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던전 너머의 눈

1화

한빛기획 마케팅 2팀. 자리는 여섯 개인데 내 자리만 창가 반대편, 복도 쪽 벽에 딱 붙어 있었다. 겨울에는 문 열릴 때마다 찬바람이 목덜미로 파고들었고, 여름에는 에어컨 바람이 닿지 않아 늘 등에 땀이 찼다. 자리 배치도 사람 취급이라면, 나는 이 팀에서 사람이 아니었다. 입사 3년 차, 이도현. 스물일곱. 이 나이대 남자들이 흔히 갖는다는 자신감이니 패기니 하는 것들은, 이 회사에 들어온 첫 달부터 팀장 박태준의 손아귀에서 서서히 갈려나가 지금은 흔적조차 남지 않은 상태였다. 입사 첫날, 나는 어깨를 펴고 걸었다. 입사 석 달째, 나는 눈을 마주치지 않는 법을 배웠다. 입사 3년째, 나는 존재 자체를 최소화하는 기술을 완성했다. "이도현 씨, 이걸 기획서라고 낸 거야?" 박태준이 서류를 책상에 탁 소리 나게 내려놓았다. 종이 모서리가 내 손목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팠다. 물리적으로도, 그 외의 것으로도. "클라이언트가 이거 보고 뭐라고 생각하겠어? 우리 회사 수준이 이 정도구나, 이러겠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서류를 다시 집어 들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3일 밤을 새워 만든 기획서였다. 하지만 그런 걸 말해봤자 돌아오는 대답은 정해져 있었다. "죄송합니다." "죄송하면 다야? 씨발, 죄송하다고 하면 매출이 오르냐고." 박태준은 정수리가 훤히 드러나는 대머리를 가리기 위해 옆머리를 길게 넘겨 붙이고 다니는 남자였는데, 그 콤플렉스를 감추려는 노력이 우스울 정도로 표가 났으면서도 정작 본인은 절대 인정하지 않았다. 팀원들끼리는 그 머리를 두고 몰래 '3대 7 지도'라고 불렀다. 물론 본인 앞에서는 절대 그런 말을 꺼낼 사람이 없었다. 그리고 그 화풀이의 대부분은 항상 나에게로 향했다. 팀 회식 자리에서도, 클라이언트 미팅 준비 중에도, 심지어 점심시간 메뉴를 정할 때조차 그는 나를 찐따라고 불렀다. "야, 찐따. 넌 뭐 먹을래?" "저는... 아무거나 괜찮습니다." "봐라, 이런 자세로 어떻게 클라이언트를 만족시키냐. 매사에 이런 식이야." 그 말을 들을 때마다 나는 웃어야 할지 화를 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아 그냥 조용히 아무거나 시켰다. 국밥이든 짜장면이든, 맛을 느낀 적이 없었다. 씹고 삼키는 행위만 반복했을 뿐이었다. 불운은 성실함을 배신했다. 나는 늦게까지 남아 야근을 했고, 주말에도 자료를 정리했으며, 실수를 줄이기 위해 매일 체크리스트를 만들었다. 엑셀 파일 안에는 '오늘 확인할 것' 목록이 매일 갱신되었고, 그 목록의 항목 수는 시간이 갈수록 늘어났다. 그럼에도 실적은 항상 최하위였고, 회의 시간마다 내 이름이 가장 먼저 호명되어 질타를 받았다. "이번 달 이도현 씨 실적, 팀 평균의 절반도 안 되네." "저번 달 이도현 씨가 담당한 건, 클라이언트가 재계약 안 한다고 했잖아." "이도현 씨는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같은 자리에서, 같은 사람의 이름이, 같은 표정으로 반복해서 불려 나왔다. 동료들은 내 눈치를 보며 슬금슬금 자리를 피했고, 나는 점점 사무실 안에서 존재감 없는 벽지 같은 사람이 되어갔다. 인사를 건네도 대답이 늦게 돌아왔고, 회의 자료를 나눠줄 때도 내 몫은 항상 마지막에 배분되었다. 마치 내가 거기 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순간순간 잊어버리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화요일 오후, 박태준은 나를 회의실로 불렀다.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부터 뭔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평소 같으면 화를 내며 서류를 던지던 그가, 이번에는 조용히 앉아 있었다. 그 침묵이 오히려 더 불길했다. "이도현 씨, 이번 분기 실적 평가 결과 나왔는데." 그는 서류를 내밀며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손끝으로 서류 모서리를 정렬하는 동작이 유난히 느렸다. "팀 재편 대상이야. 정리해고 명단에 올랐어." 나는 순간 귀가 먹먹해지는 걸 느꼈다.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회의실 에어컨 소리가 갑자기 크게 들리기 시작했고, 형광등이 지나치게 밝게 느껴졌다. "제가... 왜죠?" "성과가 없잖아. 3년 동안 뭐 했어?" "저는 최선을 다했습니다." "최선을 다한 결과가 이거야?" 그가 서류를 손끝으로 툭 쳤다. 종이가 책상 위에서 미끄러져 내 쪽으로 살짝 밀려왔다. "오늘 짐 정리하고 나가." 더 이상의 대화는 없었다.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회의실 문을 열고 나갔고, 나는 홀로 남아 서류를 내려다보았다. 종이 위에 적힌 숫자들이 흐릿해졌다가 다시 선명해졌다가를 반복했다. 그날 오후, 나는 박스 하나에 3년간의 흔적을 쑤셔 넣었다. 