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등이 벽에 닿았다.
차갑고 단단한 감촉이 등줄기를 타고 올라왔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발밑에서 부서진 돌조각들이 서걱거리는 소리를 냈다.
괴물의 붉은 눈이 나를 정확히 응시하고 있었다.
동공도 없이 그냥 붉기만 한 눈이었다.
그 시선만으로도 온몸이 얼어붙는 듯했다.
숨을 쉬는 것조차 잊어버릴 정도였다.
(이대로 죽는 건가.)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갔다.
손끝의 저릿한 감각이 점점 더 강해졌다.
마치 피가 거꾸로 흐르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나는 반사적으로 두 손을 앞으로 뻗었다.
딱히 이유는 없었다.
그냥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았다.
몸이 먼저 움직이고, 생각은 그 뒤를 따라오는 것 같았다.
괴물의 거대한 몸체가 천천히 기울었다.
발톱 끝에서 검붉은 액체가 뚝, 떨어졌다.
그 순간, 손바닥에서 희미한 푸른빛이 새어나왔다.
스으.
처음엔 그저 손금을 따라 흐르는 옅은 빛줄기였다.
빛은 점점 넓어지며 내 주변으로 얇은 막을 그려냈다.
반투명한 그 막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미세하게 진동했다.
괴물의 발톱이 그 막을 향해 내리찍혔다.
쿠웅.
충격이 온몸을 관통했다.
막은 부서지지 않았지만, 나는 뒤로 튕겨나가며 바닥에 나동그라졌다.
어깨뼈가 바닥에 부딪치는 소리가 귓속을 울렸다.
숨이 턱 막혔다.
(이걸로는 못 버텨…)
폐부 깊숙한 곳에서부터 통증이 올라왔다.
시야 한쪽이 흔들렸다.
괴물이 다시 발을 들어 올렸다.
거대한 그림자가 나를 완전히 뒤덮었다.
나는 온 힘을 다해 몸을 굴려 피했다.
오른쪽 어깨가 바닥에 부딪치며 둔한 통증이 퍼졌다.
이어 팔꿈치, 무릎 순서로 바닥과 부딪혔다.
하지만 그 순간에도 눈은 괴물의 움직임을 놓치지 않았다.
(살아야 해. 무조건.)
그 생각뿐이었다.
다른 어떤 생각도 끼어들 틈이 없었다.
가족도, 미래도, 지금 이 순간엔 존재하지 않았다.
오로지 살아남는다는 감각만이 몸을 지배했다.
나는 다시 두 손을 뻗으며 무언가를 간절히 바랐다.
손바닥이 뜨거워졌다.
아니, 뜨거운 게 아니라 무언가가 손바닥을 관통해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그 순간, 세상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소리가 사라졌다.
괴물의 포효도, 사방에서 들려오던 비명도, 발밑에서 부서지던 돌조각의 소리도, 모두 한순간에 지워졌다.
괴물의 움직임도, 주변의 아우성도, 모두 먹먹하게 멀어졌다.
마치 두꺼운 유리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다른 세계를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내 눈앞으로 푸른 빛의 문양이 커다랗게 펼쳐졌다.
문양은 복잡한 기하학적 형태를 그리며 천천히 회전했다.
[미확인 권능이 발현됩니다]
[좌표를 확보합니다…]
[안전 공간을 소환합니다]
낯선 문자들이 허공에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나는 그것을 읽을 겨를도 없이, 갑작스러운 부유감에 휩싸였다.
발밑이 사라진 듯한 느낌이었다.
몸이 아래로 떨어지는 것도 같고, 위로 떠오르는 것도 같은, 어느 쪽인지 구분할 수 없는 감각이었다.
귓속에서 이명이 울렸다.
눈앞이 새하얗게 번쩍였다.
그리고 다음 순간, 나는 완전히 다른 공간에 서 있었다.
주변은 고요했다.
숨소리 하나 크게 들릴 만큼 정적이 깊었다.
