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이계 3년, 산골로 추방되다

1화

### 1화 새벽 다섯 시, 강원도 태백 인근 B급 던전 게이트 앞. 기온은 영하 삼 도쯤 되어 보였다. 입김이 하얗게 뿜어져 나왔다가 게이트 쪽에서 흘러나오는 냉기에 섞여 곧바로 흩어졌다. 삼 년 만이었다. 이런 새벽 공기를, 이런 종류의 긴장을 맡아보는 게. 이계에서는 새벽이라는 개념 자체가 흐릿했으니까, 해가 뜨고 지는 걸 좌표로 계산해서 겨우 시간을 가늠하던 시절이 있었다. 입구에서 뿜어져 나오는 냉기가 얼굴을 스쳤을 때, 나는 이 던전이 겉보기와 다르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게이트 등급 표시는 B였지만, 안쪽 마력 밀도로 미루어 짐작하건대 실제 난이도는 A급에 가까웠다. 마력 밀도 측정이라는 게 정식으로는 관리국 소속 감별사들이나 할 수 있는 일이었고, 나 같은 짐꾼이 눈대중으로 재고 있다는 걸 알면 다들 코웃음을 칠 게 뻔했다.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은 이 자리에 나 하나뿐이었다. "강도훈 씨, 뒤에서 짐이나 챙기세요." 한서준이 검집을 어깨에 걸치며 말했다. 팀 리더의 목소리에는 명령이라기보다 확인 사살에 가까운 무게가 실려 있었고, 나는 그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대꾸해봐야 달라질 게 없다는 걸, 지난 팔 개월 동안 몸으로 배웠다. 여명의 검, 국내 헌터 랭킹 3위 팀. 그 이름 아래에서 내가 맡은 역할은 후방 지원, 정확히는 짐꾼에 가까운 잡무였다. 마력석 회수, 물자 운반, 부상자 응급 처치까지. 전투는 애초에 내 몫이 아니었다. 처음 이 팀에 들어왔을 때, 나는 내 능력치를 숨기지 않았다. 정확히는 숨길 필요도 없었다. 관리국에서 발급한 능력 측정서에는 등급 미달이라는 도장이 선명하게 찍혀 있었고, 그 종이 한 장이 내 삼 년의 시간을 통째로 무효로 만들었다. 이계에서 배운 검술, 몸에 새겨진 반사신경, 마력을 다루는 감각 같은 건 그 종이 위에 숫자로 환산되지 않았다. 증명할 수 없는 힘은 없는 것과 같다는 걸, 나는 그때 뼈저리게 알았다. 서준의 검이 첫 번째 몬스터의 목을 베는 걸 보면서, 나는 반사적으로 그 궤적의 각도를 눈으로 쫓았다. 삼십오 도. 몬스터의 급소를 정확히 짚었지만, 만약 저 각도에서 오 도만 어긋났다면 반격을 허용했을 거라는 계산이 머릿속을 스쳤다. 나는 그런 계산을 습관처럼 했다. 검을 쥔 적도 없는 팔 개월 동안, 남의 전투를 지켜보며 각도와 속도와 힘의 배분을 재는 게 유일하게 남은 버릇이었다. 쓸모는 없었다. 어차피 나는 검을 뽑을 자격조차 없었으니까. 이계에서 삼 년을 보내고 돌아온 뒤,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곳에서 겪은 것들, 배운 것들, 몸에 새겨진 것들을 여기서는 아무것도 증명할 수 없었다. 돌아와서 가장 먼저 마주한 게 바로 그 괴리였다. 손끝에는 아직도 검을 쥐던 감각이 남아 있는데, 세상은 나를 그저 삼 년간 실종되었다가 돌아온 등급 미달자로만 취급했다. "3층 통로에 균열이 생겼습니다." 무전으로 들려온 목소리는 윤소라였다. 팀의 힐러이자, 나보다 두 살 어린 후배. 