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선배, 제가 지킬게요

3화

며칠이 지났다. 계절이 바뀌는 것도 모를 만큼 시간이 무심하게 흘러갔다. 나겸은 여전히 조용히, 눈에 띄지 않게 학교를 다니고 있었다. 복도를 걸을 때마다 등 뒤로 따라붙는 시선들, 교실 문을 열 때마다 순간적으로 뚝 끊기는 대화들. 처음엔 그 모든 것이 살을 파고드는 듯 아팠지만, 이제는 그저 익숙한 배경음처럼 느껴졌다. 급식실 구석 자리, 아무도 앉지 않는 그 자리가 이제는 익숙해졌다. 창가 쪽 마지막 테이블. 형광등 불빛이 유난히 어둡게 떨어지는 곳이었다. 나겸은 그 자리에 앉을 때마다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여기가 편해. 아무도 신경 쓰지 않으니까.' 거짓말이었다. 하지만 그 거짓말이 지금은 유일한 방패였다. 그날 점심, 식판을 들고 자리에 앉으려던 나겸의 앞에 누군가 툭 하고 식판을 내려놓았다. 철컹. 식판이 테이블에 부딪히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나겸은 고개를 들었다. 윤소은이었다. 나겸은 눈을 들어 그녀를 봤다. 낯익은 얼굴이었다. 1학년, 밝은 갈색 머리, 사이드테일. 학교에서 꽤 유명한 후배였다. 성적도 좋고, 인기도 많고, 누구에게나 스스럼없이 다가가는 성격이라 소문이 자자했다. 그런 애가 왜 여기, 이 구석 자리에 있는지 나겸은 이해할 수 없었다. — 저... 여기 앉아도 돼요? 나겸은 대답 대신 눈썹을 찌푸렸다. — 여기 다른 자리도 많은데. 시선이 자연스럽게 급식실 전체를 훑었다. 늘 사람으로 가득 찬 테이블들, 웃음소리가 넘치는 자리들. 그리고 이 구석만이 텅 비어 있었다. — 그냥 여기가 좋아서요. 소은은 태연하게 식판의 반찬을 뒤적이며 앉았다. 마치 이 자리가 처음부터 자기 자리였던 것처럼, 아무런 망설임도 없었다. 나겸은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뭐지, 이 애.' 주변 시선이 곱지 않았다. 몇몇 학생들이 소은을 향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저기 봐, 쟤 왜 저기 앉아 있어. 미쳤나 봐. 나겸은 그 시선이 신경 쓰였다. 소은에게로 향하는 시선들이 마치 자신의 몸을 관통하는 것 같았다. — 나랑 있으면 너도 이상한 소문 돌아. 저리 가. 목소리가 낮고 단호했다. 경고였다. 소은은 젓가락을 멈추고 나겸을 똑바로 바라봤다. 아몬드형 눈이 흔들림 없이 그를 응시했다. 그 눈에는 두려움이라곤 조금도 담겨 있지 않았다. — 선배, 진짜 그런 짓 했어요? 직설적인 질문이었다. 급식실의 소음이 순간 멀어지는 듯했다. 나겸의 눈썹이 미세하게 움직였다. — ...아니. 짧은 대답이었다. 소은은 그 대답을 곱씹듯 잠시 침묵했다. 눈동자가 나겸의 얼굴을 천천히 훑었다. 표정 하나, 눈빛 하나까지 놓치지 않으려는 것처럼. — 근데 왜 아무 말도 안 해요? 왜 아니라고 큰 소리로 말 안 해요? 나겸의 입꼬리가 씁쓸하게 비틀렸다. — 말해봤어. 아무도 안 믿어. 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 그 안에 담긴 피로가 소은에게도 전해지는 듯했다. — 그럼 나한테 말해봐요. 나는 믿을지도 모르잖아요. 나겸은 소은을 바라봤다. 그 눈에는 흔들림이 없었다. 놀리는 것도, 동정하는 것도 아니었다. 그저 진짜로, 대답을 기다리는 눈이었다. 그런 눈을 마지막으로 본 게 언제였는지, 나겸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나겸은 잠시 말을 잃었다. '왜 이렇게까지...' 숨이 턱 막히는 느낌이었다. 며칠 동안 쌓여 있던 말들이 갑자기 목구멍 끝까지 차오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습관처럼, 그 말을 삼켰다. — 나한테 무슨 소용이야. — 소용 있어요. 저는... 진짜인지 아닌지가 궁금하니까요. 소은은 젓가락으로 반찬을 집으며 태연하게 덧붙였다. 마치 방금 한 말이 세상에서 제일 가벼운 말이라는 듯이. — 그리고 선배 눈 보면, 거짓말하는 사람 같지 않아서요. 