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새벽 다섯 시 반,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눈이 떠졌다.
창밖은 아직 푸르스름한 어둠에 잠겨 있었다.
나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스트레칭을 했다.
관절에서 뻐근한 소리가 났다.
하지만 예전 회사 다닐 때의 그 무거운 피로감과는 달랐다.
(이건... 근육이 붙는 느낌이야.)
헌터 등록을 한 지 벌써 반년이 지났다.
그 사이 몸이 눈에 띄게 달라졌다.
이불을 정리하며 창밖을 바라보았다.
골목 어귀 가로등이 아직 꺼지지 않고 희미하게 빛나고 있었다.
그 불빛 아래로 신문 배달 오토바이가 스치듯 지나갔다.
멀리서 개가 한 번 짖더니, 곧 다시 조용해졌다.
평범한 소리들이었다.
그런데도 요즘은 그 평범함이 유난히 소중하게 느껴졌다.
거울 앞에 서서 상의를 벗었다.
어깨선이 예전보다 뚜렷해져 있었다.
배에는 옅은 근육의 결이 잡혔다.
블랙기업에서 매일 야근하며 삭아가던 몸과는 완전히 다른 몸이었다.
손끝으로 옆구리를 눌러보았다.
단단했다.
예전이었다면 상상도 못 했을 감각이었다.
"강도윤, 너 요즘 좀 사람 됐다."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픽 웃었다.
[좋은 아침입니다, 마스터.]
손목에 찬 시스템 단말기에서 낮고 부드러운 음성이 흘러나왔다.
협회에서 헌터 등급을 매길 때 지급하는 AI 보조 프로그램, 이름은 아직 없었다.
"이름 좀 지어줘야 되는데, 매번 잊어버리네."
[원하신다면 지금 정해주셔도 됩니다.]
"음... 나중에. 아직 안 떠올라."
[알겠습니다, 마스터.]
"오늘 스케줄이 어떻게 돼?"
[오전 열 시, 오세연 님, 차현우 님과 함께 3등급 던전 '고요의 숲' 탐사가 예정되어 있습니다.]
"3등급이면... 슬슬 몸 좀 풀리겠네."
[체력 지표는 양호합니다. 다만 최근 수면 시간이 평균보다 짧습니다.]
"알아, 알아. 오늘은 일찍 잘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지켜질 리 없다는 걸 나도 알고 있었다.
간단히 씻고 나와 부엌에서 계란을 부쳤다.
노른자가 팬 위에서 지글거리는 소리가 났다.
창문을 살짝 열어두었더니 아침 공기가 들어와 커튼을 흔들었다.
계란 두 개를 접시에 옮기고, 식은 밥을 데워 그 옆에 놓았다.
젓가락으로 노른자를 터뜨리자 노란 물이 밥알 사이로 천천히 퍼졌다.
평범하고, 평온한 아침이었다.
이런 아침이 반년 전엔 상상도 못 했던 사치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밥을 다 먹고 그릇을 씻으며, 문득 지난 반년을 떠올렸다.
회사를 그만두고 헌터 등록을 하겠다고 했을 때, 부모님은 반대하지 않았다.
그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볼 뿐이었다.
오세연만이 웃으며 손을 잡아주었다.
"같이 하자, 도윤아."
그 말 한마디가 전부였다.
그때는 그걸로 충분했다.
집을 나서기 전 휴대폰을 확인했다.
오세연에게서 메시지가 와 있었다.
[오늘 좀 늦을 것 같아. 현우가 픽업해준다고 해서.]
손끝이 멈칫했다.
(현우가... 픽업을?)
별일 아니라고 생각하려 했지만, 가슴 한쪽이 미묘하게 뒤틀렸다.
답장을 쓰려다 지웠다.
다시 쓰려다 또 지웠다.
결국 [ㅇㅇ 알겠어] 라는 세 글자만 남기고 전송했다.
오세연은 나와 고등학교 때부터 사귀어온 연인이었다.
헌터 등록도 함께 했다.
차현우는 원래 오세연의 친구였고, 나와도 그럭저럭 어울리는 사이였다.
그런데 최근 몇 달 사이, 뭔가 미묘하게 어긋나는 느낌이 있었다.
딱히 짚어낼 순 없지만, 삐걱거리는 듀엣곡 같은 위화감이었다.
언젠가부터 오세연이 차현우 이야기를 할 때 목소리 톤이 살짝 올라간다는 것도, 나는 알고 있었다.
(그냥... 기분 탓이겠지.)
나는 애써 그 생각을 접고 집을 나섰다.
현관문을 닫고 나서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발소리가 유난히 크게 울렸다.
평소라면 신경 쓰지 않았을 소리였다.
오늘은 그 소리마저 신경을 긁었다.
(별거 아니야. 그냥 픽업이잖아.)
스스로에게 몇 번이나 되뇌며 걸음을 옮겼다.
협회 앞 광장에는 이미 헌터들이 삼삼오오 모여 있었다.
등급별로 갈라진 대기줄, 무기를 정비하는 소리, 낮게 오가는 대화 소리.
그 사이로 오세연과 차현우가 함께 걸어오는 게 보였다.
둘은 웃고 있었다.
평소보다... 조금 더 가깝게.
차현우가 뭔가 말을 하자 오세연이 손으로 입을 가리며 웃었다.
그 웃음이, 예전엔 나를 향했던 웃음과 닮아 있었다.
"어, 도윤이 왔네."
오세연이 손을 흔들었다.
차현우는 나를 흘긋 보고는 시선을 돌렸다.