그녀의 목소리에는 언제나 옅은 긴장이 섞여 있었는데, 그게 그녀의 성격 탓인지 아니면 나를 향한 경계심 탓인지는 판단이 서지 않았다. 소라는 처음 만났을 때부터 나를 어려워했다. 정확히는 무서워했다는 표현이 맞을지도 모른다. 등급 미달자가 어떻게 삼 년이나 실종 상태로 살아남았는지, 그 공백을 아무도 설명해주지 않았으니까. 나 역시 설명할 생각이 없었다. 설명해봐야 믿어줄 사람도 없었고, 믿어준다 해도 상황이 나아질 리 없었다. 균열. 나는 그 단어를 듣는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B급 던전에서 통로 균열이 발생한다는 건, 마력 밀도가 이미 임계치를 넘었다는 신호였고, 그건 곧 몬스터 웨이브가 곧 시작된다는 뜻이었다. 이계에서 이런 균열을 몇 번이나 마주쳤던가. 그때마다 균열의 색과 진동 주기로 웨이브까지 남은 시간을 가늠하곤 했다. 지금 이 통로의 균열도 비슷한 진동을 내고 있었다. 대략 삼십 초, 어쩌면 그보다 조금 더. 그 사실을 정확히 아는 사람은,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 하나였다. "철수해야 합니다." 내가 말했다. 서준이 나를 돌아봤다. 그 눈빛에는 어떤 감정도 없었고, 그게 나를 더 불안하게 만들었다. "짐꾼이 판단할 문제는 아닌데요." 짐꾼. 그 단어가 목구멍 안쪽을 뜨겁게 만들었지만,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여기서 화를 내봐야 상황이 나아지지 않는다는 걸 알고 있었고, 화를 낸다는 것 자체가 사치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팔 개월 동안 배운 게 하나 있다면, 바로 이 감정을 삼키는 요령이었다. 팀의 다른 두 사람, 탱커인 최민혁과 딜러인 오태영은 이미 통로 안쪽으로 더 깊이 들어가 있었다. 그들에게 균열이 보이지 않는 건 당연했다. 균열은 마력에 민감한 감각을 가진 사람에게만 미세한 떨림으로 감지되었고, 그런 감각을 갖춘 사람이 이 팀에는 나 말고 없었다. 정확히는, 있어도 아무도 몰랐다. 그리고 삼십 초 뒤, 균열이 터졌다. 공기가 갈라지는 소리가 났다. 얇은 유리에 금이 가는 듯한, 그러면서도 훨씬 낮고 무거운 소리였다. 통로 벽 한쪽이 검게 부풀어 오르더니 그대로 찢어졌다. 몬스터 다섯 마리가 동시에 통로를 메웠다. 등급으로 치면 각각 C급이었지만, 다섯이 뭉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개별 전투력을 단순히 더하는 게 아니라, 협공에 의한 배수 효과를 계산에 넣어야 했다. 다섯 마리가 동시에 움직이면 실질 위협도는 A급 하나를 상대하는 것과 비슷하거나, 어쩌면 그 이상이었다. 서준의 표정이 처음으로 굳는 걸 봤다. 그는 실력자였지만, 다수를 상대하는 전투에는 익숙하지 않았다. 팀의 전투 방식 자체가 그의 원맨쇼를 중심으로 짜여 있었으니까. "소라 씨, 뒤로!" 누군가 외쳤다. 하지만 소라는 이미 몬스터 하나에게 포위당한 상태였다. 회복 마력을 다 써버린 그녀의 손끝이 떨리는 걸, 나는 멀리서도 볼 수 있었다. 그 떨림의 폭을 눈으로 재면서, 나는 그녀에게 남은 마력이 거의 바닥났다는 걸 알았다. 힐러가 마력을 다 소진했다는 건, 이 통로 안에서 자가 치유가 불가능한 상태로 남았다는 뜻이었다. 