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짐승이 떨어져 내리는 그 짧은 순간, 나는 아무 생각도 하지 못했다.
다만 몸이 먼저 반응했다.
오른손을 앞으로 뻗으며, 단전에 모아둔 기운을 그대로 쏟아냈다.
퍼억-!
짐승의 몸통에 손바닥이 닿는 순간, 뭔가 터지는 듯한 느낌이 팔을 타고 전해졌다.
짐승의 거구가 그대로 뒤로 튕겨 나갔다.
쿵-!
벽에 부딪혀 부서진 파편들이 사방으로 흩날렸다.
복도가 순간 정적에 잠겼다.
아무도 소리를 내지 못했다.
먼지가 자욱하게 피어올랐다가 서서히 가라앉았다.
그 사이로 짐승의 그르렁거리는 숨소리만이 낮게 깔려 있었다.
"···방금 뭐야."
누군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 말을 시작으로, 복도 이곳저곳에서 웅성거림이 새어 나왔다.
"쟤가 저걸 손으로···"
"말도 안 돼, 저 무게가 얼만데."
나는 그 소리들을 흘려들으며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힘을 쓴 것도 놀랍지만, 그보다 더 놀란 건 그 힘이 이렇게까지 강할 줄은 몰랐다는 사실이었다.
'스승님이 말한 것 이상이었나.'
손바닥에는 아직도 짐승의 두꺼운 가죽을 밀어낸 감각이 남아 있었다.
마치 두꺼운 고무판을 후려친 것 같은, 그러나 그 안쪽에서 뭔가 부러지는 듯한 진동까지 함께 전해진 그 감각.
'생각보다 훨씬 단단했어.'
만약 조금이라도 늦었다면, 저 발톱은 안혜원이나 그 여학생의 목을 그대로 갈랐을 것이다.
그 상상만으로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짐승이 벽에서 몸을 일으켰다.
부서진 벽 부스러기들이 놈의 등에서 우수수 떨어져 내렸다.
그르렁거리는 소리가 이전보다 낮고 위험하게 들렸다.
분명히 화가 나 있었다.
붉은 눈이 이글거리며 다시 나를 향했다.
그 눈빛에는 이제 단순한 포식자의 굶주림이 아니라, 뭔가 다른 감정이 섞여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마치 처음으로 저항을 만난 짐승이 자존심을 다친 것처럼.
'한 번으로 안 끝나겠구나.'
그때, 눈앞에 다시 반투명한 창이 떠올랐다.
띠링-
[경고: 던전 몬스터의 적개심이 상승했습니다.]
[개체 등급: E- → E]
'등급이 올라간다고?'
이런 식으로 등급이 실시간으로 오르는 경우가 있다는 건 들어본 적도 없었다.
스승님도 이런 케이스는 언급한 적이 없었다.
'설마 내가 때릴 때마다 더 강해지는 건가.'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짐승이 다시 도약 준비를 하고 있었다.
앞다리의 근육이 부풀어 오르는 게 눈에 보일 정도였다.
"진아!"
안혜원이 여전히 뒤에서 나를 부르고 있었다.
"위험해, 물러나!"
그 목소리에는 울음이 섞여 있었다.
나를 걱정하는 건지, 상황이 무서워서 그런 건지 구분이 되지 않을 만큼 다급했다.
그러나 물러날 곳이 없었다.
짐승과 나 사이의 거리는 겨우 세 걸음.
한 번 물러서면, 안혜원과 여학생이 표적이 될 것이었다.
'내가 물러서는 순간, 저 두 사람이 죽는다.'
그 생각이 오히려 다리에 힘을 실어주었다.
강철수 무리가 있는 복도 끝에서도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다.
박창수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저거 진짜 사람이야?"
석두식은 입을 다물지 못한 채 서 있었다.
침을 삼키는 소리가 여기까지 들릴 정도로 조용했다.
