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지하실을 빠져나오자 바람이 얼굴을 때렸다.
밤공기였다. 차갑고 습했다.
폐부 깊숙이 들어온 공기에서 흙냄새와 풀냄새가 뒤섞여 났다. 얼마나 오래 그 지하에 갇혀 있었는지, 이렇게 평범한 바람 한 줄기가 이토록 낯설게 느껴질 줄은 몰랐다.
【대상 이동 완료. 지상 도착.】
이런 것까지 알려주다니, 고맙긴 한데 조금 무섭다.
소영이라는 여자의 품에 안긴 채, 나는 처음으로 하늘을 봤다.
달이 반쯤 가려져 있었다.
구름이 얇게 걸쳐 있어서 달빛이 흐릿하게 번졌다. 별은 몇 개 보이지 않았다. 도시의 불빛 때문인지, 원래 이 세계의 밤하늘이 이런 건지 알 수 없었다.
"조심히, 조심히요."
소영이 나를 마차 비슷한 것에 눕혔다.
나무 냄새와 말 냄새가 코를 찔렀다. 바닥에 깔린 담요는 거칠었지만, 그래도 지하실 바닥보다는 백배 나았다.
주변에서 병사들이 서둘러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철컥, 철컥.
갑옷이 부딪치는 소리였다. 발소리는 급했고, 숨소리는 거칠었다.
"추격이 시작됐습니다!"
누군가 외쳤다.
【적대 세력 접근 중. 거리 300미터.】
미터라니, 이 세계에서 그런 단위를 쓰는지 몰랐다.
아니, 잠깐. 이 알림이 내 전생 지식에 맞춰서 나오는 건가?
그렇다면 이 세계 사람들은 실제로는 다른 단위를 쓰는데, 나한테만 미터로 번역해서 보여주는 거란 소리다. 편의성은 인정하지만, 어딘가 소름이 돋았다. 내 머릿속을 누군가 들여다보고 있다는 뜻이니까.
생각할 틈도 없이 마차가 덜컹거리며 움직였다.
덜컹, 덜컹.
바퀴가 자갈길을 밟는 소리가 이어졌다. 몸이 흔들릴 때마다 갈비뼈 어딘가가 뜨끔거렸다. 아직 다 낫지 않은 모양이었다.
소영이 내 이마에 손을 얹었다. 열을 재는 손짓이었다.
손끝이 차가웠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안심이 됐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 왜 이렇게 익숙한 걸까.
"도련님, 저 기억 안 나세요?"
목소리가 조심스러웠다.
기억이라니. 뭔가 있긴 한데, 안개 속처럼 흐릿했다.
【기억 복원 중. 진행률 12퍼센트.】
진행률까지 나오네.
이거 완전 로딩 화면 보는 기분이잖아. 퍼센트 표시가 늦게 올라가면 답답해서 마차 벽이라도 두드릴 판이었다.
그때, 갑자기 눈앞이 어지러워졌다.
머릿속에서 뭔가가 핑 돌았다. 속이 울렸다. 뱃속이 뒤집히는 느낌이었다.
장면이 바뀌었다.
* * *
따뜻한 방, 창문으로 햇살이 들어왔다.
먼지 낀 공기 속에서도 빛은 눈부셨다. 커튼 자락이 바람에 살짝 흔들렸다.
짙은 자주색 긴머리를 늘어뜨린 여자가 내 손을 잡고 있었다.
손이 부드러웠다. 향긋한 냄새가 났다. 꽃향기 같기도 하고, 약초 냄새 같기도 했다.
"도윤아, 아프면 참지 말고 말해야 해."
목소리가 부드러웠다.
그 여자는 웃고 있었지만, 눈은 걱정으로 가득했다.
【기억 복원: 백작부인 한서연.】
한서연···
어머니.
가슴 한복판이 뜨거워졌다. 갑자기 눈물이 났다.
"엄마."
입에서 나온 말이 낯설게 들렸다.
그 방에서 나는 어렸다. 아마 네 살쯤이었을 것이다. 손도 작고, 발도 작고, 시야도 지금보다 훨씬 낮았다.
