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던전 안쪽으로 들어갈수록 공기가 무거워졌다.
벽을 타고 흐르는 습기, 바닥에 눌어붙은 오래된 핏자국, 그리고 어디선가 풍겨오는 짐승의 체취.
몬스터의 밀도는 눈에 띄게 높아지고 있었다.
서은하는 연속으로 마법을 쏘아냈다.
화염구가 허공을 가르며 날아가 벽을 태우고 지나갔다. 그 뒤를 이어 두 번째, 세 번째 화염구가 연달아 터졌다. 좁은 통로 안이 순식간에 붉은 빛으로 가득 찼다.
고블린 무리가 비명을 지르며 흩어졌다.
"왼쪽!"
강여진이 소리쳤다. 검이 허공을 갈랐다. 살점이 튀는 소리, 뒤이어 짧은 신음.
하늬는 단검 두 자루를 양손에 쥔 채 낮게 웅크렸다가, 몬스터의 다리 사이로 미끄러져 들어가 목을 그었다.
전투는 반복됐다.
첫 번째 웨이브가 끝나면 곧이어 두 번째가 몰려왔고, 두 번째가 끝나면 세 번째가 밀려왔다.
서은하의 손끝이 떨리기 시작한 것은 다섯 번째 웨이브를 넘긴 직후였다.
마력이 바닥나고 있었다.
지팡이를 쥔 손가락 끝이 하얗게 변했다. 마법을 쓸 때마다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뭔가가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익숙한 감각이었다. 다만 오늘은 그 속도가 지나치게 빨랐다.
"괜찮아요?"
하늬가 물었다. 단검을 허리춤에 꽂으며 서은하 곁으로 다가왔다.
"괜찮아요."
대답은 짧았다.
하지만 그 순간, 다리가 살짝 휘청거렸다. 균형을 잃은 무릎이 꺾이려는 걸 겨우 버텨냈다.
강여진이 검을 앞세워 그녀 곁을 지켰다. 등 뒤로 다가오던 몬스터 하나를 단칼에 베어 넘긴 뒤, 검 끝의 피를 털어내며 말했다.
"조금 쉬는 게 낫겠어요."
서은하는 자존심이 상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남에게 약한 모습을 보이는 것을 싫어하는 성격이었다. 하이엘프로 태어난 순간부터 마력은 그녀의 자부심이었다. 남들이 며칠을 훈련해야 겨우 흉내 내는 마법을, 그녀는 숨 쉬듯 다뤘다. 그런 그녀가 마력이 바닥났다는 걸 인정하는 건, 단순한 체력 문제가 아니었다.
"아직 더 갈 수 있어요."
그녀가 지팡이를 다시 고쳐 쥐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때, 김판수가 조용히 다가왔다.
발소리조차 크지 않았다. 전투가 끝난 직후의 소란 속에서도 그의 걸음은 이상하게 조용했다.
손바닥을 그녀 쪽으로 향한 채였다.
"잠시만요."
서은하가 경계하며 물었다.
"뭐 하는 거예요."
"마력 순환 보조입니다."
그가 대답했다. 표정에는 아무런 감정도 실려 있지 않았다.
"레벨1 스킬이라서 큰 도움은 안 될 겁니다."
그의 손끝에서 옅은 빛이 흘러나왔다. 촛불보다도 희미한, 거의 눈에 보이지 않을 정도의 빛이었다.
서은하는 순간적으로 물러서려 했다. 낯선 마력이 자신의 몸에 닿는다는 것 자체가 불쾌했다. 하이엘프에게 마력이란 곧 혈통이었고, 자존심이었다. 누군가의 마력이 자신의 것과 섞인다는 건, 어릴 때부터 배워온 예절과도 어긋나는 일이었다.
하지만 몸이 먼저 반응했다.
빛이 지팡이를 감싸는 순간, 서은하는 숨을 멈췄다.
이상한 느낌이었다.
단순히 마력이 회복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녀의 마력이 그의 마력과 맞닿는 순간, 뭔가 공명하는 듯한 울림이 느껴졌다.
웅—
그것은 소리가 아니었다.
감각이었다. 몸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 진동하는 듯한. 마치 오랫동안 닫혀 있던 문 너머에서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것 같은.
