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고양이가 내 성격을 지적했다

3화

본부장실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정갈했다. 문을 열자마자 코끝에 스치는 것은 오래된 종이 냄새와 옅은 마력석 특유의 서늘한 향이었다. 짙은 갈색 목재 책상, 그 위에 각이 딱 맞게 쌓인 서류들, 벽면을 가득 채운 마법서 서가까지 모든 것이 익숙한 풍경이었지만, 오늘만큼은 그 풍경이 낯설게 느껴졌다. 책상 위에 놓인 마력 램프의 불빛이 평소보다 유난히 창백해 보였고, 창밖으로 스며드는 오후의 햇살조차 이 방 안에서는 온도를 잃은 채 부유하는 듯했다. 강혜란은 책상 뒤에 앉은 채 나를 향해 손짓했다. "앉게." 짧고 건조한 말투였다. 평소라면 그 뒤에 형식적인 안부 한 마디쯤은 따라붙었을 텐데, 오늘은 그마저도 생략되었다. 나는 그 침묵의 무게를 애써 무시하며 의자에 앉았다. 가죽 의자가 삐걱, 낮은 소리를 냈고 나는 그 소리에 맞춰 다리를 꼬며 능청스럽게 웃어 보였다. "본부장님, 요즘 제가 팀 배정에서 좀 인기가 많아서 곤란한 지경입니다. 108개 팀에서 저를 빼려고 다들 이렇게 뜻을 모으다니, 이거 저를 너무 아끼시는 거 아닙니까?" 나는 그렇게 농담을 던졌다. 원래대로였다면 이쯤 대사 하나로 방 안의 분위기가 조금은 풀렸을 텐데, 강혜란은 눈썹 하나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서류를 내 앞으로 밀어 놓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종이가 책상 표면을 스치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청하리." 그녀가 짧게 말했다. 나는 그 지명을 어디서 들어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해서, 잠시 기억을 더듬었다. 어느 자료에서 스치듯 본 이름이었나, 아니면 그냥 흔한 지명이라 익숙하게 느껴지는 건가. "지방 소도시 인근의 시골 마을이야. 그곳 지부로 발령 낸다." 나는 그 말을 듣고도 처음에는 이해가 되지 않아 서류를 집어 들었다. 발령 통지서였다. 국가 공인 연금술사 3급 진서준, 청하리 지부 배속. 기한 미정. 글자 하나하나가 낱개로 흩어져 눈에 들어왔다가, 다시 하나의 문장으로 조립되어 머릿속에 박혔다. 나는 서류를 두 번, 세 번 읽었지만 문장은 바뀌지 않았다. 종이 위의 잉크는 인정사정없이 그 자리에 그대로 박혀 있었다. "본부장님, 지금 저를 시골로 보내신다는 겁니까? 108개 팀에서 배제당한 걸로도 충분히 억울한데, 이제는 아예 본부에서 쫓아내겠다는 말씀이십니까?" 나는 애써 여유를 유지하려 했지만, 목소리 끝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을 스스로도 느꼈다. 손끝으로 서류의 모서리를 무의식적으로 매만지고 있었는데, 그 종이가 유독 뻣뻣하게 느껴졌다. 이럴 때 보면 종이는 참 잔인하다. 사람의 인생을 몇 줄로 요약해버리고도 아무 죄책감이 없으니. 강혜란은 여전히 담담한 어조로 대답했다. "쫓아내는 게 아니다. 살리려는 거야." 나는 그 말의 의미를 되묻지 않을 수 없었다. "살리다니, 그게 무슨 뜻입니까." 그녀는 서류철을 하나 더 꺼내 내 앞에 펼쳤다. 서류철이 펼쳐지는 소리가 마치 재판정에서 판결문이 열리는 소리처럼 무겁게 들렸다. 그 안에는 최근 반년간 내가 관여한 모든 프로젝트에서 동료들이 제출한 익명 평가서가 정리되어 있었다. 나는 그 내용을 눈으로 훑으며 얼굴이 굳는 것을 느꼈다. '동료들과의 협업 불가.' '독단적 의사결정.' '팀원을 도구로 취급하는 태도.' 같은 문구들이 반복적으로 적혀 있었다. 필체는 제각각이었지만 내용은 신기하게도 하나같이 비슷한 결을 가지고 있었다. 이쯤 정도로 다양한 사람들이 똑같은 결론에 도달했다는 사실이, 오히려 그 신뢰성을 높이는 것 같아 더 기분이 나빴다. 나는 종이를 넘기며 익명이라는 글자 뒤에 숨겨진 얼굴들을 하나씩 떠올려보려 했다. 지난 회로 설계 프로젝트에서 내가 밤새 계산한 결과를 무시하고 자기 방식대로 밀어붙이던 그 팀원인가. 아니면 마력 배분 오류를 내가 지적했을 때 얼굴이 붉어지며 아무 말도 못 하던 그 신입인가. 누구인지 특정할 수는 없었지만, 이상하게도 짚이는 얼굴이 하나둘이 아니라는 사실이 스스로도 놀라웠다. "자네 실력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강혜란이 말을 이었다. "연산 능력, 마력 운용, 회로 설계까지 지금 세대에서 자네를 따라올 사람은 손에 꼽아. 하지만 실력만으로 유지되는 조직은 없다. 황태준이 자네를 걷어내려는 시도는 사실 오래전부터 있었고, 이번에 성공한 이유는 간단해. 자네를 지지해줄 동료가 단 한 명도 나서지 않았기 때문이야." 나는 그 말에 반박하려 했지만, 입이 열리지 않았다. 속으로는 이렇게 되뇌었다. 