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신관이 안쪽으로 사라진 뒤, 신전 안에는 무거운 정적만 남았다.
남은 학생들은 여전히 서로 붙어 서서 이쪽을 곁눈질하고 있었다.
방금 벌어진 학살 두 번—오타쿠 무리의 죽음과 병사 열둘의 폭사—을 연달아 목격한 그들 눈엔, 나 역시 또 다른 종류의 재앙처럼 보이는 게 분명했다.
시선이 느껴졌다.
정확히는 시선들이 느껴졌다.
스무 명 남짓 되는 애들이 나를 힐끔거리는데, 그 눈빛이 딱 이거였다. 편의점 야간 알바 뛰다가 갑자기 강도가 들어와서 강도를 때려눕힌 알바생 보는 눈빛.
고맙긴 한데, 무섭기도 한.
바닥엔 아직 병사들이 터져나간 흔적이 남아 있었다.
피와 살점, 그리고 뭔가 타는 냄새.
누가 걸레라도 들고 와서 치워줬으면 좋겠는데, 이 세계엔 청소 아르바이트생이 따로 있을 리가 없지.
"저, 저기요."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다가왔다.
이건우였다.
박서연이 그 뒤에 반쯤 숨듯이 서 있었다.
"우린... 아저씨 편이에요."
이건우가 말했다.
목소리가 살짝 떨리긴 했지만, 눈빛만은 확고했다.
"방금 저 애들 구해주신 거 봤어요. 그리고 병사들도... 저희를 죽이려던 놈들이었잖아요."
뜬금없는 충성 선언에 나는 좀 당황했다.
"편은 뭔 편."
내가 대꾸했다.
"난 그냥 눈앞의 애 둘 구한 거지, 무슨 조직 결성한 거 아니다."
이건우는 그래도 물러서지 않았다.
"그치만 지금 이 상황에서 아저씨한테 밉보이면 우리도 어떻게 될지 모르잖아요."
꽤 현실적인 계산이다.
고3짜리가 벌써 정치질을 배웠나 싶었지만, 뭐, 이 세계에선 정치질도 생존 스킬이니까.
박서연이 조심스레 끼어들었다.
"근데 이 세계, 위계 판정 하나 마음에 안 든다고 사람을 죽이는 곳이잖아요. 그런 곳에서 저희가 살아남으려면... 힘 있는 사람 옆에 있는 게 나을 것 같아서요."
솔직한 애다.
일단 그 솔직함이 마음에 들었다.
적어도 겉으로 의리니 뭐니 포장하지 않고, 계산기 두드린 결과를 그대로 말하는 게.
"그건 이해가 간다."
내가 답했다.
"근데 착각은 마라. 나는 너희 지도자 노릇 할 생각 없어. 그냥 각자 살아남는 게 우선이지."
[전도서 4:9,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나음은 그들이 수고함으로 좋은 상을 얻을 것임이라]
전도자님, 지금 이 상황에도 그 말씀이 통할까요.
두 사람이든 세 사람이든, 여기선 다 같이 국왕 눈 밖에 나면 다 같이 소각당하는 판인데.
이수아가 옆에서 조심스레 손을 들었다.
방금 재생 스킬로 몸이 조금 회복된 상태였다.
"저는... 강태호 아저씨한테 목숨 빚졌어요. 절대 잊지 않을게요."
"목숨 빚은 됐고."
내가 손사래를 쳤다.
"그냥 죽지 말고 살아있어. 그게 갚는 거다."
이수아는 그 말에 뭔가 울컥한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푹 숙였다.
어깨가 살짝 떨리는 게 보였다.
아, 이거 또 눈물 버튼 눌렀나.
나는 애써 시선을 돌렸다. 감동적인 장면에서 계속 눈 마주치고 있으면 나까지 이상해지니까.
김도윤도 겨우 몸을 일으켜 세웠다.
여전히 다리가 후들거리는 게 보였지만, 눈빛엔 방금 전과 다른 무언가가 생긴 것 같았다.
"저... 아저씨 곁에 있고 싶어요. 어디든."
"어디든은 좀 무섭게 들리는데."
내가 중얼거렸다.
"스토커도 아니고."
김도윤은 그 말에 살짝 웃었다.
방금 전까지 죽음의 문턱에서 벌벌 떨던 애가 웃는 걸 보니,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이 시큰거렸다.