서은하는 놀라 손을 뒤로 뺐다. 지팡이가 손에서 미끄러질 뻔했다.
"이게... 뭐예요."
"마력 회복 보조입니다."
김판수가 다시 대답했다. 담담한 얼굴이었다.
"아뇨, 그게 아니라."
서은하는 자신의 손끝을 내려다보았다.
방금까지 텅 비어 있던 마력이 순식간에 채워져 있었다. 그것도 이상할 만큼 자연스럽게, 마치 원래부터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보통의 마력 회복은 그런 식이 아니었다. 회복 마법은 외부에서 흘려 넣는 것이었고, 그 이질감이 항상 느껴졌다. 마치 다른 사람의 손으로 자신의 몸에 물을 붓는 것처럼, 채워지는 방향과 원래 흐름 사이에 미묘한 마찰이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그런 마찰이 없었다.
오히려 처음부터 그녀 자신의 마력이었던 것처럼, 아무런 저항도 없이 스며들었다.
"방금 뭔가 느껴졌어요. 이상한 울림 같은 거."
김판수는 고개를 갸웃했다.
"저는 잘 모르겠는데요."
그 대답이 서은하의 마음을 더 어지럽혔다.
하이엘프인 그녀는 마력에 관해서라면 누구보다 예민했다. 어릴 때부터 마력의 흐름을 감지하는 훈련을 받아왔다. 스승은 늘 말했다. 마력은 정직하다고. 거짓말을 하지 못하는 유일한 것이라고. 그래서 마력을 다루는 자는 절대 자신의 마력을 속일 수 없다고.
방금 느낀 그 공명은, 단순한 착각이라고 넘기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런데 그것을 만든 사람이, 정작 아무것도 모른다는 듯 태연했다.
"...아무것도 아닌 거예요, 그게?"
그녀가 다시 물었다. 목소리에 미묘한 떨림이 있었다.
"아마도요."
김판수가 대답하며 몸을 돌렸다. 다음 몬스터 무리가 다가오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서은하는 그 뒷모습을 바라보며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뭔가 이상한 감정이 그녀 안에서 꿈틀거렸다.
분명 특별한 일이 있었다. 그녀는 그것을 확신했다. 십수 년을 마력과 함께 살아온 그녀의 감각이 착각을 일으킬 리 없었다.
그런데 상대는 관심조차 없어 보였다.
그 무관심이, 이상하게도 그녀의 자존심을 긁어놓았다.
지금까지 그녀에게 마력으로 접근한 사람들은 대체로 두 종류였다. 그녀의 재능에 경탄하는 사람들, 혹은 그녀의 재능을 이용하려는 사람들. 어느 쪽이든 그녀의 마력에 관심을 보였다.
그런데 이 사람은 아니었다.
방금 자신의 손끝에서 무언가 특별한 일이 벌어졌다는 걸, 정말로 모르는 걸까. 아니면 알면서도 굳이 감추는 걸까.
"...두고 봐요."
그녀가 작게 중얼거렸다. 아무도 듣지 못한 말이었다.
강여진이 그녀의 표정을 보며 물었다.
"왜 그래요?"
"아무것도 아니에요."
서은하는 서둘러 지팡이를 고쳐 잡고 앞으로 나섰다. 방금 회복된 마력이 뱃속에서 낯설게 맴돌고 있었다. 익숙하면서도 낯선, 그 이질적인 온기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시선은 자꾸 김판수의 등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마력이 다시 그와 부딪히는 순간을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일행은 계속 걸었다.
통로가 아래로 꺾이며 좁아졌다. 벽을 이루던 돌의 색이 점점 어두워졌고, 발밑의 바닥도 거칠어졌다. 처음에는 매끈하게 다듬어진 돌이었다면, 지금은 자연 그대로의 암반이 드러나 있었다.
공기가 눈에 띄게 차가워졌다.
숨을 내뿜을 때마다 하얀 김이 서렸다. 벽을 타고 흐르던 습기가 서서히 얼음처럼 굳어가는 게 보였다.
"이 아래로 계속 가면 최심층인데."
강여진이 지도를 확인하며 말했다. 지도는 던전 관리국에서 배포한 것으로, 최근 갱신된 정보가 반영되어 있었다.
"최심층은 원래 등급이 우리랑 안 맞아요."