손에서 희미한 빛이 나고 있었다. 처음 마법을 쓰던 순간이었다.
빛은 은은한 초록빛이었다. 손바닥 위에서 작은 반딧불이처럼 일었다가 사라졌다.
"이건, 이건 회복 마법이구나."
어머니의 목소리가 떨렸다. 놀람과 걱정이 뒤섞여 있었다.
"이렇게 어린데···"
말을 잇지 못하고 나를 꼭 안았다. 심장 소리가 들렸다. 빠르게 뛰고 있었다.
그 뒤로 이어지는 기억은 조각조각이었다.
마법 수업을 받던 방, 아버지 이태호가 검을 들고 서 있던 모습.
금발을 뒤로 묶은 그가 나를 보며 짓던 놀란 표정.
검을 쥔 손등에 힘줄이 서 있었다. 표정은 무뚝뚝했지만, 눈빛만은 숨기지 못했다.
"이 정도 재능이면 왕국 역사에도 없을 텐데."
낮게 중얼거리던 목소리.
그 뒤로 방 안의 촛불이 흔들렸던 것 같기도 하다. 아니, 확실하지 않다. 기억이 자꾸 흐트러졌다.
그 다음은, 갑자기 캄캄했다.
【기억 복원 실패. 손상 부위: 감금 직전 기억.】
* * *
다시 흔들리며 눈을 떴다.
마차 안이었다. 소영이 걱정스러운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다.
"도련님, 괜찮으세요? 갑자기 눈물을 흘리셔서···"
손등으로 얼굴을 만져보니 정말로 젖어 있었다.
"방금···"
말을 하려는데 목이 메어 나오지 않았다.
"어머니를, 봤어요."
그 한마디에 소영의 표정이 복잡하게 변했다.
기쁨과 슬픔이 동시에 섞인 얼굴이었다.
입술이 살짝 떨렸고, 눈동자는 흔들렸다. 뭔가 말하려다 삼키는 듯한 표정이었다.
"백작부인님께서는···"
말을 하다가 소영이 멈췄다.
손이 무릎 위에서 꽉 쥐어졌다.
"지금은, 안전한 곳에 계세요."
뭔가 숨기는 게 분명했다.
【정보 은폐 감지.】
아, 이런 알림도 뜨는구나.
이건 완전 거짓말 탐지기잖아. 편리한 건 좋은데, 자꾸 이런 식으로 상황을 파악하니 사람 말을 있는 그대로 믿기가 힘들어졌다. 소영이 나쁜 사람 같지는 않은데, 그렇다고 전부 털어놓는 것도 아니었다.
"어머니가 왜 감금에서 저를 데려가지 않았어요?"
물음이 날카롭게 나왔다.
소영이 눈을 피했다.
"그건, 도련님이 직접···"
말끝을 흐렸다. 마차 안이 잠깐 조용해졌다. 바퀴 소리만 계속 이어졌다. 나는 대답을 기다렸지만, 소영은 입술만 몇 번 달싹였다.
뭔가 더 물으려고 입을 뗐는데, 그 순간, 마차 밖에서 함성이 터졌다.
"발견됐다!"
누군가의 외침이었다.
【적대 세력 조우. 전투 임박.】
마차가 급격히 방향을 틀었다.
덜컹!
몸이 쏠리면서 소영의 품에 부딪혔다.
"이런, 벌써 따라왔어요."
소영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그녀가 내 몸을 감싸안았다. 팔에 힘이 잔뜩 들어가 있었다. 숨소리가 거칠어지는 게 느껴졌다.
바깥에서 말발굽 소리가 사방에서 들려왔다.
또각, 또각, 또각.
귀에 익은 소리였다.
정확히는, 어디선가 들어본 것 같은 리듬이었다. 규칙적이면서도 위압적인, 조련이 잘 된 말이 걷는 소리.
그 여자가 왔다는 뜻이었다.
"소영 씨, 방금 그거, 저 감금됐던 이유가 뭐였는지···"
말을 다 끝맺지 못했다.
창밖에서 뭔가가 마차를 향해 날아왔다.
쾅!
마차가 옆으로 뒤집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