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이번 생엔 던전으로 먹고산다

5화

몬스터가 다가왔다. 생김새는 사람 크기의 늑대 비슷한 형체였다. 눈이 두 개, 붉은색이었다. 입가에서 침이 뚝뚝 떨어졌다. 정선재는 배낭을 등에 메며 뒷걸음질쳤다. 전투 능력 전무면 도망이 최선이지. 발밑에서 자갈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바스락. 늑대의 귀가 그 소리에 반응해 쫑긋 섰다. 정선재는 숨을 멈췄다. 하지만 뒤로 물러날 공간이 얼마 없었다. 돌벽이 등에 닿았다. 망했네. 머릿속으로 온갖 계산이 스쳤다. 소리를 지르면 도움이 올까. 아니, 여긴 임시 던전이었다. 도움 같은 게 있을 리 없었다. 그 순간 손에 쥔 회중시계가 미약하게 진동했다. 윙. 정선재는 반사적으로 시계를 몬스터 쪽으로 들이밀었다. 딸깍. 시계 뚜껑이 저절로 열렸다. [특이 반응 – 감정 스킬 조건 충족] [대상: 초급 던전 늑대. 약점: 시각 예민 – 강한 빛에 3초간 마비] 정선재의 눈이 크게 벌어졌다. 약점이 보인다고? 감정 스킬이 몬스터한테도 통하는 거였나. 이런 건 안내서에도 없었는데.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늑대가 다시 한 발짝 다가왔다. 정선재는 배낭 속을 뒤졌다. 손에 잡히는 대로 아무거나 꺼내야 했다. 손거울이 손에 잡혔다. 이거다. 손거울을 꺼내 던전 벽 틈으로 들어오는 은은한 초록빛을 받게 각도를 맞췄다.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각도가 틀리면 끝이었다. 반짝. 빛이 몬스터의 눈에 정확히 튕겨 들어갔다. 크아앙! 늑대가 비명을 지르며 멈춰 섰다. 눈을 감고 제자리에서 버둥거렸다. 정선재는 그 틈을 놓치지 않았다. 근처에 떨어져 있던 돌을 집어 들어 냅다 던졌다. 퍽. 돌이 정확히 이마에 맞았다. 늑대가 옆으로 쓰러졌다. 늑대의 몸이 빛 무더기가 되어 흩어졌다. [초급 던전 늑대 처치 완료] 정선재는 그 자리에 서서 잠깐 숨을 몰아쉬었다. 심장이 목구멍까지 튀어 오른 느낌이었다. 이게 되네. 입꼬리가 슬쩍 올라갔다. 전투 능력이 없는 게 아니었다. 무기가 없었을 뿐이었다. 감정 스킬로 약점을 읽고, 잡화상이니까 당연히 가지고 있는 온갖 잡동사니로 그 약점을 찔러 넣으면 됐다. 이거 완전 다른 종류의 사기 캐릭터인데. 정선재는 배낭을 다시 열어 안을 살폈다. 손끝으로 하나씩 훑었다. 낡은 저울, 주머니들, 그리고 몇 가지 처음 보는 물건들. 녹슨 열쇠, 실뭉치, 유리병 하나. 이런 걸 언제 다 챙겼지. 기억도 안 났다. 배낭 자체가 뭔가 특별한 물건일지도 몰랐다. [감정 스킬 발동] [낡은 저울: 무게 측정 시 대상의 숨겨진 등급 표시 – 특수 효과] [주머니: 크기 대비 수납 용량 초과 – 특수 효과] 정선재의 눈이 점점 커졌다. 이거 전부 사기템이잖아. 저울로 등급을 재고, 주머니로 무한히 수납하고. 이게 그냥 잡화상 초기 지급품이라고? 잡화상이 저주받은 직업인 줄 알았는데 정반대였다. 전투는 못 해도 정보와 도구로 얼마든지 판을 뒤집을 수 있는 직업이었다. 서른 해를 살면서 배운 게 뭐였나. 