서은하가 대답했다. 목소리에는 여전히 미묘한 긴장이 남아 있었다.
"이변 등급 상향이 반영된 거면, 최심층까지 열려 있을 수도 있어요."
하늬가 말했다. 그녀는 몇 걸음 앞서 걸으며 코를 킁킁거리고 있었다. 짐승처럼 예민한 후각이 그녀의 특기였다. 사람의 눈으로는 볼 수 없는 것들을, 그녀는 냄새로 먼저 감지했다.
익숙한 냄새들이 있었다.
곰팡이. 습기에 젖은 돌. 몬스터의 체취. 오래된 핏자국.
그런데 지금 코끝에 닿은 것은 그것들과는 조금 다른 무언가였다.
"뭔가... 또 있어요."
하늬가 걸음을 멈췄다.
"아까랑 비슷한 냄새."
김판수가 조용히 물었다.
"사람 냄새입니까?"
"네."
하늬가 고개를 끄덕였다. 코끝을 좁은 통로 쪽으로 향한 채, 눈을 살짝 감았다.
"그런데 좀... 이상해요."
"이상하다는 게."
강여진이 검자루를 고쳐 쥐며 물었다.
"지친 냄새."
하늬가 대답했다.
그 말에 네 사람은 서로를 쳐다봤다.
지친 냄새라는 게 무슨 뜻인지, 정확히 설명하기는 어려웠다. 하지만 하늬의 감각은 지금까지 한 번도 틀린 적이 없었다. 그녀가 이상하다고 느꼈다면, 실제로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최심층에 사람이 있다는 거예요?"
서은하가 물었다.
"확실친 않아요. 냄새가 너무 흐려서."
하늬가 눈을 뜨며 대답했다.
"거리가 먼가 봐요."
"그럴 수도 있고."
하늬는 말을 끝맺지 않았다. 대신 다시 코를 킁킁거리며 앞으로 몇 걸음 나아갔다.
"오래 갇혀 있던 냄새일 수도 있어요."
그 말에 강여진의 표정이 굳었다.
"오래 갇혀 있었다는 게, 무슨 뜻이에요."
"모르겠어요. 그냥... 느낌이 그래요."
하늬는 자신의 감각을 완벽하게 언어로 옮기지 못했다. 냄새라는 건 원래 그런 것이었다. 형태가 없고, 논리로 설명되지 않는. 다만 그녀의 몸은 이미 경고를 보내고 있었다. 목덜미의 털이 미세하게 곤두서는 느낌이었다.
김판수는 아무 말 없이 앞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의 시선이 향한 곳은 통로 저편, 어둠이 짙게 깔린 방향이었다.
다른 사람들은 그저 어둠을 보았다.
그런데 그는 그 어둠 속에서 뭔가 다른 것을 보고 있는 듯했다.
"판수 씨."
서은하가 그를 불렀다.
"뭐 보여요?"
"아니요."
그가 대답했다.
"그냥 소리가 들려서."
"소리요?"
그 순간, 모두가 숨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처음에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던전 특유의 정적, 벽을 타고 흐르는 물소리, 저 멀리서 울리는 몬스터의 울음소리뿐이었다.
하지만 조금 더 집중하자, 희미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챙—
금속과 금속이 부딪히는 소리였다.
그리고 다시.
챙— 챙—
일정한 간격으로 반복되는, 검이 부딪히는 소리.
최심층으로 이어지는 통로 저편에서, 그 소리가 점점 또렷해지고 있었다.
강여진의 손이 검자루를 더 단단히 움켜쥐었다.
"싸우고 있어요."
그녀가 낮게 중얼거렸다.
"누군가."
서은하는 방금 채워진 마력을 다시 한 번 확인하듯 지팡이를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뱃속에 남아있던 이질적인 온기가, 이제는 긴장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하늬는 여전히 코를 통로 쪽으로 향한 채 낮게 중얼거렸다.
"냄새가 진해지고 있어요."
"지친 냄새 말이에요?"
"네. 그리고 또 다른 것도."
그녀의 목소리가 순간 흔들렸다.
"이건... 피 냄새예요."
네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통로 저편, 어둠이 짙게 깔린 방향으로 향했다.
검이 부딪히는 소리는 점점 더 가까워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