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왕도의 왕립 기사 아카데미는 청호 공작가에서 반나절 거리였다.
이도현은 마차 안에서 내내 손을 쥐었다 펴며 마음을 다잡았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은 익숙했다. 몇 번이고 지나쳤던 길이었지만, 오늘만큼 길게 느껴진 적은 없었다.
'진심을 전하면 된다.' 그는 그렇게 스스로를 다독였다.
하지만 마차가 아카데미 정문에 다다를 즈음, 그 다짐은 이미 불안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소설 속에서 읽었던 문장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한도경이라는 인물이 이도현을 어떻게 대했는지, 그 서술들이 하나씩 떠올랐다. 냉소, 경멸, 그리고 끝내 풀리지 않는 증오.
'알고 있었다. 그래도 가야 한다.' 그는 마차 손잡이를 꽉 쥐었다.
마부가 정문 앞에서 마차를 세웠다. 이도현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그리고 마차에서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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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도경은 훈련장 한복판에서 목검을 휘두르고 있었다.
평민 출신이었으나 실력만으로 아카데미에 들어온 인물이었다. 유채린의 친오빠였지만, 어린 시절 사정으로 평민으로 자랐다는 소문이 있었다.
쉭- 쉭-
목검이 허공을 갈랐다. 동작 하나하나에 절제된 힘이 있었다.
발끝이 땅을 스치는 소리, 숨을 고르는 소리마저 일정했다. 오랜 시간 다져진 몸놀림이었다.
이도현이 훈련장 입구에 서자, 주변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쏠렸다.
"청호 공작가의 이도현 공자다." 누군가 낮게 속삭였다.
"저 사람이 여긴 왜?" 다른 훈련생이 되물었다.
말소리는 작았지만, 훈련장 전체에 퍼지기엔 충분했다.
한도경도 그 소리를 들었는지 목검을 멈췄다. 그의 시선이 천천히 이도현을 향했다.
눈빛에 담긴 것은 경계와 혐오였다. 감추려 하지도 않았다.
목검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변할 정도였다.
"여긴 왜 온 거지." 한도경이 물었다. 존댓말은 없었다.
"할 이야기가 있어서 왔습니다." 이도현이 답했다.
존댓말이었다. 상대의 신분이 낮았음에도 그랬다.
주변 훈련생들 사이에서 낮은 웅성거림이 일었다. 공작가 공자가 평민에게 존댓말을 쓰는 광경이 흔치 않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눈살을 찌푸렸고, 누군가는 신기한 듯 이도현을 훑어보았다.
"채린이한테 갈 이야기라면 안 듣겠어." 한도경의 목소리가 차가웠다.
"채린 님의 일이기도 합니다." 이도현이 고개를 숙였다. "제가... 지금까지 그녀에게 한 짓을 사죄하고 싶습니다."
"사죄?" 한도경이 짧게 웃었다. 조롱이 섞인 웃음이었다.
"몇 년을 두고 사람 하나를 짓밟아 놓고, 이제 와서 사죄한다고 다 없어지는 줄 알아?"
"그렇게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래도 말은 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들을 필요 없어." 한도경이 목검을 다시 고쳐 잡았다.
목검 끝이 이도현을 향해 겨눠졌다. 실전이 아니었지만, 그 기세는 실전과 다르지 않았다.
"채린이가 네 앞에서 웃는 척이라도 한다면, 그건 두려워서 그런 거야. 진심이 아니라."
이도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것이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유채린의 얼굴을 떠올렸다. 자신을 마주할 때마다 짓던 그 어색한 웃음. 그것이 두려움에서 나온 것이라는 사실을, 이제야 제대로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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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거 알아?" 한도경이 목검 끝으로 바닥을 툭 치며 말을 이었다.
"평민으로 자란 나는, 어릴 때 진짜 무서운 게 뭔지 잘 알아. 배고픔이나 추위 같은 게 아니야."
"힘 있는 자가 아무 이유 없이 나를 짓밟을 수 있다는 사실이지."
그는 잠시 말을 멈췄다. 옛 기억이 스치는 듯, 눈빛이 흔들렸다가 다시 굳어졌다.
"너 같은 놈들은 그걸 몰라. 짓밟으면서도 그게 짓밟는 건지도 몰라."
"이제는 압니다." 이도현이 낮게 말했다.
"이제 와서?" 한도경의 눈빛이 더 차가워졌다.
"편하네. 아프게 하고, 나중에 미안하다고 한마디 하면 다 끝나는 거니까."
"그렇게 끝날 거라 생각하지 않습니다." 이도현이 고개를 저었다.
"그럼 뭘 하겠다는 건데."