"오늘도 뒤에서 서포트만 할 거지?"
비웃음이 섞인 목소리였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어깨를 으쓱했다.
"내 스타일이니까."
차현우는 이 파티의 딜러였다.
화려한 은빛 장검과 각성한 '검광' 스킬로 던전 안에서 늘 주목받는 존재였다.
반면 나는 스킬 등급조차 낮은 초보 헌터로 분류되어 있었다.
협회 시스템상 내 스킬 '∞웨폰 EX'는 아직 발현된 능력치가 거의 없다시피 했다.
각성은 했지만, 아무도 그 진짜 위력을 몰랐다.
나조차도.
장비를 점검하는 척, 나는 곁눈질로 둘의 거리를 가늠했다.
차현우가 오세연의 배낭끈을 대신 조여주고 있었다.
익숙한 손짓이었다.
마치... 이미 여러 번 해본 것처럼.
(왜 저렇게 자연스럽지.)
그 생각이 들자마자, 스스로가 옹졸해지는 것 같아 고개를 저었다.
"고요의 숲, 최근 이상 몬스터 출현 보고가 늘었다고 하던데."
오세연이 지도를 펼치며 말했다.
"그래도 3등급이니까 별거 없겠지."
차현우가 검을 어깨에 걸치며 자신 있게 말했다.
나는 지도를 내려다봤다.
숲 중심부 표시에 작은 빨간 점이 하나 새로 찍혀 있었다.
(저건... 뭐지.)
[마스터, 최근 이틀간 해당 구역에서 이례적인 마나 반응이 세 차례 감지되었습니다.]
단말기가 조용히 알렸다.
나는 미간을 좁혔다.
"이례적이라는 게, 어느 정도야?"
[정확한 원인은 불명입니다. 다만 통상적인 3등급 던전 범위를 초과하는 파형입니다.]
"몬스터 종류는?"
[등급 상승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습니다. 다만 확정 정보는 아닙니다.]
협회 브리핑에서는 별다른 경고가 없었다.
하지만 뭔가 마음에 걸렸다.
(이런 건 보통 협회가 먼저 알아채는데... 늦은 건가.)
게시판 공지에도, 등급 변동 안내는 없었다.
그저 평범한 3등급 던전으로 분류되어 있을 뿐이었다.
"뭘 그렇게 심각하게 봐?"
오세연이 내 어깨를 툭 쳤다.
"아니, 그냥."
나는 지도를 접으며 대답을 흐렸다.
괜히 불안을 부풀리고 싶지 않았다.
차현우가 그 모습을 보고 피식 웃었다.
"쓸데없는 걱정은. 서포터가 앞장설 일도 없는데."
그 말에 오세연이 살짝 눈을 흘겼지만, 딱히 반박하지는 않았다.
나는 그저 웃으며 넘겼다.
숲으로 들어서자 공기가 확연히 달라졌다.
나뭇잎 사이로 스며드는 햇빛이 부드럽게 흔들렸다.
벌레 우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울렸다.
평화로운 풍경이었다.
하지만 걸음을 옮길수록, 그 규칙적인 소리 사이에 아주 작은 간격이 생기는 걸 느꼈다.
마치 곡조 중간에 한 박자가 삐끗하듯이.
나는 발걸음을 늦추며 주변을 다시 살폈다.
나무들 사이로 스며드는 빛이 평소보다 조금 더 붉게 보이는 듯했다.
(기분 탓인가... 아니면.)
"뭔가... 조용하지 않아?"
내가 낮게 물었다.
"그냥 숲이잖아, 조용한 게 당연하지."
차현우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오세연은 앞장서서 걸으며 웃었다.
"도윤이 요즘 겁이 많아졌나 봐."
나는 대답하지 않고 주변을 살폈다.
숲 안쪽, 나무 그림자가 유난히 짙게 드리운 자리가 보였다.
그 그림자 속에서, 뭔가가 움직였다.
형체는 없었다.
다만 검은 그림자가 살짝 일그러졌다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온 것 같은 느낌.
심장이 한 박자 빠르게 뛰었다.
[마스터, 심박수가 상승하고 있습니다. 이상 반응입니까?]
단말기가 나지막이 물었다.
"아니, 아직은... 모르겠어."
스윽.
낙엽이 흔들리는 소리가 아니었다.
나는 걸음을 멈췄다.
"뭐야, 왜 그래?"
오세연이 돌아보며 물었다.
나는 그림자가 있던 자리를 가리켰다.
"저기, 뭐가..."
말을 끝맺기도 전에, 그림자는 이미 사라져 있었다.
바람 한 줄기가 스치듯 지나갔다.
숲은 다시 고요해졌다.
하지만 그 고요함이, 방금 전과는 다른 종류의 고요함처럼 느껴졌다.
마치 누군가 숨을 참고 있는 것처럼.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애써 말을 삼켰다.
오세연과 차현우는 별일 아니라는 듯 다시 앞으로 걸어갔다.
차현우가 앞장서 걸으며 오세연에게 뭔가 말을 건넸고, 오세연이 또 웃었다.
그 웃음소리가 숲의 정적 속으로 스며들어 사라졌다.
나만이 그 자리에 서서, 그림자가 남긴 낯선 파문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손목 위 단말기가 아주 짧게, 낮은 진동을 울렸다.
[마스터, 방금 감지된 마나 반응이... 지도상 좌표와 정확히 일치합니다.]
나는 그 말을 듣는 순간, 등줄기를 타고 서늘한 기운이 올라오는 걸 느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