민혁과 태영은 각자 앞의 몬스터를 상대하느라 소라 쪽으로 움직일 여유가 없었다. 서준 역시 정면의 몬스터 둘을 동시에 상대하고 있었다. 누구도 소라를 도울 수 있는 위치에 있지 않았다. 그 순간, 나는 계산을 끝냈다. 그녀를 구하러 가는 데 걸리는 시간, 통로 폭, 몬스터의 반응 속도, 그리고 내가 힘을 드러냈을 때 감당해야 할 위험까지. 거리는 대략 십이 미터, 몬스터의 이동 속도를 감안하면 내가 도달하기까지 남은 시간은 이 초 남짓. 그 이 초 안에 몸을 던지지 않으면 소라의 어깨든 목이든 어딘가는 찢길 게 분명했다. 답은 이미 나와 있었다. 나는 몸을 던졌다. 발끝이 바닥을 차는 순간, 삼 년간 몸에 새겨졌던 감각이 그대로 되살아났다. 근육이 기억하고 있던 움직임, 무게중심을 낮추고 상체를 비트는 그 동작이 생각보다 먼저 나왔다. 짐꾼 취급을 받는 남자가 갑자기 몬스터 하나를 맨손으로 밀쳐냈을 때, 소라의 눈에 떠오른 표정을 나는 똑똑히 봤다. 놀람이었고, 동시에 의심이었다. 그 두 감정이 뒤섞인 얼굴을 마주하는 순간, 나는 알았다. 이 힘을 쓴 대가는 반드시 돌아온다는 것을. 등급 미달자가 어떻게 C급 몬스터를 맨손으로 밀쳐낼 수 있는지, 그 질문은 오늘 이 안에서 끝나지 않고 오늘 이후로도 계속 따라붙을 것이다. 소라를 안전지대로 밀어낸 뒤, 나는 몬스터 무리와 정면으로 마주 섰다. 뒤를 돌아볼 여유는 없었다. 팀원들이 먼저 통로를 빠져나가는 발소리가 들렸고, 나는 그 소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강도훈 씨는요?" 소라의 목소리가 뒤에서 들렸다. 흔들리고 있었다. "먼저 가세요." 내가 말했다. 짧게, 그리고 정제되게. 더 길게 말할 여유도, 이유도 없었다. "같이 가야 안 되나!" 누군가 외쳤다. 사투리 억양이 섞인 그 목소리는 태영이었다. 하지만 그의 발은 이미 통로 바깥쪽을 향해 있었고, 그 몸의 방향이 말보다 더 정직한 신호였다. 미안하다는 말은 아무도 하지 않았다. 대신 다급한 발소리만 통로를 울렸다. 나는 그 소리에 서운함을 느낄 여유조차 없었다. 지금 중요한 건 감정이 아니라 시간이었다. 게이트가 닫히기까지 남은 시간은, 대략 삼 분. 던전 내부에서 균열이 한 번 발생하면, 그 균열이 완전히 봉합되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통상 삼 분 안팎이었다. 그 삼 분 동안 통로를 지켜서 몬스터들의 진행을 막아야 나머지 팀원들이 상층으로 완전히 빠져나갈 여유가 생긴다. 삼 분이 지나면 균열은 다시 닫히고, 몬스터의 개체 수도 더 늘지 않는다. 그러니까 내가 해야 할 일은 간단했다. 다섯 마리를 죽이는 게 아니라, 다섯 마리를 삼 분 동안 여기에 묶어두는 것. 문제는 그 삼 분을 버틸 몸이, 지금 내게 있는가 하는 거였다. 혼자서 다섯 마리를 상대하며 삼 분을 벌 수 있을지, 그건 나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눈앞에서 몬스터 한 마리가 이빨을 드러내며 자세를 낮췄다. 손끝이 저릿했다. 그건 두려움이라기보다는, 아주 오랜만에 실전을 마주한 몸이 보내는 경고에 가까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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