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7년 수련, 첫날 들켰다

2화

그날 밤, 나는 좀처럼 잠들지 못했다. 천장을 노려보고 있었지만, 눈에 들어오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강철수의 얼굴이 자꾸 눈앞에 어른거렸다. 비웃는 입꼬리, 낄낄거리는 웃음소리, 그 뒤로 겹쳐지는 박창수와 석두식의 얼굴까지. 그리고 그보다 더 오래된 장면이, 마치 필름처럼 겹쳐 재생됐다. 어릴 적 화장실 구석에서 웅크리고 앉아 울던 내 모습이었다. 그때 나는 문을 잠그고, 발소리가 멀어질 때까지 숨소리조차 죽이고 있었다.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다르다.' 스스로에게 되뇌었다. 그러나 마음 한구석은 여전히 그 시절에 붙박혀 있었다. 못으로 고정한 것처럼, 아무리 시간이 지나도 떨어지지 않는 자국 같았다. 몸을 뒤척이다 눈을 감으니, 지리산의 풍경이 떠올랐다. 그건 단순한 회상이 아니었다. 계곡물 소리가 실제로 귓가에 울렸고, 젖은 흙냄새가 코끝을 스쳤다. 마치 그 순간으로 몸이 통째로 옮겨진 것 같은, 선명한 감각이었다. --- 여덟 살, 처음 스승님을 만난 날. 계곡 옆 오두막에서, 부스스한 머리에 낡은 개량 한복을 걸친 남자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허리춤엔 표주박이 하나 매달려 있었고, 신발은 짝이 맞지 않았다. "너, 몸이 왜 이래." 첫마디부터 반말이었다. 나는 그때 뭐라고 대답도 못 하고, 그저 눈만 껌뻑였다. "기가 흐르지를 못하네. 이거 완전히 막혔구먼." 스승님은 내 손목을 잡고 몇 번 짚어보더니, 혀를 찼다. "이대로 자라면 서른도 못 넘기고 골골대다 갈 놈이구먼." 그 말이 얼마나 무섭게 들렸는지, 지금도 생생하다. 그날부터 매일이 지옥 같은 훈련이었다. 새벽마다 계곡물에 몸을 담그고, 정해진 자세로 몇 시간씩 서 있어야 했다. 물은 살을 에듯 차가웠고, 처음 몇 달은 입술이 새파랗게 질려 이가 딱딱 부딪혔다. 숨쉬는 법을 다시 배우는 것부터 시작이었다. "숨을 배로 쉬어라. 가슴으로 쉬면 그건 짐승도 하는 짓이다." 스승님은 그렇게 말하면서도, 본인은 온종일 나무 그늘에 누워 낮잠을 잤다. 코까지 골면서 자는 걸 보고 있으면, 억울함이 목까지 차올랐다. "스승님, 저는 이렇게 힘든데 스승님은 왜 안 하십니까." 한번은 억울해서 물었다. 스승님이 눈도 뜨지 않고 대답했다. "나는 이미 다 했으니까." "그게 무슨···" "넌 아직 시작도 안 했다는 뜻이다." 말은 얄궂었지만, 그 나태함 속에서도 가르침은 정확했다. 청소는 죽어도 안 하면서, 기 순환의 원리를 설명할 때는 한 치의 오차도 없었다. 어느 날은 낮잠 자다가도 내가 자세를 틀리면 눈도 뜨지 않고 "왼발, 오른발 순서다"라고 정확히 짚어냈다. 그게 신기해서 몇 번이나 시험해봤지만, 매번 틀린 적이 없었다. 3년째 되던 해, 처음으로 점혈을 배웠다. 손끝으로 상대의 기맥을 짚어 순간적으로 움직임을 막는 기술이었다. 스승님이 직접 시범을 보였다. 손가락 하나가 어깨를 스치자, 나는 그대로 통나무처럼 굳어버렸다. 숨은 쉬어지는데, 팔다리가 내 것이 아닌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이게··· 뭡니까."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이게 점혈이다. 알겠으면 다시 서봐라." 그 뒤로 몇 달 동안, 나는 스승님의 손가락 하나에 수십 번씩 굳어버렸다. 분해서 울기도 하고, 이 악물고 다시 서기도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부터, 굳어버리는 시간이 조금씩 짧아지기 시작했다. 5년째, 호신술을 익혔다. 상대의 힘을 그대로 받는 게 아니라, 흘리고 비틀어 무력화하는 법. 스승님은 늘 강조했다. "힘을 겨루려 들지 마라. 흐름을 읽어라." 말은 쉬웠지만, 몸으로 익히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다. 그 말이 몸에 새겨질 때까지, 나는 매일 넘어지고 또 넘어졌다. 땅바닥에 등을 찧고, 흙을 씹고, 코피를 흘리면서도 다시 일어섰다. 스승님은 그런 나를 보며 웃기만 했다. "아프냐. 그게 정상이다." 7년째, 마지막 날. 스승님이 표주박의 물을 내게 건넸다. 물은 차가웠고, 손끝이 저릴 정도로 맑았다. "이제 됐다. 서울로 돌아가라." "정말요?" 믿기지 않아서 몇 번이나 되물었던 것 같다. "단, 명심해라." 그때 스승님의 눈빛이 평소와 달랐다. 낮잠 자던 그 게으른 눈빛이 아니라, 진지함이 서린, 처음 보는 표정이었다. "과신은 독이다. 네가 강해졌다는 걸 잊는 순간, 세상은 너를 다시 약하게 만들 것이다. 