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늦은 밤, 창문 틈으로 스며드는 바람에 촛불이 흔들리던 순간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낮과는 다른, 조심스럽지만 리듬이 일정한 노크였다. 나는 짐을 정리하던 손을 멈추고 문을 향해 다가갔다. 이 시간에 찾아올 사람이 누가 있을까. 채권자거나, 아니면 또 다른 귀족이 나를 이용하려고 보낸 사람이겠지. 이런저런 예상을 하며 문을 열었을 때, 나는 잠시 숨을 고를 수밖에 없었다.
문 앞에 서 있던 것은 젊은 여성이었다. 은은한 하늘색 로브를 걸치고, 어깨까지 내려오는 갈색 머리를 단정하게 묶은 그녀는 두 손으로 작은 상자를 하나 안고 있었다. 로브 끝자락에는 마법학교 특유의 문양이 은실로 수놓여 있었는데, 그것만 봐도 학교 관계자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표정은 침착했고, 자세는 흐트러짐이 없었다. 누군가를 오래 기다린 사람 특유의 단정함이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늦은 시간에 죄송합니다." 그녀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목소리는 낮고 또렷했으며, 격식을 갖춘 존댓말 속에 묘한 익숙함이 배어 있었다. 나는 그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도무지 누구인지 떠오르지 않았다. '선배님이라니, 이 사람이 나를 아는 건가.' 머릿속으로 최근 만난 사람들의 얼굴을 빠르게 훑었지만, 그녀와 일치하는 기억은 하나도 걸리지 않았다. 나는 애써 능글맞게 웃으며 대답했다. "밤늦게 미인이 찾아오다니, 이거 영광인데. 그런데 누구신가?"
그녀의 표정이 순간 살짝 굳었다가, 이내 다시 부드럽게 풀렸다. 그 변화가 너무 짧아서, 어쩌면 내가 잘못 본 것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 짧은 순간에 담긴 감정이 무엇인지는, 굳이 설명을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선우아영입니다. 마법학교 시절 선배님의 3년 후배였어요. 연금술 개론 수업 조교로 두 학기 동안 도와드렸는데… 기억 안 나시나요?" 나는 머릿속을 뒤졌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조교라는 자리는 늘 있었고, 얼굴들은 늘 흐릿했다. 실습 재료를 챙겨주고, 과제 마감을 알려주고, 가끔은 내가 놓친 이론을 옆에서 짚어주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 사람이 두 학기나 있었다는데도, 내 기억 어디에도 그녀의 자리는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을 미뤘는데, 그 침묵 자체가 이미 답이 되어버렸다.
"괜찮아요." 선우아영이 먼저 그 침묵을 깨며 말했다. 그녀의 목소리에는 서운함보다는 익숙함이 배어 있었는데, 그게 오히려 나를 더 불편하게 했다. 서운해했다면 차라리 마음이 편했을 것이다. 서운함은 사과로 해결할 수 있으니까. 그러나 익숙함은, 이미 몇 번이나 반복되어 무뎌진 감정이라는 뜻이었다. "선배님은 늘 그러셨으니까요. 저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그럴 거예요." 나는 그 말에 뭐라 반박하려 했지만, 적당한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반박하려면 근거가 있어야 하는데, 나에게는 그녀를 기억한다는 근거가 전혀 없었다.
그녀는 안고 있던 상자를 내밀며 말을 이었다. "청하리 근처에 저희 가문에서 운영하는 여관이 있어요. 이거 숙소 이용권이니 도착하시면 쓰세요. 지방이라 편의시설이 부족할 텐데, 그나마 도움이 될 거예요." 상자는 손바닥 두 개를 겹친 정도의 크기였고, 표면에는 마감이 매끄러운 목재의 결이 은은하게 드러나 있었다. 뚜껑에는 작은 잠금 문양이 새겨져 있었는데, 아마 그녀의 가문을 나타내는 표식일 것이다.
나는 상자를 받아 들며 목이 메는 감각을 느꼈다. 이 사람은 나를 기억하고, 심지어 두 학기 동안 나를 도왔다는데, 나는 그녀의 이름조차 처음 듣는 것 같았다. 상자의 무게는 실제로는 가벼웠을 텐데, 손끝에 닿는 순간 이상하게 묵직하게 느껴졌다. '내가 정말 이렇게까지 사람을 지워가며 살았나.' 그 생각이 처음으로 실감으로 다가왔다.
전생에서도 나는 도움을 준 사람들의 얼굴을 금세 잊었다. 승진에 필요한 인맥만 기억하고, 그 외의 사람들은 필요가 사라지는 순간 머릿속에서 지워버렸다. 회의실에서 몇 번이고 마주쳤던 동료, 프로젝트를 함께 밤새 마무리했던 후배, 심지어 내 첫 발표를 도와줬던 사수까지도, 시간이 지나면 이름이 흐려지고 얼굴이 뭉개졌다. 나는 그것을 효율이라고 불렀다. 필요 없는 정보는 버리는 것이 당연하다고, 그렇게 스스로를 정당화했다. 그리고 지금, 두 번째 삶에서도 똑같은 방식으로 살아왔다는 사실이 명확한 증거를 가지고 눈앞에 서 있었다.
