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낙인의 밤, 진심을 쥐다

2화

별궁의 방은 좁고 어두웠다. 창문은 있었으나 밖을 볼 수 있을 만큼 크지 않았고, 침대는 좁았으며, 벽지는 색이 바랬다. 유서윤은 그 좁은 방 안에서 사흘째 갇혀 있었다. 식사는 하루 두 번, 문 아래로 밀어 넣어졌다. 누가 가져다주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저 문틈으로 스르륵 소리가 나면 접시가 들어와 있는 식이었다. 인기척 하나 없이. 마치 유서윤이라는 존재 자체가 이 별궁에서 소리를 내면 안 되는 무언가처럼. '이상해.' 그녀는 생각했다. '분명히 알고 있었는데.' 알고 있었다는 것과 대비할 수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였다. 그녀는 그 사실을 사흘 밤낮으로 곱씹고 있었다. 그녀가 처음 이 기묘한 감각을 느낀 것은 여덟 살 무렵이었다. 정원 계단에서 발을 헛디뎌 넘어지려던 순간, 그녀는 이미 그 장면을 알고 있었다. 넘어질 방향, 손을 짚을 자리, 무릎에 남을 상처의 위치까지도. 심지어 상처에서 피가 몇 방울 떨어질지도 알았다. 세 방울이었다. 그날 이후로 그녀는 자신이 이상한 병에 걸렸다고 생각했다. 유모를 붙잡고 울며 자신이 죽는 것이냐고 물었던 기억이 났다. 유모는 웃으며 아니라고 했지만, 유서윤은 그 웃음이 어딘가 불안했다는 것을 지금도 기억한다. 하지만 병이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이야기 속 한 장면을 미리 읽은 듯한 감각이었다. 정확히는 조각조각 흩어진 장면들이었다. 전체 줄거리가 아니라, 마치 찢겨진 책장을 몇 장 쥐고 있는 것 같은. 앞뒤 문맥도 없이, 순서도 뒤죽박죽으로. 그리고 그녀가 자신이 그 '이야기' 속에서 어떤 역할을 맡고 있는지 깨달은 것은 열두 살, 처음으로 박세라를 만난 날이었다. 박세라가 웃으며 다가와 손을 내밀었을 때, 유서윤은 그 얼굴에서 승리감에 찬 냉소를 보았다. 아직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는데도. 손끝조차 닿지 않았는데도, 유서윤은 그 손을 잡는 순간 자신의 미래가 조금씩 깎여나가는 소리를 들었다. '나는 저 여자의 상대역이구나.' 그때 그녀는 그렇게 확신했다. '그리고 나는 지는 역할이야.' 하지만 그 확신에는 한계가 있었다. 그녀가 아는 것은 몇 개의 장면뿐이었다. 어떤 장면은 이미 지나갔고, 어떤 장면은 아직 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 사이의 빈틈은, 그녀도 알지 못했다. 마치 지도를 손에 들고 있지만, 그 지도의 절반이 불에 타 없어진 것과 같았다. 그런데. *** 별궁의 문이 조용히 열린 것은 밤이 깊은 시각이었다. 유서윤은 놀라 몸을 일으켰다. 심장이 순식간에 목구멍까지 뛰어오르는 기분이었다. 이 시간에 이 방을 찾아올 사람은 없었다. 적어도 그녀가 아는 이야기 속에서는. 문틈으로 작은 체구의 소녀가 들어왔다. 자주색 눈동자가 어둠 속에서도 또렷하게 빛났다. "소아." 유서윤이 낮게 불렀다. 한소아는 손가락을 입술에 대며 조용히 하라는 시늉을 하더니, 곧 유서윤의 품에 뛰어들었다. 작은 몸이 파고들자 유서윤은 한동안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다. "어떻게 들어온 거야." 유서윤이 소곤거리며 물었다. "별궁 시녀한테 돈을 좀 줬어." 한소아가 태연하게 답했다. "돈?" 유서윤이 눈을 크게 떴다. "얼마나." "그건 안 중요해." 한소아가 손을 휘휘 저었다. 