힘은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숨기는 것이다." 그 말을 하고 나서, 스승님은 다시 원래의 게으른 표정으로 돌아가 하품을 했다. "자, 이제 가라. 낮잠 시간이다." 그게 마지막이었다. --- 눈을 떴다. 방 안은 조용했다. 창밖은 아직 어둠이 짙었고, 시계는 새벽 세 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온몸이 땀에 젖어 있었다. 이불을 걷어차고 일어나 앉으니, 심장이 아직도 세차게 뛰고 있었다. '스승님···' 그리움과 동시에, 그 경고가 가슴을 무겁게 눌렀다. 나는 더 이상 약골이 아니다. 그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손을 들어 손끝을 바라봤다. 평범한 손가락 같았지만, 그 안에 무엇이 숨어 있는지는 나만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걸 아무에게도 보여줄 수 없다는 게, 얼마나 답답한 일인지도 함께 깨달았다. 숨기는 것과 참는 것. 그 두 단어가 밤새 머릿속을 맴돌았다. 다음 날 등교했을 때, 강철수는 또다시 나를 걸고넘어졌다. "어이, 허약이. 오늘도 잘 부탁해." 그 말투는 언제나 똑같았다. 반가운 척, 친한 척, 그러나 그 안엔 명백한 조롱이 섞여 있었다. 박창수가 옆에서 낄낄거렸다. "오늘도 삥 뜯길 표정이네." 석두식은 말없이 내 가방을 뒤졌다. 지퍼를 열고, 필통을 흔들고, 노트를 펼쳐 뒤적였다. "뭐 재밌는 거 없나." 주먹을 꽉 쥐었다. 손끝에 기가 모이는 게 느껴졌다. 마치 오래 눌러둔 물이 손끝으로 몰려드는 것 같았다. 단 한 방이면, 저 셋 다 바닥에 눕힐 수 있었다. 석두식의 손목을 꺾고, 박창수의 다리를 걸고, 강철수의 턱을 올려칠 상상이 머릿속에서 순식간에 지나갔다. 그러나 나는 손을 풀었다. '참아라. 지금은 아니다.' 스승님의 목소리가 귓가에 겹쳐 울렸다. 안혜원이 다가와 석두식의 손을 잡아챘다. 동작이 거침없었다. "남의 가방 함부로 만지지 마." "어쭈, 또 너냐." 강철수가 눈을 부라렸지만, 안혜원은 물러서지 않았다. 그 눈빛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선생님한테 다 말할 거야." 결국 셋은 투덜거리며 자리를 떴다. 강철수가 마지막으로 나를 한 번 흘겨보고, 박창수는 괜히 발끝으로 바닥을 걷어차며 걸어갔다. 안혜원이 내 쪽을 보며 말했다. "너 왜 가만있어? 맞서 싸울 수도 있잖아." 순간 말이 나오지 않았다. '싸울 수 있냐고? 너무 잘 싸워서 문제야.' 속으로만 대답하고, 겉으로는 그냥 웃었다. "괜찮아. 신경 쓰지 마." 안혜원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나를 쳐다보다가, 결국 자리로 돌아갔다. 자리에 앉으면서도 몇 번이나 나를 돌아보는 게 느껴졌다. 그 뒷모습을 보며 나는 씁쓸함을 느꼈다. 스승님의 가르침을 지키는 것과, 부당함을 참는 것 사이에서 나는 계속 흔들리고 있었다. 힘을 숨기라는 말이, 이렇게 무겁게 다가올 줄은 몰랐다. 1교시가 시작되기 전, 창밖에서 이상한 진동이 느껴졌다. 처음엔 작은 떨림이었다. 책상 위의 필통이 살짝 흔들렸고, 나는 그저 누가 발을 떨고 있는 줄 알았다. '뭐지.' 주변 아이들도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야, 지진이야?" "에이, 무슨 지진이야, 그냥 트럭 지나가나 보지." 김민재 선생님이 교실로 들어오며 말했다. "자, 오늘 첫 수업은 국어입니다. 다들 교과서 펴세요." 선생님의 목소리는 평온했다. 그러나 진동은 점점 더 강해지고 있었다. 칠판에 걸린 분필이 굴러떨어지고, 책상 위 물병이 조금씩 미끄러졌다. 칠판에 걸린 시계가 흔들리다 떨어졌다. 쨍그랑-! 교실 안이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됐다. 아이들이 소리를 지르며 책상 밑으로 숨었다. 누군가는 울음을 터뜨렸고, 누군가는 문 쪽으로 달려가다 넘어졌다. "선생님, 지진이에요!" "조용히, 조용히 해!" 그리고 그 순간, 나는 무언가 이상한 걸 느꼈다. 단순한 지진이 아니었다. 공기 자체가 이질적으로 뒤틀리고 있었다. 피부에 닿는 감각이, 마치 물속에 있는 것처럼 무겁고 낯설었다. 마치 세상의 규칙이 바뀌는 것 같은, 설명할 수 없는 감각이었다. '이건··· 뭐지.' 등줄기의 털이 곤두섰다. 지리산에서도 느껴본 적 없는, 낯설고 불길한 기운이었다. 심장이 조여왔다. 그리고 그 불길함은, 시작에 불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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