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백색 대리석 바닥에 반사된 조명이 눈을 찌를 만큼 밝았다. 본부 3층 회의실, 벽면을 가득 채운 강철 설계도 위로 푸른 마력 문양이 잔잔하게 흐르고 있었는데, 그 위에 그려진 것은 국가 주도 신형 비행선 '창공호'의 골격이었다. 격벽 곳곳에 새겨진 마력 회로는 마치 혈관처럼 얽혀 있었고, 그 사이사이로 은은한 청색 광채가 맥동하듯 점멸했다. 나, 진서준은 그 도면 앞에 앉아 손끝으로 문양의 흐름을 짚어가며 연산 오차를 잡아내고 있었고, 이 순간만큼은 세상 그 무엇보다 이 일이 편안하게 느껴졌다. 종이 위로 흩어진 계산식 사이에서 나는 오차 범위 0.3퍼센트짜리 균열을 발견했는데, 그 정도면 실전 비행에서는 별문제 없겠지만 성격상 그냥 넘길 수가 없었다.
전생에서도 나는 이런 자리에 앉아 있었다. 야근에 찌든 회사원으로 살다가 죽은 기억이 선명한데, 이상하게도 이 세계에서마저 나는 서류와 도면과 마력 회로에 파묻혀 사는 팔자를 못 벗어나는구나 싶었다. 커피 대신 마력수를 마시고, 야근 수당 대신 명예 훈장을 받는다는 점만 다를 뿐, 본질은 똑같았다. '어느 쪽 인생이든 결국 일밖에 없나.' 나는 그렇게 자조하며 펜을 굴렸다. 손목이 살짝 뻐근한 걸 느끼며 기지개를 켜려던 참이었다.
"진서준 연금술사님." 문이 열리고 들어온 것은 프로젝트 행정관이었는데, 그자의 목소리는 서류를 읽는 듯 딱딱하고 사무적이었다. 발소리마저 규칙적으로 딱딱 끊어지는 게, 마치 걸음걸이까지 행정 절차에 맞춰 재단된 사람 같았다. "창공호 제작 3팀 배정에서 제외되셨습니다." 나는 펜을 멈췄다. 잘못 들었나 싶어 되물었다. "방금 뭐라고 했나? 내가 이 프로젝트의 핵심 회로를 설계한 사람인데, 제외라니 그게 무슨 소리인가?" 목소리는 여유롭게 흘렸지만 손끝의 펜은 이미 바닥에 떨어져 있었다. 행정관은 눈도 깜빡이지 않고 종이를 내밀었다. "상부 결정입니다. 이유는 문서에 명시되어 있지 않습니다."
나는 서류를 받아 훑었는데, 결정권자 서명란에 낯익은 이름이 적혀 있었다. 황태준. 귀족 가문의 차남이자 국가 마술사 5급, 실력으로는 나보다 두어 단계는 아래인 자였다. 서명이 유독 크고 각져 있는 게, 마치 자기 존재를 각인시키고 싶어 죽어라 힘을 준 흔적 같았다. '이 자식이 드디어 이런 식으로 나오는군.' 나는 속으로 웃음이 나왔는데, 어이가 없어서 나오는 웃음이었다.
황태준과는 이전에도 몇 번 부딪혔다. 그가 제출한 마법식이 조잡하다고 회의 석상에서 지적한 적이 있었는데, 그날 그의 얼굴이 붉어지던 것을 아직도 기억한다. 마력 소모 계산이 어긋나 있어서, 실전에 투입하면 최소 세 번은 회로가 과열될 설계였다. 나는 그걸 지적하며 종이 위에 붉은 펜으로 오차 범위를 표시해주었는데, 그때는 그게 친절이라고 생각했다. 회의실에 있던 다른 연금술사들이 슬쩍 웃음을 참던 것도 기억난다. 그때는 그저 실력으로 짓눌러놓으면 끝이라고 생각했다. 그게 얼마나 값싼 생각이었는지는, 지금 이 순간에서야 서서히 감이 오기 시작했다.
"근거 없이 사람을 빼는 게 상부 결정이라는 겁니까?" 나는 여전히 여유로운 어조로 되물었지만, 손끝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심장이 이상하게 빠르게 뛰는 게 느껴졌는데, 그게 분노인지 아니면 다른 감정인지 스스로도 명확히 구분이 안 됐다. 관자놀이 쪽으로 식은땀이 한 줄 흘러내리는 걸 느끼며, 나는 애써 표정을 무너뜨리지 않으려 애썼다. 행정관은 짧게 답했다. "저는 전달자일 뿐입니다. 이의가 있으시면 본부장실로 문의하십시오." "본부장실에 문의하면 답이 나올 거라고 진짜 믿나?" "저는 절차를 안내하는 역할입니다. 판단은 연금술사님의 몫입니다." 대화가 오갈수록 나는 이 사람에게서 더 이상 뽑아낼 정보가 없다는 걸 깨달았다. 마치 벽에다 질문을 던지는 기분이었다.