마치 그 정도 위험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한 태도였다. 유서윤은 그 태연함이 오히려 더 불안했다. "그보다 서윤, 괜찮은 거야?" 유서윤은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그 짧은 질문 하나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이야기 속에서 그녀가 아는 한소아는 이런 순간에 도망치지 않는 유일한 인물이었다. 다른 모든 이가 등을 돌리는 장면에서도, 한소아만은 늘 문을 두드리고 있었다. "괜찮아." 유서윤이 겨우 답했다. "거짓말." 한소아가 즉각 되받았다. "네 얼굴이 그렇게 말해주는데." "내 얼굴이 뭐라고 말하는데." "사흘 동안 한숨도 못 잔 사람 얼굴." 유서윤은 웃음이 나왔다. 상황과 어울리지 않는 웃음이었지만, 어쩐지 그 순간에는 필요한 웃음이었다. 한소아는 그 웃음을 보고서야 조금 안심한 얼굴이 되었다. "나 때문에 위험해질 필요 없어." 유서윤이 말했다. "위험은 내가 판단해." 한소아가 단호하게 말했다. 그 목소리에는 나이에 비해 어울리지 않는 확신이 담겨 있었다. "너는 늘 나를 지켜줬잖아. 이번엔 내가 지켜줄 거야." 그 말에 유서윤은 한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지켜줬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나는 아무것도 한 게 없는데.' 기억나는 것이 있다면, 그저 몇 번 한소아의 손을 잡아준 것, 넘어질 것을 미리 알고 슬쩍 팔을 붙잡아준 것 정도였다. 그것도 지켜준 것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하지만 한소아의 눈빛은 진심이었고, 그 진심이 유서윤의 안에서 무언가를 흔들어 놓았다. "소아야." 유서윤이 조심스럽게 불렀다. "응." "만약에, 내가 이 별궁에서 나가지 못하면 어떻게 될까." 한소아는 잠시 침묵했다. 그러다 유서윤의 손을 꽉 붙잡았다. "그런 일은 없어." 짧고 단단한 대답이었다. "내가 그렇게 만들지 않을 거니까." '이대로 당할 수만은 없어.' 유서윤은 처음으로 그렇게 결심했다. '내가 아는 장면들을 이용해서, 이 운명을 뒤엎어야 해.' 그 결심은 두려움만큼이나 낯설었다. 지금까지 그녀는 정해진 결말을 향해 흘러가는 것을 그저 지켜보는 사람이었다. 저항이라는 것은 그녀의 이야기 속에 존재하지 않는 선택지였다. 한소아는 얼마간 더 머물다가, 별궁 시녀가 돌아올 시간이 다 되었다며 서둘러 나갔다. 문이 닫히기 직전, 한소아는 고개를 돌려 한 번 더 말했다. "꼭 다시 올게." 그 말이 문틈 사이로 사라졌다. 그날 밤, 잠든 유서윤의 눈앞에 또 하나의 장면이 스쳐 지나갔다. 불타는 정원, 누군가의 절규, 그리고 붉게 물든 황금빛 머리칼. 불꽃은 정원의 나무를 타고 올라 하늘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고, 그 아래 누군가가 쓰러져 있었다. 황금빛 머리칼이 흙바닥에 흩어져 있었고, 그 위로 붉은 것이 번지고 있었다. 누구의 목소리인지, 누구의 머리칼인지 알 수 없었다. 그녀는 그 장면의 끝을 보지 못한 채 잠에서 깨어났다. 이마에 식은땀이 흥건했다. '또 시작이야.' 그녀는 어둠 속에서 숨을 몰아쉬며 생각했다. '이번엔 또 무슨 조각이지.' 빈틈은 여전히 채워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 빈틈 안에서, 무언가가 이미 움직이고 있었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