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계약했다, 대가는 몰랐다

4화

시험 날 아침, 하늘이 흐렸다. 구름이 낮게 깔려서 해가 보이지 않았다.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목덜미를 스쳤다. 접수처 옆 시험장으로 향하는 길, 뚱보가 내 손을 꽉 잡았다. 손이 따뜻했다. 내 손은 차가웠다. "긴장돼?" "조금." 대답하면서 손바닥의 낙인을 다시 만졌다. 따뜻했다. 낙인이 따뜻하다는 게 언제부터 당연해졌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나는 어제 잠도 못 잤어." 뚱보가 걸으면서 말했다. "네가 못 자야지 왜 형이 못 자." "당연하지. 내 동생 시험인데." 동생이라는 말에 뭔가 반응해야 했다. 목이 메거나, 코끝이 시큰해지거나. 아무 반응이 없었다. 그냥 지나갔다. 이상하다는 생각도 그때는 하지 못했다. 거리에는 시험을 보러 가는 다른 아이들도 있었다. 다들 목에 정식 신분증을 걸고 있었다. 은색으로 반짝이는 그 얇은 카드가 마치 통행증처럼 보였다. 나는 아무것도 걸고 있지 않았다. 손바닥의 낙인이 유일한 증표였다. 오전 9시. 시험장에 도착했다. 건물 앞에 줄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감독관 두 명이 명단을 대조하며 순서대로 들여보냈다. 흑우 응시자는 나를 포함해 세 명뿐이었다. 나머지는 정식 신분을 가진 아이들, 서른 명이 넘었다. 세 명과 서른 명. 숫자가 주는 무게가 있었다. 확률로 따지면 나는 이미 지고 있는 게임이었다. 다른 두 명의 흑우 아이를 눈으로 훑었다. 한 명은 손톱을 물어뜯고 있었고, 다른 한 명은 눈을 감고 뭔가를 중얼거리고 있었다. 기도인지, 저주인지 알 수 없었다. 여우도 있었다. "도현 형, 오셨네요." 여우가 웃으며 다가왔다. 여우의 얼굴에는 여유가 있었다. 시험을 앞둔 사람의 표정이 아니었다. "저는 이번엔 안 봐요. 저희 형 시험 보조로 왔어요." 형이라는 사람이 저 멀리서 손을 흔들었다. 체격이 좋고, 3급 합격 인증표를 목에 걸고 있었다. 여우의 형은 3급 시험에 이미 합격해 정식 기계사를 앞두고 있었다. 여우는 급할 게 없었다. 나는 급했다. 그 차이가 여우의 웃음에 그대로 묻어 있었다. "열심히 해보세요. 뭐, 잘 안 되면 다음이 있으니까요." 다음은 없었다. 여우도 알고 있을 것이다. 여우가 그 사실을 알면서도 저렇게 말한다는 게, 친절인지 조롱인지 헷갈렸다. 아마 둘 다였을 것이다. 뚱보가 내 옆에서 여우를 쏘아봤다. "쟤 뭐야, 재수 없게." "신경 쓰지 마."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손바닥의 낙인을 다시 만졌다. 뜨거웠다. 오전 10시. 시험 시작. 시험장 안으로 들어갔다. 넓은 홀에 긴 테이블이 줄지어 있었다. 각 테이블마다 부품 박스가 하나씩 놓여 있었다. 감독관이 부품 박스를 나눠주었다. A급 엔진 완전 조립. 제한 시간 두 시간. 주변 아이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A급이라는 말에 몇몇은 숨을 삼켰다. 박스를 열었다. 안에는 뼈대, 배선, 코어 삽입구, 출력 조율기가 어지럽게 섞여 있었다. 부품 하나하나가 낯설었다. 이론으로 배운 것과 실물은 또 달랐다. 손을 뻗었다. 낙인이 반응했다. 뜨거운 열기가 손끝에서 퍼졌다. 뼈대를 조립했다. 배선을 연결했다.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생각보다 몸이 먼저 반응했다. 마치 다른 누군가가 내 손을 대신 움직이는 것 같았다. 머릿속으로는 다음 단계를 생각하지도 않았는데, 손이 이미 그 부품을 집고 있었다. 배선의 색깔을 구분해서 순서대로 연결해야 했는데, 그 순서가 저절로 떠올랐다. 