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이번 생엔 던전으로 먹고산다

2화

정선재는 하루 종일 그 포스터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았다. 부산 던전. 던전 안전 수칙. 게이트. 등굣길 버스 정류장에 붙어 있던 포스터였다. 색이 바래고 귀퉁이가 찢어진 채로 붙어 있었는데, 아무도 그걸 신기해하지 않았다. 다들 그냥 지나쳤다. 정선재만 멈춰 서서 그걸 뚫어지게 봤다. 수업 시간에도 그 포스터가 눈앞에 떠다녔다. 칠판 글씨 위에 겹쳐 보였다. 2009년 한국에는 그런 단어가 존재하지 않았다. 적어도 정선재가 알던 2009년에는.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머리가 복잡했다. 골목을 걸으면서도 발이 자꾸 헛나갔다. 현관문을 열자마자 신발을 벗어 던지고 텔레비전 앞에 앉았다. 리모컨을 눌렀다. 딸깍. 채널이 넘어갔다. 뉴스 채널이었다. 화면이 켜지는 데 시간이 좀 걸렸다. 낡은 브라운관 텔레비전이었다. 화면 가장자리가 살짝 일그러져 보였다. 앵커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오늘 오후 부산 던전 3구역에서 발생한 게이트 붕괴 사고와 관련해, 백호복초 길드가 긴급 토벌대를 파견했습니다. 정선재는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백호복초 길드. 낯선 이름이었다. 들어본 적도 없는 단어였다. 화면에는 검은 갑주를 두른 사람들이 나왔다. 등 뒤에 검을 멘 여자, 방패를 든 남자. 갑주에 새겨진 문양이 화면 조명을 받아 번쩍거렸다. 뒤로 거대한 붉은 문 같은 게 보였다. 게이트라는 게 그런 모양이었다. 문 주변으로 균열 같은 게 실핏줄처럼 뻗어 있었다. 카메라가 흔들렸다. 현장 취재진이 뒤로 물러나는 게 보였다. 관계자에 따르면 이번 붕괴는 1950년 최초 게이트 발생 이래 국내에서 세 번째로 큰 규모라고 합니다. 1950년. 정선재의 손이 리모컨을 놓쳤다. 탁. 리모컨이 바닥에 떨어졌다. 1950년이면 한국전쟁이 있던 해였다. 그가 알던 세계에서는 그랬다. 그런데 이 세계에서는 그 해에 게이트가 처음 열렸다고 한다. 이거 뭐야. 머리가 지끈거렸다. 뭔가 잘못 짜여진 것처럼 어지러웠다. 정선재는 자기 방으로 뛰어 들어갔다. 오래된 컴퓨터를 켰다. 부팅음이 지루하게 울렸다. 윙, 윙. 화면 부팅 로고가 뜨는 동안 손가락을 책상에 두드렸다. 초조함을 감추려는 습관이었다. 인터넷 창을 열고 검색창에 손을 올렸다. 게이트 역사. 검색 결과가 쏟아졌다. [1950년, 서울 용산에서 최초 게이트 발생 – 최초 목격자 3명 사망] [1953년, 정전협정 대신 게이트 대응 협정 체결] [1970년대, 각성자 제도 도입] [1990년대, 부산·대구·인천 대형 던전 개척 완료] [2000년대, 한국 던전 개척 세계 3위 진입] 정선재는 화면을 스크롤하는 손이 점점 느려졌다. 이건 내가 알던 역사가 아니야. 한국전쟁도 없다. 아니,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헷갈리게 서술돼 있었다. 게이트 대응 협정이라는 게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링크를 하나씩 눌러봤다. 정전협정 사진 대신 첫 게이트 발생 현장 사진이 걸려 있었다. 흑백 사진 속에 사람들이 붉은 균열 앞에서 멀뚱히 서 있었다. 이게 진짜라고? 삼성전자? 반도체? 검색해봤다. 결과가 나왔다. 삼성이라는 회사는 있었다. 그런데 사업 분야가 달랐다. 던전 채굴 장비와 각성자 보급품을 만드는 회사였다. 