정선재는 자문했다. 정면으로 부딪치는 게 아니라, 정보를 읽고 판을 짜는 거였지. 이 직업, 딱 나한테 맞는 거네. 남은 두 마리 몬스터는 굳이 정면으로 상대할 필요가 없었다. 정선재는 다시 회중시계를 열어 던전 지형을 훑어봤다. [감정 스킬 – 지형 정보 확인] [좌측 통로: 몬스터 서식 밀도 낮음. 우측 통로: 몬스터 2개체 감지.] 좌측으로 돌면 되잖아. 굳이 위험을 감수할 이유가 없었다. 여긴 실전이 아니라 시험이었다. 살아서 나가는 게 목적이었다. 정선재는 굳이 몬스터를 찾아 싸우지 않고 좌측 통로로 우회했다. 발소리를 죽이고, 벽에 붙어 걸었다. 통로 끝에서 초록빛이 새어 나왔다. 출구다. [미션 조건 – 처치 또는 회피 확인 중...] [임시 미션 완료: 몬스터 1개체 처치, 2개체 회피 성공] [임시 진입 시험 종료] [측정 결과: 상위 0.1% – 특기 사항 다수 발견] 정선재는 눈앞이 다시 흔들리는 걸 느꼈다. 위잉── 시야가 되돌아왔다. 다시 대기실이었다. 형광등 불빛이 눈을 찔렀다. 눈을 몇 번 깜빡였다. 감독관이 놀란 얼굴로 정선재를 바라봤다. “학생, 잡화상 직업으로 이 결과가 나온 건 처음 봐요.” “그런가요.” 정선재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속으로는 다른 생각이 돌았다. 이 직업, 제대로 굴리면 던전을 돈줄로 만들 수 있어. 감독관은 계속 서류를 들여다봤다. 손가락으로 종이를 짚어가며 뭔가를 확인했다. 감독관이 서류를 뒤적이며 말했다. “그런데 이 결과 보고서에 이상한 표시가 하나 더 있네요.” “뭐가요.” 정선재가 물었다. 목소리에 별다른 긴장은 없었다. 그저 궁금할 뿐이었다. 감독관의 표정이 살짝 굳었다. 서류를 쥔 손가락에 힘이 들어갔다. “회중시계 반응 기록이요. 이런 반응은 시스템 오류거나, 아니면.” 감독관이 말을 멈췄다. “아니면 뭔데요.” 정선재가 다시 물었다. 침묵이 몇 초 흘렀다. 대기실 안이 갑자기 조용해진 느낌이었다. 감독관은 서류를 덮으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등급 미확인 유물급 반응이에요. 이거 상부에 보고해야 할 것 같은데.” 정선재의 손끝이 회중시계 위를 스쳤다. 미확인 유물급이라니, 그게 뭔 소리야. 이거 그냥 낡은 시계 아니었나. 감독관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마치 정선재를 처음 보는 사람처럼 다시 훑어보는 눈빛이었다. “보고 안 하면 안 돼요?” 정선재가 슬쩍 물었다. 최대한 가볍게, 아무렇지 않게. 감독관이 고개를 저었다. “규정상 안 됩니다. 학생, 잠깐 여기서 기다려주세요.” 감독관이 자리에서 일어나 어딘가로 향했다. 발걸음이 평소보다 빠른 것 같았다. 정선재는 홀로 남은 대기실에서 회중시계를 물끄러미 내려다봤다. 이게 뭐 얼마나 대단한 물건이라고. 시계 뚜껑을 다시 딸깍, 열었다. 안쪽에 새겨진 낯선 문양이 눈에 들어왔다. 전에는 못 봤던 무늬였다. 전에는 없었던 건가, 아니면 못 봤던 건가. 정선재의 눈썹이 미세하게 좁아졌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