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카드 뽑았더니 인생역전이라니

4화

등록 절차가 끝나고, 나는 정식으로 1성 모험가가 되었다. 증명서에 적힌 내 이름을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강태호, 1성 모험가. 비록 아직은 최하위 성급이었지만, 그 종이 한 장이 나를 완전히 다른 세계로 밀어 넣은 것 같았다. 손끝으로 증명서 표면을 몇 번이나 쓸어봤다. 매끈한 재질에 새겨진 각인이 은은하게 빛을 냈다. 이게 진짜구나. "1성부터 시작하는 건 다들 똑같아요." 김중호 씨가 서류를 정리하며 말했다. "성급은 던전 클리어 실적이랑 카드 등급, 활용도로 올라가는 거니까요. 학생 카드는 C랭크니까 잘 키우면 금방 올라갈 수도 있어요." "업동이의 능력은 어떻게 알아볼 수 있나요?" "직접 부딪쳐 보는 수밖에 없어요. 소환해서 이것저것 시켜보시든가, 아니면 간단한 필드에서 시험을 해보시든가." "혹시 참고할 만한 자료라도 있을까요? 비슷한 카드 사례라든지." 김중호 씨가 고개를 저었다. "C랭크 자체가 워낙 드물어서 자료가 거의 없어요. 그리고 카드마다 개성이 워낙 강해서, 사례가 있어도 큰 도움은 안 될 거예요." 나는 그 말을 듣고, 곧바로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근처 소규모 훈련장으로 향했다. 모험가 길드에서 초보자를 위해 운영하는 무료 필드였다. 넓은 공터에 표적판 몇 개와 낡은 장애물이 듬성듬성 놓여 있었다. 관리하는 직원 한 명이 구석에서 하품을 하고 있을 뿐, 사람은 거의 없었다. 업동이를 소환하고, 나는 앞에 놓인 표적판을 가리키며 말했다. "저기다 뭐든 좀 해볼래?" 업동이는 표적판을 잠시 바라봤다. 그리고는 그냥 그 자리에 가만히 서 있었다. "업동아?" "···안 되는데." "어?" "딱히 하고 싶은 게 없어." 나는 순간 말이 막혔다. "그, 그래도 뭐라도 시도는 해봐야지." "싫으면 안 해." 그녀는 팔짱을 끼고 다시 표적판을 바라봤다.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그 태도만큼은 확고했다. 나는 어이가 없어서 한숨을 내쉬었다. '이게 뭐야, 능력을 알아보려고 해도 협조를 안 해주네.' 그날 이후로도 나는 매일같이 훈련장을 찾았다. 알바 시간을 쪼개고, 잠을 줄여서라도 시간을 냈다. "오늘은 저 통나무 좀 밀어볼까?" "싫어." "그럼 저 돌덩이는?" "관심 없어." "진짜 뭐든 좋아. 조금이라도 힘써보면 안 될까?" 업동이는 대답 없이 그냥 팔짱을 낀 채 하늘을 올려다봤다. 구름이 흘러가는 걸 보는 게 표적판보다 훨씬 재미있어 보였다. 며칠이 지나도 상황은 비슷했다. 업동이는 특정 상황에서만 미묘하게 다른 반응을 보였는데, 그게 정확히 어떤 능력인지는 도무지 파악되지 않았다. 한번은 갑자기 바람이 세게 불었을 때 눈을 살짝 찡그리는 걸 봤고, 또 한번은 훈련장 근처에서 작은 벌레가 날아왔을 때 손을 휙 저어 쫓아내는 동작이 유난히 빨랐다. 그게 능력인지, 그냥 반사적인 행동인지 구분할 수가 없었다. "공격 마법 같은 건 없어?" "몰라." "그럼 방어는?" "몰라." "뭘 할 수 있는지 알기는 해?" "몰라." 대화가 매번 이런 식으로 끝났다. "업동아, 너 진짜 아무것도 몰라?" "몰라." "그럼 뭘 좋아하는지는 알아?" 업동이가 처음으로 뭔가 생각하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자는 거." 나는 헛웃음이 나왔다. '능력을 물어봤는데 취미가 나오네.' 학교에서는 여전히 아무도 내 변화를 알지 못했다. 나는 일부러 조용히 지냈다. 등록증을 자랑할 생각도 없었고, 아직 실적도 없는 상태에서 떠벌리는 건 오히려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가방 안쪽 지갑 속에 증명서를 넣어 다니면서도, 꺼내 볼 일은 없었다. 하지만 그 조용함이 오래가지는 못했다. "야, 다들 들었어?" 어느 날 아침, 교실에 들어서자마자 서준영이 흥분한 얼굴로 다가왔다. "오태식이 모험가 등록했대." "뭐?" 나는 순간 심장이 덜컥 내려앉는 걸 느꼈다. "진짜야?" "응, 남상현 선배 통해서 좋은 팩 소개받았다더라. 벌써 D랭크 카드 뽑았다고 소문났어." 이동하가 옆에서 팔짱을 끼고 말했다. "D랭크면 나쁘지 않은 시작이네." 교실 전체가 그 소식으로 들썩였다. 오태식은 특유의 여유로운 표정으로 자기 자리에 앉아 있었다. 주변에서 애들이 몰려들어 이것저것 물어보고 있었다. "태식아, 던전은 언제 처음 가?" "다음 주 정도 계획 중이야." "카메라 팀도 같이 가는 거 아냐? 요즘 유튜브에 모험가 브이로그 올리면 조회수 잘 나온다던데." 오태식은 그 말에 씨익 웃으며 대답했다. "그럼 뭐, 좋은 그림 나오면 올려야지." 주변에서 웃음이 터졌다. "근데 카드는 어떻게 생겼어? 보여줘 봐." 누군가가 물었다. 오태식이 주머니에서 카드를 꺼내 흔들어 보였다. 빛이 은은하게 도는 카드였다. 애들이 우와 하는 소리를 내며 카드를 구경했다. 