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여인의 이름은 서은하라 하였다.
첫 대면부터 그녀는 본좌를 마치 수십 년 동고동락*한 오래된 벗인 양 대했으니, 이는 참으로 방약무인*한 태도였도다.
*동고동락: 괴로움과 즐거움을 함께함.
*방약무인: 곁에 사람이 없는 것처럼 함부로 행동함.
키는 작았으나 눈빛은 태산을 짓누를 듯 강렬했고, 걸음걸이에는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본좌는 그 눈빛을 마주하며 속으로 경계의 끈을 놓지 않았느니라. 낯선 자를 함부로 신뢰하는 것은 필부*의 어리석음이 아니겠는가.
*필부: 평범하고 못난 사내.
"따라와."
짧은 명령이었다. 본좌는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노려보았다.
"본좌가 어찌 낯선 자를 따라가겠소. 그대의 정체도, 목적도 모르는 채 말이오."
"그럼 여기서 굶어 죽든가."
여인의 목소리에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었다. 마치 본좌의 목숨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투였다.
...도리가 없었다. 지갑에는 동전 몇 개뿐이었고, 배 속에서는 이미 우렛소리가 울리고 있었느니라. 참으로 굴욕적인 형국이었다. 천하를 호령할 재목이 한 끼 밥값에 무릎을 꿇는 꼴이라니.
서은하는 근처 카페로 본좌를 데려갔다. 요망한 유리문이 스스로 열리는 것을 보며 본좌는 흠칫 놀랐으나, 겉으로는 태연함을 유지하였다. 자리에 앉자마자 그녀는 손가락을 튕겼다. 별다른 주문도, 마법진도 없었건만 테이블 위에 따뜻한 차 한 잔이 놓였다. 김이 하늘하늘 피어오르는 모습이 실로 요사스러웠다.
"...무영창인가."
"눈치는 빠르네."
그녀가 팔짱을 끼며 본좌를 응시했다. 그 시선이 마치 본좌의 뼛속까지 들여다보는 듯하여, 본좌는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느니라.
"네 몸에 걸린 저주, 궁금하지 않아?"
본좌의 심장이 쿵 하고 떨어졌다. 이 여인, 본좌의 사정을 이미 알고 있었단 말인가.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에 잠시 말을 잃었다.
"...말해보시오. 어찌 본좌의 비밀을 알고 있는 것이오."
"넌 마력 그레이드가 SSS+야. 역대 최고. 근데 어떤 주문도 못 외워. 딱 하나, 전이마법만 무영창으로 나가지."
"...알고 있었소."
목소리가 저도 모르게 낮아졌다.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었으나, 감출 도리가 없었느니라.
"근데 왜 그런지는 모르지?"
본좌는 침묵했다. 차마 대답할 말이 없었다. 서은하가 입가에 미소를 걸었다. 그 미소에는 어쩐지 승자의 여유가 담겨 있었다.
"넌 마력 회로가 너무 커. 인간의 성대와 언어로는 그 회로에 명령을 담을 수가 없어. 근데 전이마법은 유일하게 언어가 아니라 '의지'로만 작동하는 마법이거든. 그래서 그것만 되는 거야."
"그럼... 다른 마법은 영원히 쓸 수 없단 말이오?"
목소리가 떨렸다. 본좌 스스로도 그 떨림을 숨길 수 없었느니라.
"아마도."
망치로 뒤통수를 얻어맞은 듯한 충격이었다. 태산을 옮길 힘을 지녔으되 손가락 하나 까딱할 재간이 없다는 것이, 이토록 잔인한 형국이었다니. 하늘이시여, 어찌 이런 시련을 내리시나이까.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로다. 만근의 힘을 지녔으되 그 힘을 담을 그릇이 없다니.'
속으로 탄식하는 사이, 서은하는 태연히 차를 한 모금 마셨다.
"근데."
서은하가 말을 이었다.
"전이마법 하나만 제대로 파도, 세상 웬만한 마법사들보다 훨씬 강해질 수 있어. 순간이동으로 싸우는 법을 알면."
본좌의 눈이 번쩍 뜨였다. 마치 어둠 속에서 한 줄기 광명*을 본 듯한 심정이었다.
*광명: 밝고 환한 빛.
"그것을... 가르쳐 주겠단 말이오?"
"조건이 있어."
"말해보시오. 어떤 조건이든 감내하리다."
"내가 시키는 대로 해."
짧고 명확한 말이었다. 본좌는 그녀의 눈을 오랫동안 들여다보았다. 그 안에 숨겨진 진짜 목적이 무엇인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으나, 지금 이 순간 본좌에게 다른 선택지는 없었느니라. 배는 여전히 고팠고, 차는 이미 반이나 비워져 있었다.