동료라니, 내가 언제 그런 게 필요했나. 지난 몇 년간 나는 늘 결과로 말했다. 계산이 틀리면 틀린 거고, 회로가 맞으면 맞는 거다. 거기에 누구의 기분이나 인정 같은 변수를 끼워 넣을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그 반문 자체가 이미 스스로를 속이는 것임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왜냐하면 지금 이 순간, 108개 팀 중 단 한 곳에서도 내 이름을 지켜주지 않았다는 사실이 이렇게까지 아프게 다가올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본부장님." 나는 목소리를 가라앉히며 다시 물었다. "그 평가서, 다 익명입니까? 실명으로 제출한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습니까?" "없었다." 강혜란은 짧게 답했다. "그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자네가 더 잘 알겠지." 나는 그 대답에 헛웃음이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았다. 익명으로라도 나를 비판할 용기는 있었지만, 실명으로 나를 옹호할 용기는 아무도 없었다는 뜻이었다. 그 차이가 참 냉정하게 느껴졌다. "청하리는 벌이 아니다." 강혜란이 목소리를 낮췄다. "거기서 자네가 살아가는 방식을 처음부터 다시 배워 오길 바란다. 언제까지고 실력만으로 밀어붙일 수는 없어. 서준아." 그녀가 내 이름을 부른 것은 실로 오랜만이었는데, 그 순간 나는 이상하게도 목이 메는 감각을 느꼈다. 생각해보면 강혜란이 나를 '진 대리'나 '진서준 씨'가 아니라 그냥 '서준아' 하고 불렀던 적이 손에 꼽을 정도였다. 그 몇 번의 순간들이 하필 지금 이 자리에서 겹쳐 떠오른 것도 얄궂었다. 나는 애써 헛기침을 하며 그 감각을 눌러 담았다. "언제까지 가 있어야 합니까?" 나는 그렇게 물었지만, 강혜란은 명확한 답을 주지 않았다. "그건 자네가 얼마나 빨리 배우느냐에 달려 있어." 그 말에는 어떤 여지도, 협상의 틈도 없었다. 나는 잠시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평소와 다름없이 표정 하나 흔들리지 않는 얼굴이었지만, 그 눈빛 어딘가에는 평소에 보지 못했던 어떤 것이 스쳐 지나가는 것 같기도 했다. 걱정인지 안타까움인지, 아니면 단순한 업무적 피로감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나는 그걸 굳이 확인하려 들지 않았다. 확인해서 좋을 게 없을 것 같았으니까. "혹시." 나는 마지막으로 물었다. "이거, 황태준 쪽에서 완전히 밀어붙인 겁니까, 아니면 본부장님도 어느 정도는 필요하다고 판단하신 겁니까." 강혜란은 잠시 침묵했다. 그 침묵이 이상하게도 어떤 대답보다 더 무겁게 느껴졌다. "둘 다다." 그녀가 말했다. "그리고 그게 자네에게 더 나쁜 소식이라는 것도 알고 있다." 나는 서류를 손에 든 채 본부장실을 나섰다. 문을 닫는 순간 등 뒤에서 들려오던 종이 넘기는 소리가 뚝 끊겼고, 나는 복도에 홀로 남겨졌다. 복도의 조명이 유난히 차갑게 느껴졌고, 발걸음마다 구두 소리가 텅 빈 통로에 울려 퍼졌다. 벽면에 걸린 역대 본부장들의 초상화가 무심하게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는데, 그 표정들조차 오늘은 어딘가 냉소적으로 보였다. 실력만으로는 부족하다니, 이거 참 낯선 소리군. 나는 그렇게 중얼거리면서도, 마음 한구석에서 서서히 인정하기 싫은 사실 하나가 고개를 들고 있었다. 108개 팀 중 단 한 곳도 나를 위해 나서지 않았다는 것, 그것은 황태준의 압력이 강했다는 뜻이기도 했지만, 동시에 내가 그동안 아무도 곁에 두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 사실을 인정하는 순간, 나는 처음으로 무언가가 발밑에서 무너지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엘리베이터 앞에 서서 나는 발령 통지서를 다시 펼쳐 보았다. 청하리. 지도에서조차 검색해봐야 할 것 같은 이름이었다. 기한 미정이라는 문구가 유독 눈에 밟혔다. 그것은 다시 말해, 내가 이곳으로 돌아올 수 있을지 없을지조차 아무도 보장해주지 않는다는 뜻이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고, 안에서 나오는 익숙한 얼굴 하나가 나와 눈이 마주쳤다. 같은 층에서 근무하던 동료였는데, 그는 나를 보자마자 시선을 슬쩍 피하며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그 짧은 회피 하나가, 오늘 하루 동안 들었던 어떤 말보다도 더 선명하게 내 처지를 설명해주고 있었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