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태정 서은채."
곽서겸이 서류를 읽어주는 목소리를 나는 낯설게 듣고 있었다.
원래의 성을 지우고 백작가의 성을 받은 것이었다.
먹으로 새로 쓰인 글자는 아직 마르지도 않았는데, 그 안에 담긴 무게는 벌써부터 나를 짓눌렀다.
'서은채는 이제 없다. 태정 서은채가 되었다.'
같은 이름인데도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이름 뒤에 성 하나가 바뀌었을 뿐인데, 나를 바라보는 곽서겸의 눈빛조차 조금 달라진 것처럼 느껴졌다.
'착각이겠지.'
착각이 아니었다.
입적 절차가 끝나자, 저택 사람들의 태도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어제까지 나를 편히 부르던 침방 나인들이 오늘은 고개를 숙이며 존대했다.
"영애님, 차를 준비해 올리겠습니다."
바로 이틀 전까지만 해도 나와 함께 바늘을 나눠 쓰고 실을 엉키게 했다며 웃던 그 아이의 입에서 나온 말이었다.
그 존대가 다정함이 아니라 거리감이라는 걸 모를 만큼 어리지는 않았다.
다영만이 여전히 나를 편하게 대했지만, 그 눈빛에는 걱정이 가득했다.
"은채야, 진짜 실감이 안 나지?"
"…나도 잘 모르겠어."
"그래도 정신 똑바로 차려. 공작가 사람들, 절대 만만하게 보면 안 돼."
다영은 내게 다가와 옷매를 정리해주며 낮게 속삭였다.
"귀족 사회는 웃으면서 사람을 죽이는 곳이야. 겉으로는 예를 다해도, 속으로는 언제든 널 짓밟을 준비를 하고 있어."
그 말이 무겁게 가슴에 내려앉았다.
"그러니까 뭘 먹어도 조심하고, 누가 잘해줘도 곧이곧대로 믿지 마."
다영의 손끝이 내 옷깃을 정리하다가 잠시 멈췄다.
"…나는 여기 있을 수 없으니까, 네가 알아서 잘해야 해."
그 말에는 헤어짐이 이미 정해져 있다는 걸 알리는 씁쓸함이 섞여 있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은 척 웃었지만, 속으로는 목이 조여오는 기분이었다.
다음 날부터 예법 교육이 시작되었다.
예법을 가르치기 위해 백작가에서 부른 노부인은 나를 앉혀놓고 걸음걸이부터 지적했다.
"보폭이 너무 크십니다. 영애는 절대 서두르는 모습을 보여선 안 됩니다."
한 걸음, 한 걸음마다 노부인의 지팡이가 바닥을 두드렸다.
찻잔을 드는 손가락의 위치, 고개를 숙이는 각도, 인사의 깊이까지 모든 것이 규칙으로 정해져 있었다.
"찻잔을 드실 때는 새끼손가락을 세우지 마십시오. 그것은 하급 관리 집안에서나 하는 버릇입니다."
"고개는 이 각도까지만 숙이십시오. 그 이상은 상대를 지나치게 높이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루에도 몇 번씩 같은 동작을 반복했다.
손끝이 저리고 무릎이 아팠다.
앉았다 일어서기를 수십 번, 절을 했다 폈다를 수십 번 되풀이하고 나면 온몸이 뻐근했다.
'침방에서 밤새 바느질하던 것보다 이게 더 힘들구나.'
바늘에 손끝을 찔려 피가 맺히는 고통은 익숙했지만, 이렇게 미세한 동작 하나하나에 신경을 곤두세우는 건 낯선 종류의 피로였다.
노부인은 내가 조금이라도 흐트러지면 여지없이 지팡이 끝으로 바닥을 세게 내리쳤다.
그 소리가 날 때마다 심장이 철렁했다.
'이렇게 배워도, 공작가 사람들 눈에는 어차피 서투르게 보이겠지.'
그런 생각이 들 때마다 억지로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의심할 시간조차 없었다.
그렇게 며칠이 지나고, 마침내 공작가로 떠나는 날이 되었다.