"고맙네." 나는 겨우 그 한마디를 짜냈다. 평소 같으면 훨씬 능청스러운 말을 붙였을 텐데, 이번에는 그럴 여유가 나지 않았다. 머릿속이 이상하게 조용해져서, 평소처럼 상황을 비틀어 웃음으로 넘길 여력조차 남지 않았다. 선우아영은 옅게 웃으며 몸을 돌렸다. 그 웃음은 화가 난 사람의 것도, 서운한 사람의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이미 오래전에 정리해둔 마음을 다시 확인한 사람의 웃음이었다. "청하리도 나쁘지 않은 곳이에요. 거기서 좋은 인연 많이 만드시길 바랄게요." 그녀가 계단을 내려가는 발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동안, 나는 문 앞에 선 채로 한동안 움직이지 못했다. 손에 든 상자의 무게가 실제보다 훨씬 무겁게 느껴졌다.
계단 아래로 사라지는 그녀의 로브 자락을 끝까지 눈으로 좇으면서, 나는 그녀가 두 학기 동안 내 곁에서 무엇을 했을지 상상해보려 했다. 실습실 한쪽 구석에서 조용히 재료를 정리하고, 내가 실수로 태워버린 마법진을 다시 그려주고, 시험 전날 노트를 빌려주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나는 그 얼굴 하나조차 남겨두지 않았다. 사람을 지운다는 것이 이렇게 손쉬운 일이었나, 하는 생각이 뒤늦게 목덜미를 스치고 지나갔다.
방으로 돌아온 나는 상자를 책상에 내려놓고, 짐 정리하던 손길을 멈춘 채 소파에 앉아 있는 나비를 바라보았다. 나비는 소파 팔걸이 위에 몸을 늘어뜨린 채 반쯤 감긴 눈으로 나를 지켜보고 있었는데, 그 눈빛이 평소보다 훨씬 날카롭게 느껴졌다. "봤지." 나비가 조용히 말했다. "저 사람은 널 두 학기나 도와줬는데, 넌 이름조차 기억 못 했잖아. 이게 한 번뿐인 일 같아?"
나는 대답하지 못했다. 대답할 말이 있었다면 진작 했을 것이다. 머릿속에서 두 번의 인생이 겹쳐지면서 하나의 패턴이 선명하게 그려지고 있었다. 전생에서 나는 실력으로 승진했지만 결국 조직에서 밀려났고, 그 원인을 늘 상사나 동료의 정치질이라고 여겼다. 야근을 도맡아 하고, 성과를 냈는데도 승진에서 밀리면 그것이 부당하다고만 생각했다. 이번 생에서도 나는 실력으로 이 자리까지 올라왔지만, 결국 108개 팀에서 배제당했고, 그 원인을 황태준의 음모라고만 생각하려 했다. 그가 뒤에서 손을 썼을 거라고, 누군가 나를 밀어냈을 거라고 확신하며 스스로를 피해자 자리에 세워두었다.
그러나 두 번 모두, 근본적인 원인은 하나였다. 나 자신이 사람을 곁에 두는 법을 몰랐다는 것. 실력만 있으면 충분하다고 믿었고, 사람들과의 관계는 필요할 때 꺼내 쓰는 도구쯤으로 취급했다. 그 결과 내 곁에는 늘 사람이 있었지만, 정작 진짜로 남아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황태준을 탓하기 전에, 108개 팀의 누구도 나를 위해 나서지 않았다는 사실부터 돌아봐야 했던 것이다.
그 자각은 생각보다 훨씬 무겁게 가슴을 눌러왔다. 나는 상자 속 이용권을 손끝으로 만지며 낮게 중얼거렸다. "청하리라니, 이거 생각보다 훨씬 골치 아픈 곳이 될 것 같은데." 단순히 지방이라 불편하다는 뜻이 아니었다. 그곳에서는 실력만으로 버틸 수 없을 것 같다는 예감이, 이유도 명확하지 않은 채로 스멀스멀 올라오고 있었다.
나비가 내 무릎 위로 올라와 몸을 웅크리며 대답했다. "그럴 거야. 근데 이번엔 도망칠 곳도 없어. 거기서 정면으로 부딪혀야 할 거야." 그 목소리에는 평소의 장난기가 빠져 있었다. 나비마저 이렇게 진지해지는 걸 보면, 정말로 가벼운 문제가 아닌 모양이었다.
창밖으로 밤이 짙게 깔리고 있었고, 상자 위에 놓인 이용권의 표면이 촛불 빛을 받아 희미하게 반짝였다. 나는 내일 아침이면 이 도시를 떠나야 한다는 사실을 실감하며, 처음으로 앞으로의 삶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시험받을 것임을 예감했다. 실력을 증명하는 것으로는 부족한, 사람을 남기는 법을 배워야 하는 시험이었다. 그리고 그 시험의 첫 번째 문제는, 이미 문 앞에서 나를 스쳐 지나갔다는 것을, 나는 뒤늦게야 깨닫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