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선배, 제가 지킬게요

5화

복도 끝, 창가. 오후의 햇살이 유리창을 통과해 바닥에 긴 그림자를 그리고 있었다. 강태식은 그 그림자 위에 걸터앉아 이어폰을 끼고 있었다. 금갈색 단발이 창틈으로 들어오는 바람에 흩날렸다. 고개를 까딱이는 리듬이 귀에 익은 노래인 듯했다. 그 옆에는 고윤재가 있었다. 안경을 슬쩍 고쳐 쓰며 문제집 위로 시선을 떨어뜨린 채였다. 펜 끝이 종이를 긋는 소리만이 규칙적으로 이어졌다. 사각. 사각. 조용한 복도에 유일하게 흐르는 소리였다. 소은은 잠시 그 자리에서 걸음을 멈췄다. '말을 걸어도 되는 분위기인가...' 두 사람 사이에는 묘한 거리감이 있었다. 하나는 세상 다 귀찮다는 얼굴로, 하나는 세상 모든 걸 계산하는 얼굴로. 소은은 숨을 한 번 삼키고 다시 발을 뗐다. 다가가는 발소리를 들었는지, 태식이 먼저 눈을 떴다. 이어폰을 뺐다. — 뭐야, 너. 목소리는 낮고 무심했지만 눈빛은 이미 소은을 위에서 아래로 훑고 있었다. 소은은 그 시선에 움츠러들지 않으려 애썼다. — 강태식 선배죠? 저 1학년 윤소은이에요. 류나겸 선배 일로 왔어요. 그 이름이 나오는 순간, 태식의 눈빛이 순식간에 날카로워졌다. 방금까지 늘어져 있던 몸이 한순간에 곧게 세워졌다. — 나겸이 일이라니, 무슨 뜻이야. 말투에서 경계심이 뚝뚝 떨어졌다. 옆에서 문제집을 풀던 윤재도 그제야 눈을 떴다. 안경 너머로 소은을 향한 시선이 천천히 올라왔다. 차분했지만, 그 차분함이 오히려 서늘했다. — 목적이 뭐지. 짧고 딱딱한 물음이었다. 감정이 실리지 않은, 그저 사실만을 묻는 듯한 어조. 소은은 순간 말이 막혔다. 태식이 옆에서 피식 웃으며 덧붙였다. — 쟤가 원래 좀 저래. 신경 쓰지 말고, 말 좀 풀어서 해봐, 재. 윤재는 반응 없이 다시 소은을 바라봤다. 대답을 기다리는 눈이었다. 소은은 숨을 크게 들이쉬었다. 심장이 빠르게 뛰고 있었다. 이 두 사람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 예측할 수 없었다. 자칫하면 여기서 문이 닫혀버릴 수도 있었다. 휴대폰을 꺼냈다. 화면을 켜고, 캡처해 둔 사진을 찾았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 이거 봐주세요. 제가 우기환 선배 컴퓨터에서 찾은 거예요. 화면을 내밀었다. 태식과 윤재가 동시에 고개를 숙여 그것을 들여다봤다. 정적이 흘렀다. 태식의 눈썹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표정이 굳어가는 게 눈에 보였다. 손끝이 화면 위를 스치듯 지나갔다. — 이 미친놈이... 진짜였어? 목소리에 분노가 실렸다. 태식은 이를 악물었다. 턱 근육이 팽팽하게 당겨졌다. 윤재는 아무 말 없이 화면을 좀 더 오래 들여다봤다. 눈동자가 좌우로 움직이며 사진 속 정보를 빠르게 읽어내고 있었다. 그러다 낮게 말했다. — 나겸이가 그런 짓 안 했다는 건 이미 알고 있었어. — 성격상 불가능하지. 걘 그런 애가 아니야. 단호한 어조였다. 확신에 차 있었다. 오랫동안 곁에서 봐온 사람만이 할 수 있는 판단이었다. 태식이 주먹을 꽉 쥐었다. 손가락 마디가 하얗게 변할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 — 그럼 그동안 나겸이가 그거 다 뒤집어쓰고 있었던 거네. 목소리가 낮게 떨렸다. 분노인지 미안함인지, 둘 다 섞인 감정이었다. 소은이 고개를 끄덕였다. — 저 이거 더 파보고 싶어요. 그런데 혼자서는 무리라서... 두 분이 도와주셨으면 해요. 말을 뱉어놓고 나니 손끝이 차가워졌다. 이렇게 대뜬 부탁이 과연 통할지, 확신이 서지 않았다. 태식과 윤재가 서로를 바라봤다. 눈빛만으로 무언가를 주고받는 듯했다. 잠시의 침묵이 흘렀다. 복도의 정적이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 왜 우리가 아니라 너부터 나섰는데. 윤재의 물음이었다. 날카로운 질문이었다. 소은은 잠시 머뭇거렸다. 뭐라고 답해야 이 사람을 설득할 수 있을지,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하지만 결국 나온 말은 가장 단순한 진심이었다. — ...