한도경의 목소리에 짜증이 섞였다. 목검을 쥔 손이 다시 움찔거렸다.
"제가 할 수 있는 건... 두 번 다시 같은 짓을 하지 않는 것, 그리고 당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데 방해가 되지 않는 것입니다."
한도경의 표정이 순간 흔들렸다. 하지만 곧 다시 굳어졌다.
"내가 원하는 방향?" 한도경이 되물었다. "너 같은 놈이 뭘 안다고."
목소리에 담긴 것은 경멸이었지만, 그 밑에 아주 작게 흔들리는 무언가가 있었다. 이도현은 그것을 놓치지 않았다.
"당신은... 앞으로 큰일을 하실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도현이 조심스레 말을 이었다.
말을 하면서도 스스로 이상함을 느꼈다. 소설 속 지식을 근거로 하는 말이었지만, 근거를 설명할 수는 없었다.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그는 속으로 되물었다. '이 사람이 훗날 왕국의 검이 될 거라는 걸, 대체 무슨 말로.'
한도경이 그 말을 듣고 눈을 가늘게 떴다.
"뭔 개소리야." 한도경이 목검을 어깨에 걸쳤다.
"됐고. 다시 오지 마. 채린이 앞에도 나타나지 마."
"그건 어렵습니다." 이도현이 답했다. "저는 그녀의 혼약자니까요."
"그 혼약, 파기시킬 방법을 찾고 있어." 한도경이 등을 돌렸다.
"내가 힘을 얻으면, 제일 먼저 그걸 할 거야."
그 말을 남기고 한도경은 훈련장 저편으로 걸어가 버렸다.
목검을 다시 쥔 그의 등에는 더는 대화할 필요가 없다는 단호함이 배어 있었다.
훈련장에 남은 훈련생들의 시선이 다시 이도현에게로 모였다. 누구도 먼저 말을 걸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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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도현은 그 자리에 오래 서 있었다.
주변의 시선이 여전히 그를 향해 있었지만, 개의치 않았다.
발밑의 흙바닥을 내려다보았다. 훈련생들의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혀 있었다.
'예상보다 더 깊은 증오였다.' 그는 그렇게 결론지었다.
하지만 실망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예상했던 반응이었다.
소설 속에서도 한도경은 이도현을 끝까지 믿지 않았다. 그것이 이야기의 결말까지 이어졌다.
그 결말에서 한도경은 결국 유채린을 데리고 이도현의 곁을 완전히 떠났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 결말을 바꾸겠다고 여기까지 왔으면서, 하루 만에 마음을 돌릴 수 있을 거라 생각했나.' 이도현은 스스로를 비웃었다.
'믿음을 바라고 온 게 아니다.' 이도현은 스스로를 다잡았다.
'그저 알려야 했을 뿐이다. 내가 더 이상 예전의 내가 아니라는 것을.'
그는 천천히 훈련장 입구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등 뒤에서 목검 부딪는 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한도경이 훈련을 재개한 모양이었다.
마차로 돌아가는 길, 아카데미 정문 앞에서 몇몇 훈련생들이 낮게 속닥이는 소리가 들렸다.
"청호 공작가 공자가 왜 저런 짓을 했지?"
"뭔가 노리는 게 있는 거 아니야?"
"그러게. 저런 놈이 갑자기 착해질 리가 없잖아."
"한도경 선배랑 무슨 관계가 있길래 저렇게 매달리는 거지?"
"몰라. 소문으로는 유채린 님 혼약자라던데."
"아, 그 얘기 들었어. 근데 저 태도는 좀 이상하지 않아? 공작가 공자가 평민한테 존댓말을 쓰다니."
이도현은 그 말들을 못 들은 척 지나쳤다. 걸음을 서두르지도, 늦추지도 않았다.
그저 묵묵히 정문을 향해 걸었을 뿐이다.
마차에 오른 후, 창밖을 바라보며 낮게 되뇌었다.
'그래, 아무도 쉽게 믿지 않겠지.'
그것이 자신이 만들어 놓은 결과였다. 감내해야 할 몫이었다.
마차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바퀴가 자갈길을 구르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이어졌다.
이도현은 눈을 감았다. 한도경의 마지막 말이 귓가에 남아 있었다. '내가 힘을 얻으면, 제일 먼저 그걸 할 거야.'
그 말에는 단순한 협박 이상의 무게가 있었다. 실제로 그럴 수 있는 힘을 가진 자였기 때문이다.
'막아야 한다. 어떻게든.' 이도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 정도의 조롱은 이제 시작일 뿐이었다. 곧, 훨씬 더 큰 파도가 그를 덮칠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