조명은 은은한 노란빛이었고, 발밑에는 부드러운 대리석 바닥이 깔려 있었다.
바닥은 차갑지 않았다.
오히려 온기가 느껴질 정도였다.
천장은 높았고, 벽에는 낯선 문양들이 새겨져 있었다.
문양은 아까 보았던 그 푸른빛의 기하학적 형태와 닮아 있었다.
창문 밖으로는 검은 우주 같은 공간이 펼쳐져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위협적인 느낌은 없었다.
별처럼 보이는 작은 빛들이 아주 느리게 흐르고 있었다.
(여기가… 어디야.)
나는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주변을 둘러봤다.
방금까지 나를 향해 발톱을 내리찍던 괴물의 붉은 눈이 아직도 눈앞에 어른거리는 것 같았다.
눈을 몇 번이나 깜빡여도 그 잔상은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하지만 이곳에는 어떤 위협도 느껴지지 않았다.
공기마저 다르게 느껴졌다.
숨을 들이쉴 때마다 폐 속까지 맑아지는 듯한 감각이었다.
다리가 풀렸다.
나는 그대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손이 떨렸다.
숨이 가빴다.
심장이 아직도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살았어… 나, 살았어.)
안도감이 밀려오는 동시에, 알 수 없는 두려움도 함께 스며들었다.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나는 전혀 이해할 수 없었다.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아까 그 푸른빛이 남긴 흔적은 이미 사라진 뒤였다.
그저 평범한 내 손바닥이었다.
정말로 방금 그 일이 일어난 게 맞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
그때, 어딘가에서 낮고 부드러운 음성이 들려왔다.
[환영합니다. 이곳은 소유자님만의 독립 공간입니다.]
나는 화들짝 몸을 일으키며 주변을 살폈다.
목소리의 주인은 보이지 않았다.
허공에서만 그 음성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방향조차 가늠할 수 없었다.
앞인지, 뒤인지, 위인지, 아래인지.
[놀라지 마세요. 저는 이 공간의 관리 시스템입니다.]
[소유자님께 필요한 정보를 안내해드리겠습니다.]
(관리 시스템…?)
나는 여전히 혼란스러운 채로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분명 방금 전까지 목숨이 위태로웠는데, 지금은 이렇게 낯선 목소리와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나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기… 여긴 정확히 어디죠?"
[정확한 위치는 소유자님의 이해 수준에 따라 순차적으로 안내됩니다.]
[지금은 안전에 대한 정보만 우선 전달하겠습니다.]
[이 공간은 외부의 위협으로부터 완전히 차단되어 있습니다.]
[소유자님은 안전합니다.]
그 말에 나는 잠시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봤다.
높은 천장 위로 별빛 같은 것들이 은은하게 반짝이고 있었다.
안전하다는 그 한마디가, 방금 전 겪은 지옥 같은 순간을 아주 조금 덜어내는 것 같았다.
몸의 떨림도 서서히 잦아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등 뒤에서 그녀의 손이, 나를 향해 뻗어오던 그 손이 잊히지 않았다.
그 손끝의 표정, 벌어진 입술, 뭔가 외치려던 순간의 얼굴까지도.
전부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나… 도망친 거지.)
괄호 속 그 자각이 가슴 한쪽을 무겁게 눌렀다.
목이 조여드는 느낌이었다.
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며 무릎 사이에 고개를 파묻었다.
숨을 크게 내쉬었지만, 답답함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소유자님, 괜찮으십니까.]
목소리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 목소리에게, 이 낯선 공간에게, 방금 벌어진 일에 대해서 무엇을 물어야 할지조차 정리되지 않았다.
정적이 흘렀다.
그 정적 속에서 나는 그저 숨소리만 반복했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이 낯선 공간을 만들어낸 이 힘이 대체 어디서 온 것인지, 무엇 때문에 나에게만 주어진 것인지, 아무것도 알 수 없다는 사실을 새삼 깨달았다.
그리고 그 사실은, 방금 겪은 죽음의 위기보다도 훨씬 더 나를 두렵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