"...좋소. 스승으로 모시리다."
"스승이라니, 부담스럽게."
그녀가 피식 웃었다.
"짐 챙겨. 내일 미국으로 가야 하니까."
"미국이라니, 갑자기? 준비할 시간도 없이 말이오?"
"거기 훈련장이 있어. 여기서 훈련하면 또 사고 치잖아. 체육관 하나 더 부술래?"
그 말에 본좌는 얼마 전 손끝이 미끄러져 무너뜨린 체육관의 잔해가 떠올랐다. 참으로 낭패*스러운 기억이었다.
*낭패: 계획한 일이 실패로 돌아가 딱하게 됨.
본좌는 말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반박할 말이 없었느니라.
***
밤새 짐을 꾸리며, 본좌는 몇 번이고 손을 멈추었다. 무엇을 챙겨야 할지, 무엇을 두고 가야 할지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느니라. 결국 손에 쥔 것은 낡은 옷가지 몇 벌과 동전 몇 푼이 전부였다.
쏴아아-
새벽 빗소리가 창문을 두드렸다. 본좌는 그 소리를 들으며 오래도록 잠들지 못하였다.
***
비행기라는 거대한 쇠 새는 실로 놀라운 물건이었다. 몸을 싣는 순간부터 온몸의 털이 곤두섰으니, 이 쇳덩이가 정말로 하늘을 나른단 말인가 하는 의심이 가시지 않았다. 하늘을 나는 가마*라 여기며 창밖을 내려다보니, 구름 아래로 작아지는 조국의 산하가 아득하게 멀어져 갔다.
*가마: 원래는 사람을 태워 나르는 탈것. 여기서는 비행기를 낯설게 부르는 표현.
승무원이라는 자가 음식을 담은 작은 쟁반을 내밀었을 때, 본좌는 그것을 무슨 공물*인 줄로만 알고 정중히 두 손으로 받았다. 옆에서 서은하가 웃음을 참는 소리가 들렸으나, 본좌는 짐짓 못 들은 체하였다.
*공물: 나라나 지방에서 바치는 물건.
"긴장돼?"
옆자리의 서은하가 물었다.
"본좌가 어찌 긴장하겠소. 천하를 호령할 그릇이 이런 쇳덩이 하나에 흔들릴 리 있겠소."
손끝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는 것을, 그녀는 눈치챘을 것이다. 다만 굳이 지적하지 않았을 뿐. 창밖으로 보이는 구름의 바다가 마치 끝없는 설산*처럼 펼쳐져 있어, 본좌는 잠시 두려움을 잊고 그 광경에 넋을 놓았느니라.
*설산: 눈이 쌓인 산.
"거기 가면 2년은 못 돌아올 거야."
"2년이나? 그토록 긴 세월을 낯선 이국에서 보내야 한단 말이오?"
"짧은 거야. 네 힘을 제대로 다스리려면 그 정도는 필요해."
창밖의 구름이 흘러가는 것을 보며, 본좌는 문득 부모의 마지막 얼굴을 떠올렸다. 짐 챙겨. 지금 바로. 그 말 한마디에 담겼던 두려움을. 그날의 다급한 손짓과, 뒤돌아보지 말라던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선명하였다.
'그날의 그림자가 아직도 본좌를 쫓고 있는 것인가.'
가슴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끼며, 본좌는 조용히 눈을 감았다.
"스승."
"응?"
"본좌를 왜 데려가는 것이오. 진짜 이유가."
서은하는 잠시 침묵했다. 창밖을 바라보던 그녀의 옆얼굴에 알 수 없는 그늘이 스쳤다. 그 그늘은 마치 오래된 상처가 다시 벌어지는 순간의 표정과도 같았느니라.
"...그건 나중에 알게 될 거야."
대답을 회피하는 그 말투에서, 본좌는 이 인연이 결코 단순한 사제지연*이 아니라는 것을 직감했느니라.
*사제지연: 스승과 제자로 맺어진 인연.
무언가 더 묻고 싶었으나, 그녀의 표정이 더 이상의 질문을 허락하지 않았다. 본좌는 입을 다물고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비행기는 서서히 고도를 낮추고 있었다. 낯선 대륙이 창밖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끝없이 이어진 도로와, 성냥갑처럼 작아 보이는 건물들이 눈에 들어왔다. 저 낯선 땅 위에서 앞으로 2년을 보내야 한다니, 본좌의 가슴속에는 두려움과 기대가 뒤섞여 요동치고 있었느니라.
그리고 그 요동 속 어딘가에, 서은하의 그 알 수 없는 그늘진 표정이 계속 맴돌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