아니, 시큰거리는 건 아니고 그냥 배가 고파서 그런 거다. 아마도.
그 순간, 신전 안쪽 문이 다시 열렸다.
방금 사라졌던 신관이 돌아왔는데, 이번엔 혼자가 아니었다.
뒤로 화려한 로브를 걸친 사내와, 그 옆에 금발의 여성이 함께 걸어오고 있었다.
발소리부터 달랐다.
또각, 또각, 또각.
신전 바닥을 때리는 그 소리에 학생들이 일제히 숨을 죽였다.
저 두 사람이 걸어오는 순간, 신전 안 공기 자체가 바뀌었다고 해야 하나.
마치 사무실에 대표이사가 순찰 도는 느낌이랄까. 다들 허리를 곧게 펴고 모니터 화면 얼른 바꾸는 그 타이밍.
"국왕 폐하께서 오셨습니다."
신관이 다급하게 소리쳤다.
국왕이라는 단어에 신전 전체가 순간 긴장으로 얼어붙었다.
중년의 남자, 윤헌이라 불린 그는 걸음걸이부터 위압감이 넘쳤다.
곁의 금발 여성—공주 하린은 나와 학생들을 훑어보는 시선이 마치 가축 시장에서 물건을 고르는 것 같았다.
정확히는, 마트에서 유통기한 얼마 안 남은 반값 세일 코너를 훑는 눈빛이었다. 이거 살까 말까, 그런.
"저것이 그... 소환되지 않은 자인가."
윤헌이 나를 가리키며 물었다.
목소리에 짜증이 배어 있었다.
신관이 서둘러 고개를 조아렸다.
"그렇습니다, 폐하. 병사 열두 명을 순식간에... 소멸시켰습니다."
윤헌의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국왕 입장에서 나는 갑자기 등장한 통제 불가능한 무기였다.
무기가 자기 편이면 좋지만, 편이 아니면 반드시 없애야 하는.
"제어 불가능한 존재는 왕국에 위협이다."
윤헌이 낮게 중얼거렸다.
"당장 저 자를 봉인하라."
[사무엘상 15:23, 왕이 여호와의 말씀을 버렸으므로 여호와께서도 왕을 버려 왕이 되지 못하게 하셨나이다]
국왕님, 지금 그 여호와 자리에 제가 서 있는 것 같은데요.
근데 저는 딱히 왕 자리 뺏을 생각 없거든요. 그냥 조용히 살고 싶은 아저씨입니다.
병사들 몇이 다시 창을 들고 다가왔다.
방금 열두 명이 눈앞에서 터져 죽는 걸 본 놈들인데, 그래도 명령엔 복종하는 게 군인의 본분인 모양이었다.
저 사람들 표정을 보니 딱 알겠다. 가고 싶지 않은데 상사가 시켜서 가는 표정.
회사 다니는 사람이면 다 아는 그 표정.
손끝이 다시 저릿해졌다.
이번엔 정말로 열둘로 안 끝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아까 그 힘이 다시 목구멍 안쪽에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쓰기 싫은데, 안 쓰면 여기서 진짜 봉인당하고 끝나겠지.
그 순간, 뒤쪽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들렸다.
"아버지, 잠깐만요."
금빛 머리와 붉은 눈을 가진 청년이 걸어나왔다.
왕태자 이안이었다.
그는 국왕 앞을 막아서듯이 걸어와, 나와 병사들 사이에 섰다.
등장부터 뭔가 있어 보이는 놈이었다.
드라마에서 이런 타이밍에 나오는 캐릭터는 대개 둘 중 하나다.
진짜 구세주거나, 아니면 나중에 뒤통수치는 놈.
지금은 일단 전자로 보이니까 감사히 받아들이기로 했다.
"저 자를 지금 이 자리에서 처리하는 건 위험합니다."
이안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그 안에 확고한 무언가가 있었다.
"제 생각엔, 저 자의 능력을 확인할 시간이 필요합니다."
윤헌이 아들을 노려봤다.
"확인할 시간? 이미 병사 열둘을 죽였다. 그게 확인이지, 이안."
"그러니까 더 필요합니다."
이안이 물러서지 않았다.
"성급하게 처리하려다 우리 쪽이 더 큰 피해를 입을 수도 있습니다."
하린이 그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안 오라버니, 지금 저 짐승 편을 드는 거예요?"
목소리에 노골적인 혐오가 담겨 있었다.