아니, 떠오른 게 아니라 이미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이상했다. 두 달 전의 나였다면, 이 부품들을 보고 손도 못 댔을 것이다. 11시. 절반이 지났다. 주변을 둘러봤다. 옆 테이블의 아이는 아직 뼈대도 제대로 못 세우고 있었다. 진땀을 흘리며 배선도를 몇 번씩 뒤집어보고 있었다. 나는 이미 코어 삽입구까지 끝냈다. 11시 40분. 조립이 끝났다. 주변을 둘러보니 아직 다들 배선 단계에서 씨름하고 있었다. 출력 조율기를 켰다. 엔진이 낮게 진동하며 살아났다. 진동이 손바닥을 타고 올라왔다. 그 감각이 낙인의 열기와 겹쳐졌다. 녹색 등이 켜졌다. 합격 신호였다. 주변 몇몇이 그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시선이 잠깐 내 쪽으로 몰렸다가 다시 흩어졌다. 감독관이 다가와 내 엔진을 확인했다. 손가락으로 이곳저곳을 눌러보고, 계기판을 확인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완벽하네요. 시간도 제일 빨랐고." 숨이 턱 막혔다. 합격. 그 단어가 머릿속에서 몇 번이고 반복됐다. 합격, 합격, 합격. 세 번을 되뇌었는데도 실감이 나지 않았다. 감독관이 서류에 뭔가를 적더니 나에게 확인 카드를 건넸다. 임시 확인증이었다. 정식 신분증은 나중에 나온다고 했다. 카드를 받는 손이 떨렸다. 기쁘다는 이유의 떨림이라고 생각했다. 오전 11시 50분. 시험장을 나섰다. 뚱보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멀리서부터 뚱보가 발을 동동 구르는 게 보였다. "어땠어?" "됐어." "진짜?" "합격이래." 뚱보가 나를 번쩍 안아 올렸다. 주변 시선이 몰렸다. "드디어! 도현아, 드디어!" 뚱보의 목소리가 떨렸다. 울고 있었다. 두 달간의 마음고생이 한 번에 터진 것 같았다. 뚱보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그 눈물이 내 어깨에 닿았다. 젖은 감각만 느껴졌다. 나는 웃었다. 입꼬리가 자연스럽게 올라갔다. 그런데 이상했다. 웃고 있는데, 뚱보처럼 눈물이 나지 않았다. 기뻐야 하는데, 기쁨의 크기가 이상하게 얕았다. 두 달간 함께 버틴 시간의 무게에 비하면, 지금 느끼는 감정은 너무 가벼웠다. 두 달. 그 사이 뚱보는 저축한 돈을 헐어 재료비를 댔고, 밥을 나눠줬고, 매일 밤 내가 잠들 때까지 옆에서 이론서를 같이 읽어줬다. 그 모든 시간이 머릿속에 그대로 있었다. 장면 하나하나가 다 기억났다. 그런데 그 장면을 떠올려도, 예전처럼 가슴이 뻐근해지지 않았다. 기억은 있는데, 기억의 무게가 없었다. "고마워, 뚱보야." 말은 나왔지만, 그 말에 실린 무게가 예전 같지 않았다. 마치 다른 사람의 대본을 읽는 것 같았다. 뚱보는 내 표정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것 같았다. 여전히 울면서 웃고 있었다. "밥 먹으러 가자. 오늘은 내가 제일 비싼 걸로 사줄게." "무리하지 마." "무리하는 게 아니라, 오늘 같은 날은 무리해야지." 뚱보가 내 손을 잡고 걸었다. 손바닥이 뜨거웠다. 밤에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오후 8시. 작업장. 뚱보가 축하한다며 저녁을 준비하는 동안, 나는 몰래 자리를 비웠다. 작업장 뒤편, 아무도 없는 구석으로 갔다. 낙인 위치를 확인했다. "탐식령." 낙인이 빛났다. 빛이 퍼지는 방식이 평소와 조금 달랐다. 더 짙었다. "합격 축하해." 목소리에 감정이 없었다. "대가가 뭐였어. 이제 말해." "말해도 이해 못 할 거라고 했잖아." "말해." 목소리를 높였다. 정령이 잠시 침묵했다. 그 침묵이 길게 느껴졌다. 