새벽부터 저택 안이 분주했다.
하인들이 짐을 옮기는 소리, 마차를 준비하는 소리가 방문 밖에서 끊임없이 들려왔다.
나는 거울 앞에 서서 낯선 얼굴을 바라보았다.
곱게 틀어 올린 머리, 짙은 화장, 무겁게 늘어진 비단옷.
그 안에 있는 사람이 정말 나인지 헷갈릴 정도였다.
마차에 오르기 전, 곽서겸이 나를 배웅했다.
"영애님, 저도 곧 진성 공작가로 자리를 옮기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그 말이 조금은 위안이 되었다.
적어도 낯선 곳에 아는 얼굴이 하나는 있을 것이었다.
"곽 집사님도 그곳으로 가시는 건가요?"
"예. 영애님을 보필하라는 명을 받았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지만, 그 담담함이 오히려 나를 조금 안심시켰다.
적어도 이 사람은 나를 감시하러 가는 것이 아니라 지켜보러 가는 것이라고, 애써 그렇게 믿고 싶었다.
다영은 마차 앞까지 따라 나와 내 손을 꼭 잡았다.
"몸조심해. 무슨 일 있으면… 아니, 무슨 일이 있어도 참아. 참는 게 이기는 거야."
그 말을 끝으로 다영은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눈물을 참는 듯 입술을 꾹 다문 얼굴이 마지막으로 눈에 들어왔다.
마차 안에 홀로 앉아, 나는 창밖으로 지나가는 풍경을 바라보았다.
익숙했던 백작가의 담장이 점점 멀어지고 있었다.
담장 위로 낮게 걸린 겨울 하늘이 유난히 창백했다.
입고 있는 비단옷은 태어나서 처음 걸쳐보는 옷감이었다.
무겁고 낯설었다.
손끝으로 옷자락을 만지자, 바느질 자국 하나 없이 완벽하게 마감된 봉제선이 느껴졌다.
'내가 바느질하던 손으로, 이제는 이런 옷을 입는구나.'
헛웃음이 나왔다.
내 손끝에는 아직도 바늘에 찔린 흔적이 희미하게 남아 있었는데, 그 손으로 이렇게 완벽한 옷을 입고 있다는 사실이 우습기까지 했다.
마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속이 울렁거렸다.
단순히 마차의 흔들림 때문만은 아니었다.
'내가 정말 공작가의 며느리가 될 수 있을까.'
'저 사람들 눈에 나는 그저 벼락출세한 침방나인으로 보이지 않을까.'
반문이 끝없이 이어졌지만, 답은 나오지 않았다.
몇 번이고 스스로에게 물었지만, 그 어떤 대답도 확신을 주지 못했다.
'그래도 이제 와서 돌이킬 수는 없다.'
'답이 나오지 않아도, 이미 마차는 그곳으로 향하고 있다.'
그것만이 유일한 확신이었다.
창밖으로 눈이 다시 흩날리기 시작했다.
이헌을 처음 발견했던 그날 밤과 똑같은 눈이었다.
굵고 무겁게 떨어지던 그 눈송이들이, 지금은 가늘고 조용하게 마차 창을 스치고 지나갔다.
그날은 내가 그를 구했지만, 오늘은 누구도 나를 구해줄 수 없는 자리로 걸어 들어가고 있었다.
그 사실이 이상하게도 서글프게 느껴졌다.
이헌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을까.
그도 나처럼 낯선 곳으로 떠나는 마차 안에서 이런 생각을 했을까.
마차가 점점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바퀴가 자갈길에 닿는 소리가 점점 느려지더니, 이내 완전히 멈췄다.
창밖으로 거대한 성문이 눈에 들어왔다.
높이를 가늠할 수 없을 만큼 치솟은 성벽과, 그 위로 새겨진 낯선 문장.
진성 공작가의 정문이었다.
성문이 무겁게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는 마치 내가 다시는 되돌아갈 수 없는 길로 들어서고 있음을 알리는 신호처럼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