 없었다. 어떤 대상이든, 이름이 뜨고 상태가 뜨고 의도가 떴다. 그것이 도윤의 유일한 무기였다. 세상을 먼저 읽는 힘. 상대보다 한 걸음 앞서 판단할 수 있는 힘.
그런데 그 힘이, 처음으로 통하지 않았다.
엘프라서인지, 설아린 개인의 특수한 능력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어쩌면 이 세계에는, 자신의 감정으로도 읽을 수 없는 존재들이 더 있을지도 몰랐다. 그 생각이 들자, 등줄기를 따라 서늘한 감각이 흘렀다.
지금까지는 자신이 우위에 서 있다고 믿었다.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자신은 볼 수 있었으니까. 그런데 그 전제가 흔들리는 순간, 지금까지 쌓아온 계산들도 다시 검토해야 했다.
박달구의 대장간으로 가는 길, 도윤의 걸음은 겉으로는 평온했지만 속으로는 빠르게 돌아가고 있었다. 설아린이라는 존재를 어디까지 신뢰할 수 있을지, 그녀가 가진 힘이 자신의 계획에 얼마나 필요할지,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가 자신에 대해 얼마나 알아냈는지.
등 뒤로, 설아린의 시선이 여전히 그를 좇고 있다는 것을, 도윤은 뒷목의 서늘함으로 느끼고 있었다.
그늘 속에서 그녀는 아직 움직이지 않은 채, 멀어지는 두 사람의 등을 바라보고 있었다. 초록빛 눈동자 안에서, 처음 만난 인간 아이에 대한 저울질이 여전히 끝나지 않은 채로 남아 있었다.
그리고 그 저울의 눈금이 어느 쪽으로 기울지는, 아직 아무도 알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