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카드 뽑았더니 인생역전이라니

5화

토요일 아침, 나는 이동하와 서준영과 함께 홍대입구역 근처 초급 던전 입구로 향했다. 날씨는 흐렸다. 하늘에 구름이 낮게 깔려 있었고, 습기를 머금은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지하철 출구에서 조금 걸어 들어가자, 낯선 구조물이 눈에 들어왔다. "저기다." 이동하가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입구는 생각보다 평범했다. 낡은 지하철역 출입구처럼 보이는 구조물이었고, 그 안쪽으로 은은한 푸른 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주변에는 이미 몇몇 헌터들이 삼삼오오 모여 장비를 점검하고 있었다. "여기가 초급 던전이야?" 서준영이 두리번거리며 물었다. 그는 배낭을 앞뒤로 흔들며 안쪽을 살폈다. 초조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래, 인터넷에서 찾아봤는데 F랭크에서 D랭크 몬스터 정도만 나온대. 초보자한테 딱이라던데." "근데 왜 하필 던전이야. 그냥 밖에서 테스트해도 되잖아." 이동하가 물었다. "밖에서는 소환수 능력을 제대로 확인할 수가 없어. 몬스터 상대로 직접 부딪쳐 봐야 뭘 할 수 있는지 알 수 있으니까." 입구 관리소에서 접수를 마쳤다. 직원이 무심한 얼굴로 우리 신분증과 헌터 등록증을 확인했다. "초급 던전이라도 조심하세요. 가끔 예상보다 몬스터가 많이 나오는 경우가 있으니까." 직원의 말에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때는 그 말이 그저 형식적인 안내라고 생각했다. 우리 셋은 안으로 들어섰다. 던전 내부는 예상보다 넓었다. 돌로 이루어진 통로가 구불구불 이어져 있었고, 벽면에는 은은하게 빛나는 이끼 같은 것이 자라 있었다. 발밑에서는 축축한 흙냄새가 올라왔다. "오, 신기하네. 진짜 게임 던전 같아." 서준영이 벽을 손으로 만지며 감탄했다. "만지지 마. 뭔지도 모르는데." 이동하가 툭 쏘아붙였다. "업동아, 나와." 나는 카드를 꺼내 그녀를 소환했다. 연기처럼 흩어지던 형체가 다시 사람의 모습으로 굳어졌다. 검은 긴 머리, 무표정한 얼굴. 업동이가 던전 통로를 잠깐 둘러보고는, 시큰둥한 얼굴로 말했다. "여긴 또 왜 왔어." "테스트하러 왔어. 뭘 할 수 있는지 알아야 하잖아." "몰라, 그거." "일단 부딪쳐 보고 판단하자." 서준영이 옆에서 지켜보다가 슬쩍 말을 걸었다. "어, 안녕? 업동이 맞지?" 업동이는 그를 흘겨보고는 대답도 하지 않았다. "어, 애가 좀 도전적이네." 서준영이 헛웃음을 지었다. "신경 쓰지 마. 원래 저래." "근데 진짜 궁금한데, 얜 무슨 몬스터야? 카드 등급은 봤어?" 이동하가 물었다. "C랭크였어. 근데 능력치가 이상하게 나와서, 오늘 직접 확인해보려는 거야." 이동하가 앞장서서 통로를 걸어갔다. "저기, 뭔가 있는 것 같은데." 통로 끝, 좁은 방 안에서 슬라임 무리가 꾸물거리고 있었다. 초록빛 반투명한 몸체가 바닥에서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불빛에 비쳐 몸속에 있는 노란 핵 같은 것이 흐릿하게 보였다. "F랭크 슬라임이네. 딱 좋다, 테스트하기." "저거 몇 마리야?" 서준영이 목을 빼고 세어봤다. "세 마리? 아니, 네 마리인가." 나는 업동이를 향해 말했다. "저기 있는 거 좀 상대해볼래?" 업동이는 잠시 슬라임 무리를 바라봤다. 그리고, 정말로 그냥 걸어갔다. 뚜벅뚜벅 그녀는 슬라임 하나를 발로 툭 밀었다. 슬라임은 힘없이 옆으로 밀려났다. "···그게 다야?" "응." "무슨 스킬이나 마법 같은 건 없어?" "없나 봐." 나는 머리가 아파왔다. 이동하와 서준영도 서로 눈치를 주고받으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이거, 진짜 C랭크 맞아?" 서준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카드는 확실히 C랭크였어. 등록할 때도 확인했고." "근데 왜 아무것도 못 해." "그러니까 지금 테스트하는 거잖아." "혹시 스킬을 쓰는 방법을 모르는 거 아니야? 사람도 처음 헌터 되면 스킬 못 쓰잖아." 이동하가 나름 진지하게 물었다. "그럴 수도 있지. 근데 소환수는 보통 본능적으로 능력을 쓴다고 알고 있는데." 슬라임 무리가 서서히 우리를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숫자가 예상보다 많았다. 최소 여섯, 일곱 마리는 되는 것 같았다. "어, 이거 좀 많은데." 이동하가 뒤로 한 발 물러서며 말했다. "방금까지 네 마리였는데." 서준영이 당황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디서 자꾸 나오는 거야?" 슬라임 하나가 서준영에게 달려들었다. "으아악!" 서준영이 놀라서 뒤로 넘어졌다. 슬라임의 몸체가 그의 다리에 부딪혀 튕겨 나갔다. "다치진 않았어?" "괘, 괜찮아. 근데 이거 생각보다 무겁게 부딪히네." 서준영이 엉덩이를 털며 일어났다. 바지에 초록빛 점액이 묻어 있었다. "으, 끈적거려." 나는 초조해졌다. 