강철수의 표정은 더 이상 조롱이 아니었다.
뭔가 다른 감정, 당혹스러움 같은 것이 서려 있었다.
평소라면 나를 향해 비웃음을 날렸을 그 얼굴이, 지금은 그저 얼어붙어 있었다.
'그렇게 자신만만하더니.'
이런 상황에서도 그런 생각이 스치는 걸 보면, 나도 어지간히 뒤틀린 인간인 모양이었다.
'이제 와서 숨기고 뭐고 없다.'
스승님의 경고를 지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능력을 드러내지 말라던 그 당부가, 지금 이 순간만큼은 사치스러운 말처럼 느껴졌다.
선택의 여지가 사라진 순간,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몸은 여전히 긴장으로 팽팽했지만, 머릿속은 오히려 투명해졌다.
짐승이 다시 도약했다.
이번엔 훨씬 빠른 속도였다.
등급이 올랐다는 시스템 알림이 사실이라면, 힘도 그만큼 강해졌을 것이었다.
공기가 갈라지는 듯한 파공음이 귓가를 스쳤다.
나는 자세를 낮추며 두 손을 모았다.
스승님이 가르쳐준 마지막 기술, 아직 한 번도 실전에서 써본 적 없는 것이었다.
수련장에서 헛손질만 수백 번을 반복했던 그 기술.
'그때는 실패해도 다시 하면 됐지만.'
지금은 실패의 대가가 다르다.
'실패하면 어떻게 되지.'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다.
짐승의 발톱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날카롭게 벼려진 다섯 개의 발톱이 허공을 그으며 내려왔다.
동시에 어린 시절의 기억이 다시 스쳤다.
화장실 구석, 짓눌리던 몸, 아무도 도와주지 않던 순간.
곰팡이 냄새가 나는 타일 바닥, 웃음소리, 발길질.
'또 그때처럼···'
다리가 다시 굳으려는 걸 느꼈다.
무릎 관절이 마치 못으로 고정된 것처럼 움직이지 않았다.
'안 돼, 지금은 아니야.'
이를 악물고 버텼다.
턱 근육이 딱딱하게 뭉치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트라우마가 몸을 잡아끄는 순간에도, 손끝의 기운만은 놓지 않았다.
그것만이 유일하게 내 의지대로 움직이는 부분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진아!"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이 목소리를··· 알고 있었다.
부산으로 이사 간 그 아이의 목소리와 닮아있었다.
초등학교 시절, 유일하게 내 편이 되어줬던 그 목소리.
그러나 지금 이 자리에 있을 리 없는 목소리였다.
'왜 지금, 이 목소리가···'
머릿속이 순간 뒤엉켰다.
착각인지, 환청인지, 그마저도 구분할 수 없었다.
'아니, 지금은 그게 중요한 게 아니야.'
짐승의 발톱이 눈앞까지 육박했다.
손끝에 모인 기운이 임계점에 다다랐다.
손바닥 안쪽이 뜨겁게 부풀어 오르는 느낌, 마치 곧 터질 듯한 풍선을 쥐고 있는 것 같았다.
터뜨려야 할 순간이었다.
그러나 몸은 여전히 절반쯤 굳어 있었다.
트라우마와 실전의 절박함이 팽팽하게 맞서고 있었다.
살얼음판 같은 그 균형 속에서, 시간이 늘어지듯 느리게 흘렀다.
'움직여···'
명령을 내려도 몸이 듣지 않았다.
수십 년을 짓눌러온 공포가 이렇게 쉽게 풀릴 리 없었다.
짐승의 발톱 끝이, 이제 정말 몇 센티미터도 남지 않았다.
안혜원의 비명 같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진아, 제발!!"
그 절박한 목소리가 마치 화장실 문을 두드리던 그때의 소리처럼, 오래된 기억과 겹쳐 울렸다.
그리고 그 순간, 억눌려 있던 무언가가, 마침내 통제를 벗어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