몇 초였는지 셀 수도 없었다. "네가 뚱보와 함께 겪었던 기억 중 일부, 그리고 그 기억에 붙어 있던 감정 일부를 가져갔어." 손끝이 차가워졌다. "뭐?" "정확히는 감정의 밀도. 넌 여전히 기억은 있어. 그런데 그 기억을 떠올릴 때 느껴야 할 무게가 줄었어."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밀도라니, 그게 무슨 소리야." "쉽게 말하면, 같은 사진인데 색이 흐려진 거야. 형태는 그대로인데 채도가 낮아졌다고 생각하면 돼." "장난처럼 말하지 마." "장난 아니야. 사실이야." "그래서, 아까 그 순간에." 뚱보가 나를 안아 올렸을 때. 눈물이 나지 않았던 순간. "기뻐야 하는데, 안 기뻤던 게, 그거였어?" "정확해." 숨이 막혔다. 손이 떨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얼마나 가져간 거야." "수치로 말해줘도 넌 이해 못 해. 그냥, 두 달치 기억 중에서 특정 감정선 몇 개가 얕아졌다고 해두자." "특정 감정선이라는 게 뭔데." "뚱보가 너를 위해 뭔가를 해줬을 때 느꼈던 그 뭉클함. 그런 거." 가장 아픈 곳을 정확히 찔렀다. "돌려줘." "안 돼. 이미 지불된 대가는 그렇게 쉽게 돌아오지 않아." "장난해? 뚱보한테 느껴야 할 감정을 가져갔다는 거잖아." "정확히는, 그 기억에 대한 감정의 일부야. 전부는 아니야. 그리고 넌 여전히 뚱보를 좋아해." "그게 위로가 될 거라고 생각해?" "위로하려는 게 아니야. 사실을 말하는 거야." "사실이든 아니든, 네가 지금 나한테서 뭘 훔쳐갔는지는 알아야 할 거 아니야." "훔친 게 아니야. 거래였어. 넌 동의했어." "이런 대가라고는 말 안 했잖아!" "말했어도 이해 못 했을 거라고 했잖아. 지금도 이해 못 하고 있잖아." 맞는 말이었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나는 벽을 짚고 주저앉았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뚱보를 좋아하는 감정은 있다. 하지만 그 두 달, 뚱보가 나를 위해 저축을 털고, 밥을 나눠주고, 매일 밤 걱정하던 그 구체적인 기억들. 그 기억에 붙어 있던 감정의 무게. 그게 조금 줄었다. 작지만, 분명히 비어 있었다. 그 공백을 인지하는 것 자체가 소름 끼쳤다. "다음번엔 또 뭘 가져갈 거야." "그건 그때 봐야 알지." "미리 말할 수는 없어?" "말해도 넌 계속 계약할 거야. 그게 너야." 부정하고 싶었다. 부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낙인의 빛이 서서히 잦아들었다. 작업장 문 너머로 뚱보의 목소리가 들렸다. "도현아! 밥 다 됐어! 어디 있어?" 나는 손바닥을 옷에 쓱쓱 문질렀다. 열기가 아직 남아 있었다. 일어나서 문 쪽으로 걸었다. 발걸음이 무거웠다. 문을 열자 뚱보가 상을 다 차려놓고 웃고 있었다. "뭐 하다 왔어, 이렇게 늦게." "그냥, 좀." 뚱보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봤다. "표정이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가슴이 철렁했다. 표정 관리를 못 했다는 뜻이었다. "아니야. 배고파서 그래." 거짓말이 자연스럽게 나왔다. 그 자연스러움이 또 소름 끼쳤다. 뚱보는 더 묻지 않고 웃으며 밥을 퍼줬다. 밥그릇을 받으면서, 나는 다시 손바닥을 만졌다. 앞으로 몇 번을 더 이렇게 거짓말해야 할지, 몇 번을 더 뭔가를 잃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낙인만이 여전히, 뜨겁게, 내 손바닥 위에서 살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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