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눈발이 흩날렸다.
바늘을 쥐고 있던 손가락 마디마디가 아직도 뻐근하게 저려왔다.
가온 백작가 침방에서 밤늦게까지 혼례복 자락을 손보다 나온 참이었다.
오늘따라 아가씨가 트집을 잡아 옷자락의 수를 세 번이나 다시 뜯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저녁이라도 든든히 먹고 나올 걸.'
배 속이 허전한 것을 애써 무시하며 걸음을 재촉했다.
소매 끝이 다 젖어 시린 손끝을 옷깃에 문질렀다.
골목을 가로지르면 집까지 반나절은 빠르게 갈 수 있다는 걸 알기에, 나는 늘 이 지름길로 다녔다.
그런데 오늘은 골목 어귀부터 이상했다.
평소라면 지나가는 취객의 헛기침 소리 하나쯤은 들려야 할 시간인데, 골목 전체가 이상하게 조용했다.
비릿한 냄새가 코끝을 찔렀다.
피 냄새였다.
'이 시간에 골목에 피 냄새가 날 이유가 없는데.'
걸음을 멈추고 눈을 가늘게 떴다.
담벼락 아래, 눈을 뒤집어쓴 무언가가 쓰러져 있었다.
처음엔 짐짝인 줄 알았다.
누군가 버리고 간 이삿짐이거나, 술 취한 자가 내던진 봇짐일 거라고 생각했다.
가까이 다가가서야 그것이 사람이라는 걸 깨달았다.
남자였다.
의복은 눈에 젖어 색이 죽었지만, 옷감의 짜임새만큼은 눈에 익지 않은 고급이었다.
비단도 아니고 무명도 아닌, 처음 보는 결의 천이었다.
이런 옷감은 침방에서도 좀처럼 보기 힘든 것이었다.
'어느 가문의 자제일까.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위일지도.'
허리춤에는 검집이 매달려 있었는데, 검은 보이지 않았다.
검집의 장식도 예사롭지 않았다.
은으로 세공된 문양이 눈 속에서도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옆구리에서 흘러나온 피가 이미 눈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검을 빼앗겼거나, 잃어버렸거나.'
둘 중 하나였다.
주변에 다른 발자국이나 흔적은 눈에 덮여 이미 지워진 뒤였다.
누가 이 사람을 이렇게 만들었는지, 언제부터 여기 쓰러져 있었는지 짐작할 방도가 없었다.
나는 잠깐 망설였다.
'이런 사람을 건드렸다가 무슨 일에 휘말릴지 몰라.'
침방나인이 함부로 낯선 자를 건드렸다가 뒷일을 감당하지 못하는 경우를 여럿 들었다.
관아에 끌려가 밤새 시달리다가 결국 죗값을 뒤집어쓴 하녀 이야기도, 옆집 노파에게서 몇 번이나 들은 바 있었다.
'모른 척 지나가는 게 상책이다.'
머리로는 그렇게 판단하면서도,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남자의 입술은 이미 파랗게 죽어가고 있었다.
손끝은 얼음장처럼 굳어 있었다.
조금만 더 지체하면 숨이 끊어질 게 분명했다.
가슴 한구석이 조여드는 느낌이 들었다.
'이유가 무엇이 됐든, 지금 이 사람을 두고 가면 죽는다.'
그 생각이 들자 더 이상 망설일 수 없었다.
나는 옷고름을 풀어 그의 옆구리를 힘껏 눌렀다.
뜨거운 피가 손가락 사이로 배어 나왔다.
체온이 이렇게 빠르게 식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그의 얼굴은 이미 눈처럼 하얗게 질려 있었다.
나는 그의 팔을 내 어깨에 걸치고 일어섰다.
생각보다 몸이 무거웠다.
키가 크고 어깨가 넓은 걸로 보아 또래보다 서너 살은 위일 듯했다.
손바닥에는 두꺼운 굳은살이 잡혀 있었다.
'검을 오래 다뤄온 사람이다.'
굳은살의 위치와 두께로 보아 하루이틀 익힌 솜씨가 아니었다.
무릎이 후들거렸지만 나는 이를 악물고 걸음을 옮겼다.
발을 뗄 때마다 남자의 무게가 어깨를 짓눌러 숨이 턱턱 막혔다.
근처 헛간까지 끌고 가는 데 한 식경은 걸린 듯했다.
몇 번이나 눈길에 미끄러져 함께 나동그라질 뻔했다.
헛간 안은 그나마 바람을 피할 수 있었다.
문짝이 반쪽 떨어져 나가 있었지만, 골목보다는 훨씬 나았다.
나는 그의 상의를 찢어 상처를 확인했다.
칼날이 옆구리를 얕게 스친 상처였다.
깊지는 않았지만, 눈밭에 오래 누워 있었던 탓에 피가 굳지 않고 계속 새어 나오고 있었다.
허리에 두르고 있던 천 조각을 모조리 찢어 상처를 압박했다.
손이 떨려 매듭을 두 번이나 다시 묶었다.
헛간 구석에 쌓인 짚더미를 끌어와 그의 몸 위에 덮었다.
짚더미에서 나는 마른풀 냄새가 그나마 피비린내를 조금 덜어주었다.
'이대로 밤을 넘기면 살 것이다.'
의원은 아니지만, 침방에서 일하며 어깨너머로 배운 지식으로는 그렇게 판단할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의 곁에 붙어 앉아 밤새 그를 지켜보았다.
바람이 헛간 틈으로 새어 들어올 때마다 몸이 절로 움츠러들었다.
손끝이 아려올 정도로 추웠지만, 그의 몸에서 나는 온기가 옅게라도 느껴져 그나마 다행이었다.
숨소리가 점점 안정되는 걸 확인할 때마다 가슴이 조금씩 놓였다.
'죽지는 않겠구나.'
그런 확신이 들 때마다 나도 모르게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한참을 그렇게 앉아 있으니 다리가 저려왔다.
그래도 자리를 뜰 수 없었다.
'혹시라도 상처가 다시 벌어지면 어떡하나.'
그 걱정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
밤이 깊어질수록 눈발은 더 거세졌다.
헛간 지붕 틈으로 눈송이가 몇 알씩 떨어져 그의 얼굴 위에 내려앉았다가 곧 녹아 사라졌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이상하게도 마음이 아렸다.
'이런 사람도 이렇게 무력하게 쓰러질 수 있구나.'
허리춤의 화려한 검집과 지금의 처참한 모습이 좀처럼 겹쳐지지 않았다.
새벽이 다가올 무렵, 그의 눈꺼풀이 미미하게 떨렸다.
'설마 벌써?'
나는 숨을 죽이고 그를 내려다보았다.
혹시 상태가 나빠진 건 아닐까 하는 걱정에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짚더미 사이로 스며든 새벽빛이 그의 얼굴 위에 옅게 내려앉았다.
그 순간, 그의 눈이 번쩍 뜨였다.
예사롭지 않은 눈빛이었다.
마치 짐승이 사냥감을 훑는 듯한, 서늘하고 정확한 시선이었다.
그 눈동자는 상처 입은 사람의 것이라고는 믿기지 않을 만큼 맑고 날카로웠다.
나는 그 눈빛에 숨이 턱 막혔다.
'이 사람, 대체 누구지.'
그 질문이 머릿속을 스치는 순간, 그의 손이 번개처럼 내 손목을 움켜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