원래는 간단한 테스트로 끝날 예정이었는데, 슬라임 숫자가 예상보다 많아지면서 상황이 조금씩 위험해지고 있었다. "업동아, 좀 도와줘!" "뭘 해야 하는지 모르는데." 그녀는 여전히 태평한 얼굴로 슬라임 하나를 발로 밀어냈다. 다른 슬라임 두 마리가 그녀를 향해 동시에 달려들었다. 촤아아악! 슬라임의 몸체가 그녀의 몸에 부딪혔다. 하지만 업동이는 미동도 하지 않았다. 마치 벽에 부딪힌 것처럼, 슬라임들이 오히려 뒤로 튕겨 나갔다. "뭐야, 방금 그거." 이동하가 눈을 크게 뜨며 말했다. "다치지 않았어?" "응. 안 아파." 업동이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대답했다. 순간 나는 뭔가를 깨달았다. '맞아, 이 앤 물리 공격에 거의 데미지를 안 받는 건가.' "그럼 방어력은 확실히 있는 거네." 이동하가 조금 안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근데 그거 말곤 아무것도 못 하는 거잖아. 방어만 되면 뭐 해, 공격을 못 하는데." 서준영이 걱정스럽게 덧붙였다. 하지만 확신하기는 아직 일렀다. 슬라임 숫자가 계속 늘어나고 있었다. 방 안 구석에서 또 다른 슬라임 무리가 스며 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바닥 틈새에서 초록빛 점액이 스멀스멀 배어 나왔다. 그 틈으로 새로운 슬라임들이 하나둘 몸을 부풀리며 형태를 갖췄다. "이거, 슬라임 둥지 근처였나 봐." 서준영이 겁먹은 목소리로 말했다. "빨리 나가야 할 것 같은데." "둥지면 저기 안쪽에 핵이 있다는 소린데, 그거 안 부수면 계속 리젠될 텐데." 이동하가 낮게 중얼거렸다. 나는 상황을 살폈다. 슬라임들이 우리를 둘러싸듯 이동하고 있었다. 입구 쪽 통로가 점점 가려지는 게 보였다. 숫자를 셀 수 없을 정도로 늘어난 슬라임들이 통로 벽을 타고 스며 나오는 것처럼 보였다. 꾸물거리는 초록빛 몸체들이 서로 뒤엉키며 조금씩 우리 쪽으로 밀려들었다. "업동아, 저 통로 쪽 슬라임 좀 치워줄 수 있어?" "몰라, 안 해봤어." "일단 해봐!" 나는 다급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이대로 갇히면 정말 위험해질 수도 있었다. 손끝이 차갑게 식는 게 느껴졌다. 등 뒤로 식은땀이 흘러내렸다. 업동이는 잠시 나를 바라봤다. 무표정한 얼굴 속에서, 뭔가 미묘한 감정의 변화가 스치고 지나가는 것 같았다. 그 짧은 순간, 그녀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을 나는 분명히 봤다. 그리고, 그녀가 천천히 통로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벅저벅 발소리마저 평소와 다르게 느껴졌다. 슬라임 무리가 그녀를 향해 일제히 달려들기 시작했다. 촤아아아악ㅡ 여러 개의 몸체가 동시에 그녀에게 부딪혔다. 나는 순간 숨을 멈췄다. "업동아!" 그녀의 몸이 슬라임들에 완전히 뒤덮이는 것처럼 보였다. 초록빛 점액이 그녀의 어깨를, 팔을, 목덜미를 타고 흘러내렸다. "저거 괜찮은 거야?" 이동하가 다급하게 물었다. 나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저 그 자리에서 몸이 굳은 채 바라보고만 있었다. 하지만. 그 순간, 그녀의 발밑에서 뭔가 이상한 기운이 스며 나오기 시작했다. 검은빛도 아니고, 그냥 설명하기 힘든 색깔의 아지랑이 같은 것이었다. 바닥을 타고 서서히 퍼지는 그 기운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꿈틀거리며 위로 솟아올랐다. 나는 눈을 크게 뜬 채 그 광경을 바라봤다. '저게 뭐지.' 이동하와 서준영도 굳은 채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못했다. "저, 저거 마법이야? 아니면 스킬?" 서준영이 목소리를 떨며 물었다.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업동이를 뒤덮은 슬라임들이, 갑자기 하나둘씩 움직임을 멈추기 시작했다. 꾸물거리던 초록빛 몸체들이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그 자리에 굳어버렸다. 그리고. 방 안이 순식간에 조용해졌다. 조금 전까지 들리던 슬라임들의 미끈거리는 움직임 소리도, 서준영의 다급한 숨소리도, 모두 사라진 것 같았다. 나는 그녀의 이름을 다시 부르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입술이 벌어졌지만 아무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 아지랑이 사이로, 업동이의 검은 눈동자가 천천히 나를 향해 돌아왔다. 그 눈빛은, 조금 전과는 확실히 다른 무언가를 담고 있었다. 무표정 속에 감춰져 있던 무언가가, 지금 막 표면으로 떠오르려 하는 것처럼 보였다. 나는 그 눈빛에서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저건... 처음 보는 얼굴이야.' 던전 안의 푸른 빛이 순간 더 짙어진 것 같았다. 그리고 그 빛 속에서, 업동이는 서서히 나를 향해 걸어오기 시작했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