나는 서류를 접어 품에 넣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의자가 뒤로 밀리며 대리석 바닥을 긁는 소리가 유독 크게 울렸다. 창밖으로 보이는 본부 청사의 첨탑들이 오늘따라 유난히 높아 보였는데, 그 첨탑 꼭대기에 걸린 국가 문양이 반짝이는 걸 보면서 나는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두 번째 인생인데도 뒤통수를 맞는 방식이 똑같다니, 이거 참 재능이라고 해야 하나.' 회의실 문을 나서기 전, 도면 위에 흐르던 푸른 문양을 한 번 더 눈에 담았다. 내가 손댄 부분이었다. 이걸 두고 나가야 한다는 사실이 생각보다 속을 긁었다.
복도를 걸으며 애써 침착함을 유지했다. 전생에서도 나는 이런 식으로 밀려났다. 부서장 눈 밖에 나서, 혹은 누군가의 정치질에 밀려서. 그때마다 나는 실력으로 극복하면 된다고 믿었고, 그 결과 인간관계는 전부 갈아치우듯 소비하고 버렸다. 이직할 때마다 인사팀 담당자가 나를 보던 그 애매한 눈빛이 떠올랐다. 실력은 인정하지만 곁에 두긴 부담스럽다는 눈빛. 그리고 지금, 회귀도 아니고 전생도 아닌 이 새로운 삶에서도 똑같은 방식으로 밀려나고 있다는 사실이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다는 것 자체가 소름 끼치는 일이었다.
복도 끝, 자료 열람실에서 나온 동료 연금술사 하나가 나를 보고 흠칫 몸을 굳혔는데, 그 반응이 낯설지 않았다. 사람들은 늘 나를 보면 저런 표정을 지었다. 마치 활활 타오르는 화로를 지나가는 사람처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 고개를 슬쩍 돌리고 걸음을 재촉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하며 그 옆을 스쳐 지나갔고, 속으로는 이렇게 생각했다. '뭐, 실력으로 밀어붙이면 결국 다시 불러들이겠지.' 그 순간까지도 나는 이 사태의 진짜 규모를 짐작조차 못 하고 있었다.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창밖으로 본부 마당에 세워진 시험용 골렘 잔해가 눈에 들어왔다. 지난주 실험에서 회로 과부하로 부서진 잔해였는데, 아직 치우지 않은 걸 보면 예산 문제인지 인력 문제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그 잔해를 보며 잠깐 딴생각에 빠졌다. '저것도 결국 누군가의 실책이었을 텐데, 그 실책은 누구 서명으로 덮였을까.' 지금 내 처지와 겹쳐 보여서 실없이 웃음이 나왔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마차 창문에 비친 내 얼굴을 보며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스물두 살, 국가 공인 연금술사 3급이자 마술사 5급이라는 직함이 이 나이에 흔한 것은 아니었다. 전생의 지식과 이번 생의 재능이 겹쳐지면서 나는 늘 남들보다 반보 앞서 있었고, 그 우위가 당연하다고 여겼다. 마차 바퀴가 자갈길을 지날 때마다 몸이 흔들렸고, 그 흔들림에 맞춰 생각도 이리저리 흔들렸다. 하지만 반보 앞서 있다는 감각은, 뒤집어 보면 그만큼 남들과 거리를 두고 있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 사실을 그때는 전혀 자각하지 못했다. 창밖으로 지나가는 가로등 불빛이 규칙적으로 얼굴 위를 스치고 지나갔는데, 그 리듬이 묘하게 심장 박동과 어긋나서 신경이 쓰였다.
마차가 숙소 앞에 멈추자, 문지기가 다급한 얼굴로 내게 달려왔다. 그 얼굴에 식은땀이 흥건한 걸 보고 나는 순간적으로 불길한 예감을 느낌과 동시에, 애써 그 예감을 밀어냈다. "진서준 연금술사님, 본부에서 급히 전달 사항이 있다고 합니다." 나는 마차에서 내리며 눈살을 찌푸렸다. "급하다니, 오늘 벌써 몇 번째인지 세는 것도 지겨운데." 문지기는 대답 대신 봉투 하나를 건넸고, 그 손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나는 그 떨림을 보고서야 뭔가 심상치 않다는 걸 직감했다.
오늘 하루 만에 벌써 몇 번째 통보인지 헤아려보기도 전에, 나는 문지기가 건넨 봉투를 열어보았다. 봉투를 뜯는 손끝이 종이에 살짝 베였는데, 그 얕은 통증조차 지금 이 순간엔 별 감흥이 없었다. 그 안에는 짧은 문장 하나가 적혀 있었다. '창공호 외 12개 프로젝트 팀에서 배정 취소.' 나는 그 문장을 두 번 읽었다. 처음엔 숫자를 잘못 봤나 싶어서, 두 번째는 확인 사살하듯 다시.
열두 개. 한 시간 전만 해도 나는 단 하나의 팀에서 빠졌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제는 열두 개라고 적혀 있었다. 등줄기를 따라 서늘한 감각이 훑고 지나갔는데, 그건 단순한 분노가 아니라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본능적인 경고였다. 손에 든 종이가 가로등 불빛 아래서 미세하게 흔들렸는데, 그건 바람 때문이 아니라 내 손이 떨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거 생각보다 크게 벌어지고 있는데.' 나는 숨을 한 번 삼키고, 다음 봉투가 도착하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는 예감에 사로잡혔다. 문지기의 얼굴을 다시 보니, 그는 이미 다음 소식을 기다리는 듯한 표정으로 본부 쪽 하늘을 힐끔거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