선배 눈이, 거짓말하는 눈이 아니었어서요. 짧은 대답이었다. 그러나 그 안에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소은은 눈을 피하지 않았다. 태식이 피식 웃었다. 그 웃음에는 처음의 경계심이 조금 풀려 있었다. — 야, 재. 이 애 마음에 든다. 윤재는 별다른 반응 없이 안경을 다시 고쳐 썼다. 하지만 그 손짓이 조금 전보다 느슨했다. — 증거가 부족해. 캡처 한 장으로는 학교 측에서 인정 안 할 거다. 목격자를 찾아야 해. 현실적인 지적이었다. 소은도 이미 알고 있던 문제였다. 캡처 한 장으로는 아무것도 뒤집을 수 없다는 걸. — 그날 그 자리에 있던 애들 중에 우기환 편 안 든 애가 있을 거야. 다 겁먹어서 말 안 하는 거지. 태식이 어깨를 풀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관절이 우드득 소리를 냈다. 창가에 걸터앉아 있던 무기력한 자세는 이제 사라져 있었다. — 좋아, 해보자. 나겸이 그렇게 당하는 거 계속 볼 순 없었어. 윤재도 문제집을 접었다. 펜을 필통에 정리해 넣는 손짓이 평소보다 단호했다. — 조심스럽게 움직여야 해. 우기환이 눈치채면 증거를 없애버릴 거다. 소은은 고개를 끄덕였다. 세 사람의 눈빛이 그 순간 하나로 모였다. 방금까지 서로를 경계하던 눈빛이 아니었다.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작은 팀이 결성된 순간이었다. 태식이 손을 뻗어 소은의 어깨를 툭 쳤다. — 잘 왔어, 1학년. 짧은 말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온도가 느껴졌다. 소은은 처음으로 이 낯선 선배들 사이에서 안도감을 느꼈다. 하지만 그 결심이 채 하루도 지나지 않아, 세 사람은 예상치 못한 벽에 부딪히게 된다. 방과 후, 태식은 우기환의 뒤를 밟기로 했다. 혼자 움직이는 게 위험하다는 걸 알면서도, 성급하게 마음이 앞섰다. 우기환이 교문을 나서는 순간부터 태식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그를 따라갔다. 우기환의 걸음은 평소와 달랐다. 곧게 걷던 걸음이 어느 순간부터 골목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태식은 눈을 가늘게 떴다. '저긴 학교 뒤편인데... 뭐가 있다고 저길 가지.' 인적이 드문 골목이었다. 담벼락 사이로 그늘이 짙게 깔려 있었다. 태식은 벽에 몸을 붙이고 조심스럽게 그 뒤를 따라갔다. 그리고 그 순간, 시야에 들어온 광경에 태식의 걸음이 뚝 멈췄다. 우기환이 낯선 무리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사복을 입은 남자들이었다. 학생 같지는 않았다. 목소리는 낮았지만, 분위기만으로도 심상치 않은 대화라는 걸 알 수 있었다. 태식은 숨을 죽였다.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그 무리 중 하나가 손에 든 무언가를 우기환에게 건넸다. 명함이었다. 어스름한 빛 속에서도 그 위에 새겨진 로고가 선명하게 보였다. 천서준의 아버지 회사 로고였다. 태식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었다. 숨을 죽이고 어둠 속으로 몸을 낮췄다. 심장이 목까지 차오르는 것 같았다. '이게... 무슨 상황이지.' 머릿속이 빠르게 돌아갔다. 우기환과, 낯선 무리와, 그리고 그 로고. 세 가지가 어떻게 연결되는 건지, 태식은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다만 하나는 분명했다. 이 일이 단순한 학교 내 다툼이 아니라는 것. 태식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지금 본 것을 소은과 윤재에게 전해야 했다. 하지만 발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 자리에 붙박인 듯, 태식은 골목 안쪽 어둠을 향해 계속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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