반도체 얘기는 한 줄도 없었다. 혹시 몰라서 현대, LG도 검색해봤다. 현대는 던전 개척 중장비 회사였다. LG는 각성자용 방어구 브랜드였다. 전부 다 달랐다. 정선재는 의자에 등을 기댔다. 허탈한 웃음이 나왔다. 하하. 그러다 웃음이 뚝 끊겼다. 그럼 내가 알던 주식 정보, 코인 정보, 부동산 정보. 그거 다 무슨 소용이야. 서른 해를 살면서 쌓은 미래 지식이 통째로 쓸모없어질 판이었다. 삼성전자가 반도체를 안 만드는 세계에서 삼성전자 주식을 사봤자 무슨 의미가 있나. 애초에 그 회사가 그 시기에 그 가격일 리도 없었다. 코인은? 그것도 다를 게 뻔했다. 애초에 인터넷 인프라 자체가 다른 방향으로 발전했을 가능성이 컸다. 부동산은 또 어떻고. 지진이니 던전 붕괴니 하는 변수가 부동산 가격에 어떻게 반영될지 상상도 안 됐다. 망했네. 정선재는 이마를 짚었다. 머릿속에서 서른 해 치의 계산이 전부 무너지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곧 다시 생각을 고쳤다. 망한 건 아니지. 다른 판이 열렸을 뿐이지. 계산이 다시 돌기 시작했다. 서른 해를 산 사람의 습관이었다. 판이 바뀌면 판을 다시 읽는다. 그게 정선재의 방식이었다. 새로운 시장에는 새로운 정보가 필요했다. 그리고 정보는 언제나 먼저 움직인 사람 손에 있었다. 던전이라는 게 새로운 시장이라면, 여기서도 먼저 아는 놈이 이긴다. 뭐부터 알아봐야 하지. 정선재는 검색창에 다시 손을 올렸다. 손끝이 키보드 위에서 잠깐 멈췄다. 무의식적으로 자기 나이를 떠올렸다. 각성자 검사. 검색 결과가 나왔다. [전국 중학교 3학년 대상 각성 적성 검사 시행 – 4월 초 실시] 정선재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중학교 3학년. 지금 정선재의 나이였다. 이거네.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남들보다 먼저 이 세계에 발을 들일 방법이 눈앞에 있었다. 한 달도 안 남았다. 검사 날짜를 보니 4월 초, 겨우 몇 주 뒤였다. 머릿속으로 계산이 빠르게 돌았다. 이 검사가 뭘 재는지, 통과하면 뭐가 열리는지, 아무것도 몰랐다. 하지만 몰라서 못 할 건 없었다. 일단 정보부터 모으자. 검사 관련 게시판을 뒤졌다. 학부모들이 올린 글, 학원 광고, 각성 적성 관련 온갖 잡음들이 화면을 채웠다. 그런데 그때, 텔레비전에서 속보 자막이 떠올랐다. [속보] 전국 게이트 경보 2단계 발령 – 대형 게이트 이상 징후 다수 포착 정선재는 방문을 열고 다시 텔레비전 앞으로 뛰어갔다. 의자가 뒤로 밀려나며 바닥을 긁는 소리가 났다. 앵커의 목소리가 다급해졌다. 정부는 오늘 오후 전국 게이트 경보를 2단계로 상향 조정했습니다. 백호복초 길드를 비롯한 주요 S급 길드들이 비상 대기 상태에 들어갔으며, 일부 지역에서는 대형 게이트 붕괴 가능성이 제기되고 있습니다. 대형 게이트 붕괴. 정선재는 그 말을 곱씹었다. 화면 하단에는 지도가 떴다. 부산, 대구, 인천 위로 붉은 점들이 깜박였다. 그중 하나는 유난히 크게 확대돼 있었다. 이게 그냥 지역 뉴스 수준이 아니었다. 이건 세계 규모의 얘기였다. 뭔가 큰일이 벌어지고 있어. 텔레비전 화면 아래로 붉은 자막이 계속 지나갔다. [전국 대피 안내 예비 발령 검토 중] 정선재는 마른침을 삼켰다. 화면 속 앵커의 표정이 평소와 달랐다. 원고를 든 손이 살짝 떨리고 있었다. 이 세계는 그가 알던 세계와 결이 달랐다. 편해질 방법을 찾기도 전에, 위험이 먼저 찾아온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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