나겸은 순간 말을 잃었다. 그동안 누구도 그의 눈을 그렇게 오래 들여다본 적이 없었다. 오히려 사람들은 눈을 마주치기를 꺼렸다. 마치 눈을 마주치면 오염될까 두려운 것처럼. 식판 위 밥알이 식어가는 것도 모른 채, 두 사람은 잠시 서로를 응시했다. 급식실의 소란스러움이 계속되고 있었지만, 그 테이블 위만큼은 이상하리만치 조용했다. — 나는... 그날 그 문자, 보낸 적 없어. 하수아나 이봄, 추가영한테 무슨 짓을 시킨 적도 없고. 말이 저절로 흘러나왔다. 며칠 만에 처음으로, 누군가에게 진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는 것을 나겸은 느꼈다. 이렇게 말을 뱉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두근거렸다. — 근데 그 문자, 진짜 있었대요? 선배 번호로? 나겸의 표정이 굳었다. — ...그건, 나도 모르겠어. 본 적이 없으니까. 목소리에 씁쓸함이 배어 나왔다. 자신의 이름으로, 자신의 번호로 나갔다는 그 문자를 나겸 스스로도 확인한 적이 없었다. 모두가 그것을 사실처럼 받아들였지만, 정작 그 실체를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소은의 눈이 반짝였다. 그 반짝임 속에 무언가가 움직이고 있었다. 나겸은 그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어딘가 불안하면서도 이상하게 안심되는 느낌이었다. 마치 오랫동안 닫혀 있던 문 틈으로 처음 바람이 들어오는 느낌이었다. — 그거 이상하지 않아요? 문자가 있었다는데, 아무도 그걸 직접 본 사람이 없다는 거. 소은이 턱을 살짝 기울이며 말했다.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 누가 그랬대, 그런 거. — 소문이 그랬어요. 근데 소문의 시작이 어딘지는 아무도 몰라요. 그냥 다들 그렇게 믿고 있는 거죠. 나겸은 그 말에 순간 멈칫했다. 그렇게 명확하게, 지금까지 아무도 짚어주지 않았던 부분을 소은이 짚어냈다. — 선배, 저 좀 도와줄 수 있어요? 그 문자 좀 확인해보고 싶어서요. 나겸이 눈을 크게 떴다. — 뭐?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커졌다. 심장이 이상한 박동으로 뛰기 시작했다. 이 아이가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무슨 짓을 벌이려는 건지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 위험한 짓이야. 너까지 휘말리면— — 알아요. 근데 저는 궁금한 걸 못 참는 성격이라서요. 소은이 젓가락을 내려놓으며 웃었다. 그 웃음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하지만 소은은 이미 자리에서 일어나며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은 마치 이미 결심을 끝낸 사람의 것이었다. 식판을 정리하는 손짓조차도 가벼웠고, 등을 돌려 걸어가는 뒷모습에는 망설임이 전혀 보이지 않았다. 나겸은 그 뒷모습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방금 나눈 대화가 실제로 있었던 일인지, 순간 헷갈릴 정도였다. '저 애, 대체 뭘 하려는 거야.' 식어버린 밥알을 내려다보며, 나겸은 오랜만에 심장이 요란하게 뛰는 것을 느꼈다. 두려움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 구분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멀어지는 소은의 사이드테일이 흔들리는 것을 보며, 나겸은 문득 불안한 예감에 사로잡혔다. 저 애가 파고들려는 곳이 어디인지, 그 끝에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아직은 아무도 알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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