"소환된 자들도 관리해야 할 자원인데, 소환도 안 된 저 잡것을 왜 감싸주려는 거죠."
짐승, 잡것.
말 한마디씩이 참 다정하다.
이 공주님은 사람 부르는 호칭 사전에 욕만 잔뜩 채워놓은 모양이었다.
이안은 하린을 향해 살짝 고개를 저었다.
"판단은 아버지께서 하실 몫이지만, 지금은 신중해야 할 때다."
하린은 입술을 깨물더니 나를 한 번 더 노려봤다.
그 눈빛이 꼭 "너 두고 보자"는 만화 클리셰 대사를 시전하는 악역 같아서, 나는 하마터면 웃음이 튀어나올 뻔했다.
지금 이 상황에 웃으면 그대로 소각 확정이니까 간신히 참았다.
윤헌은 잠시 고민하는 표정을 지었다.
방금까지 확고했던 명령이, 아들의 개입으로 흔들리는 게 보였다.
침묵이 길게 이어졌다.
신전 안의 모든 시선이 국왕의 입술로 모였다.
학생들도, 신관들도, 병사들도, 다들 숨소리조차 조심스러웠다.
나 역시 손끝의 저릿함을 애써 누르며 그 입이 무슨 말을 내뱉을지 기다렸다.
"...좋다."
윤헌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당분간 격리 상태로 관찰한다. 단, 조금이라도 이상 행동을 보이면 즉시 소각이다."
소각이라는 단어가 다시 나왔다.
인간을 태워 없앤다는 말을 저렇게 사무적으로 하는 게, 이 왕국의 본질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꼭 회사에서 "성과 미달 시 계약 해지"라고 통보하는 그 느낌이랄까.
근데 여기선 계약 해지가 진짜 불태워 죽이는 거라는 게 문제지.
학생들이 안도의 숨을 내쉬는 게 느껴졌다.
이건우와 박서연도 서로를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가는 안도의 한숨을 너무 크게 내쉬어서 신관한테 눈총을 받기도 했다.
나는 그 광경을 지켜보며 속으로 생각했다.
격리, 관찰, 소각.
이 왕국은 처음부터 사람을 자원과 위협, 두 가지 범주로만 나누고 있었다.
소환된 학생들도 결국 '고용할 수 있는 자원'일 뿐이고, 나는 '제거해야 할 위협'일 뿐이었다.
인사팀 면접관이 지원자 서류 훑는 표정으로 사람 목숨을 판단하는 곳.
살아남으려면 스펙을 잘 관리해야 하는 건데, 내 스펙은 하필 "제어 불가능"이라 적혀 있는 모양이었다.
이수아와 김도윤이 조심스레 내 옆으로 다가왔다.
"아저씨 곁에 있을게요."
이수아가 작게 말했다.
김도윤도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그 두 아이의 눈빛을 보며, 이상하게도 오늘 죽으려던 스위치를 눌렀던 그 순간보다 지금이 더 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침까지만 해도 인생 마감 각오하고 옥상 올라간 놈이, 이세계 와서 애들 목숨 걱정하고 있다니.
운명의 장난인지 신의 농담인지, 아무튼 뭔가 어이없는 상황이었다.
신전 안쪽 어둠 속에서, 신관 하나가 조용히 국왕에게 다가가 무언가를 속삭이는 게 보였다.
윤헌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입가에 걸린 웃음이 방금 전 그 짜증스러운 표정과는 결이 다른, 뭔가 계산이 선 얼굴이었다.
저건 또 무슨 그림인가.
"관찰"이라는 단어 뒤에 뭔가 다른 각본이 숨어 있는 게 분명했다.
방금 이안이 막은 그 처분이, 다른 방식으로 다시 준비되고 있는 것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신관이 속삭임을 마치고 물러나자, 윤헌은 나를 향해 다시 시선을 돌렸다.
그 눈빛에 순간, 아까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흥미가 스치는 게 보였다.
사냥감을 놓친 게 아니라, 그저 잡을 방법을 바꾼 자의 눈빛이었다.
나는 그 눈빛을 마주 보며 손끝을 다시 꽉 움켜쥐었다.
격리와 관찰이라는 이름 뒤에서, 대체 무슨 그림이 그려지고 있는 건지.
알 수 없었지만, 확실한 건 하나였다.
이 왕국에서 조용히 살고 싶다는 내 소박한 바람은, 오늘도 또 물 건너간 것 같다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