나는 자리에 앉아 그 광경을 조용히 지켜봤다. 마음속에서 뭔가 조급함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나는 벌써 등록도 했고, 게다가 C랭크인데.' 하지만 그 사실을 이 자리에서 말할 수는 없었다. 말하는 순간, 온갖 관심이 몰릴 게 뻔했다. 그리고 아직 아무런 실적도 없이 카드 등급만으로 관심을 받는 건 위험한 일이었다. 실제로 뭘 할 수 있는지도 모르는 카드였으니까. 수업 시간에도 집중이 잘 되지 않았다. 선생님 목소리가 멀게 들리고, 자꾸 오태식 쪽으로 시선이 갔다. 저 여유로운 표정이 신경에 거슬렸다. 점심시간, 이동하와 서준영이 내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태호야, 너는 요즘 뭐 하고 지내? 알바 계속 하는 거야?" 나는 잠시 고민했다. 이 둘한테는 말해도 될까. 주변을 한번 슬쩍 둘러봤다. 다행히 가까이에 다른 애들은 없었다. "사실은." 나는 목소리를 낮췄다. "나 모험가 등록했어." 서준영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뭐?!!! 언제?!" "조용히 해." 나는 재빨리 그의 입을 막았다. "아직 아무한테도 말 안 했어. 카드도 좀 특이한 거라서, 조심스럽게 하려고." 이동하가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카드가 뭔데?" "C랭크 카드야." "뭐?!!" 서준영이 또 소리를 지르려는 걸, 나는 다시 손으로 재빨리 막았다. "조용히 좀." "C, C랭크가 학교에서, 아니 우리 나이대 초보 모험가한테 나오는 게 흔한 일이야?" 이동하가 놀란 얼굴로 물었다. "안 흔해. 그래서 조심스럽다니까." 서준영이 손을 떼고도 한참 동안 나를 빤히 바라봤다. "야, 그럼 너 진짜 조용히 오태식보다 더 좋은 카드 갖고 있는 거야?" "등급만 놓고 보면 그런데." 나는 최근 며칠간의 시행착오를 두 사람에게 대략 설명해 줬다. 업동이가 무슨 능력을 가지고 있는지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도. "소환해서 이것저것 시켜봐도 다 싫다고 하고, 뭘 물어봐도 모른다고만 해." 서준영이 팔짱을 끼고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그럼 우리가 도와줄게. 필드 가서 같이 테스트해보자." "너희가?" "어, 우리도 궁금하잖아. C랭크 카드가 뭘 할 수 있는지." 이동하도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오태식이 저러고 있는데, 너도 뭔가 빨리 방향을 잡아야 하지 않을까." 그 말이 맞았다. 오태식이 먼저 모험가로 등록을 선언한 이상, 학교 내 시선은 자연스럽게 그쪽으로 몰릴 것이다. 내가 아무리 C랭크 카드를 가지고 있어도, 그걸 제대로 증명하지 못하면 그냥 '두 번째로 등록한 애' 정도로만 기억될 뿐이었다. "그래, 같이 가자." 나는 결심을 굳혔다. 더 이상 시간을 끌 이유가 없었다. "이번 주말 어때?" 서준영이 물었다. "좋아. 근처에 초급 던전 하나 있다고 들었어. 거기서 시험해보자." "초급 던전이면 위험하지 않을까?" 이동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초급이면 그렇게 위험하지는 않대. 관리도 잘 되어 있고, 근처에 길드 직원들도 상주하고 있다더라." "그래도 만약을 위해서 준비는 철저히 하자. 나는 회복 포션이라도 좀 사둘게." 서준영이 벌써부터 의욕을 보였다. "고마워, 진짜." 나는 두 사람에게 진심으로 고마움을 느꼈다. 혼자였다면 훨씬 막막했을 일이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길, 나는 문득 뒤를 돌아봤다. 교문 근처에서 남상현이 오태식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게 보였다. 두 사람은 뭔가를 두고 웃고 있었고, 그 시선이 잠깐 이쪽을 향한 것 같았다.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나는 못 본 척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몇 걸음 걷고 나서도 자꾸 뒤가 신경 쓰였다. 저 둘이 무슨 대화를 나누고 있었던 걸까. '설마 벌써 알았나.' 확신할 수는 없었지만, 뭔가 좋지 않은 예감이 스치고 지나갔다. 집에 도착해서도 그 장면이 자꾸 눈앞에 떠올랐다. 남상현의 웃는 얼굴, 그리고 오태식이 흘깃 이쪽을 바라본 그 짧은 순간. 나는 가방 속 증명서를 다시 꺼내 봤다. 강태호, 1성 모험가. 아직 아무것도 증명하지 못한 종이 한 장이었다. 주말까지는 아직 며칠이 남아 있었다. 그 안에 업동이의 능력에 대해 조금이라도 더 알아내야 했다. 그러지 못하면, 이번 주말의 시험은 시작도 하기 전에 의미가 없어질지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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