책상 서랍 속 다이어리, 명함꽂이, 누군가에게 받은 다이어리형 텀블러, 3년 전 신입 연수 때 받은 볼펜 세트. 하나씩 박스에 담을 때마다 그 물건들이 낯설게 느껴졌다. 이게 내 3년이었나. 이 정도가. 박스를 들고 회사 정문을 나서는데, 등 뒤에서 동료들이 수군거리는 소리가 들렸지만 돌아보지 않았다. 누가 뭐라고 하는지 궁금하지도 않았다. 조상신이 버린 듯한 표정으로 지하철역까지 걸어가는 내내, 머릿속에는 딱 하나의 질문만이 맴돌았다. 이제 나는 뭘 해야 하나. 지하철 안에서도, 환승 통로를 걸으면서도, 그 질문은 사라지지 않고 계속 따라붙었다. 사람들은 저마다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무표정하게 서 있었고, 나는 그 무리 속에서 유독 초라한 몰골로 서 있었다. 박스 옆면이 눌려 살짝 찢어져 있었다. 그것도 오늘의 나와 참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취방에 도착해서도 한동안 멍하니 벽만 바라보고 있었다. 박스는 현관 앞에 그대로 내려놓은 채였다. 정리할 힘도, 정리할 의욕도 남아 있지 않았다. 통장 잔액은 1,247,300원. 월세와 카드값을 빼면 두 달을 버티기도 힘든 액수였다. 스마트폰 뱅킹 앱을 열어 그 숫자를 몇 번이나 다시 확인했다. 새로 고침을 눌러도 숫자는 바뀌지 않았다. 당연했다. 잔액이 저절로 늘어날 리는 없으니까. 뭐라도 해야 했다. 뭐라도. 이력서 양식을 열어봤다가 닫았다. 3년의 경력을 어떻게 포장해야 할지 감이 오지 않았다. '정리해고'라는 항목을 이력서에 어떻게 써야 하나, 그런 생각을 하다가 화면을 꺼버렸다. 그날 밤, 나는 습관처럼 침대에 누워 스마트폰을 켰다. 손가락이 알아서 던전배달 라이브 앱을 열었다. 요즘 유행하는 플랫폼이었다. 각성한 탐험자들이 던전에 들어가 몬스터를 잡고 아이템을 수거해 실시간으로 방송하는, 그야말로 새로운 시대의 돈벌이였다. 인기 스트리머들은 한 번의 던전 클리어로 수천만 원을 벌었다는 기사도 종종 떴다. [속보] 20대 신인 탐험자, 첫 던전 클리어로 3천만 원 획득 [커뮤니티] 던전배달 상위 랭커 연봉 추정치 화제 [뉴스] "탐험자 등록 인구 100만 명 돌파, 새로운 직업군으로 자리매김" 기사 제목들을 스크롤하면서도 별생각이 없었다. 나와는 상관없는 세상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애초에 각성이라는 건 아무나 할 수 있는 게 아니었고, 나 같은 사람이 던전에 들어간다는 건 상상도 해본 적 없는 일이었다. 랜덤으로 재생된 방송 하나가 화면에 떴다. 채널명 '새벽별'. 작은 던전 입구 앞에서 초보자용 가죽 방어구를 입은 여자가 카메라를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안녕하세요! 새벽별입니다! 오늘도 저랑 같이 초보 던전 가실 분들, 채팅창에 하이 찍어주세요!" 목소리가 밝았다. 지나치게 밝았다. 던전 안에서 슬라임 하나에 걸려 자빠지고, 몬스터 대신 자기 무기에 발을 찍고, 함정에 걸려 온몸이 진흙 범벅이 되어도 그녀는 깔깔 웃으며 다시 일어났다. "괜찮아요! 다치는 것도 방송의 일부니까요!" 채팅창이 빠르게 올라갔다. [시청자1] ㅋㅋㅋㅋ 또 넘어졌다 [시청자2] 새벽별님 오늘도 살아있으시네요 [시청자3] 저거 보고 있으면 왜 위로가 되지 [시청자4] 나만 힘든 게 아니구나 싶음 나는 그 모습을 한 시간 넘게 멍하니 보고 있었다. 그녀가 넘어질 때마다, 나도 모르게 화면 속에서 같이 자빠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녀가 웃으며 일어나는 걸 볼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조금씩 데워지는 느낌이었다. 뭔가, 이상하게 위로가 됐다. 실패해도 웃을 수 있다는 것. 넘어져도 다시 일어난다는 것. 그게 지금 내가 가장 필요로 하는 감정이라는 걸, 그 순간 처음으로 깨달았다. 방송이 끝나갈 무렵, 그녀가 화면을 향해 마지막 인사를 건넸다. "오늘도 시청해주셔서 감사합니다! 내일도 새벽별과 함께, 넘어져도 웃으며 다시 일어나는 하루 보내세요!" 화면이 꺼졌다. 방 안은 다시 어둠과 침묵으로 가득 찼다. 나는 스마트폰을 손에 쥔 채 천장을 바라보았다. 3년간 쌓아온 것들이 하루아침에 무너졌는데, 이상하게도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져 있었다. 탐험자 등록 안내 페이지를 열었다. 초기 각성 검사비, 장비 대여료, 초보자 보험료. 항목마다 숫자가 적혀 있었고, 그 숫자들을 다 합치면 통장에 남은 돈의 절반이 넘었다. 위험한 도박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나에게 남은 다른 선택지가 있었나 자문해봤을 때, 답은 없었다. 그날 밤 나는 결심했다. 남은 돈을 전부 걸고, 탐험자 등록을 하기로. 등록 버튼 위에 손가락을 올려놓은 채, 나는 한참을 망설였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이 버튼 하나가 내 인생을 어디로 데려갈지, 그 누구도 알 수 없었다. 나는 아직 몰랐다. 이 결심이 내 인생을 통째로 뒤집어놓을 것이라는 사실을.
첫 화입니다 목록 다음화 ›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