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청현국의 겨울은 대유국의 겨울보다 일찍 오고, 대유국보다 오래 남는다고 했다. 국경을 지나는 상인들은 늘 그렇게 말하며 옷깃을 여몄는데, 세아는 그 말을 국경의 초소에서 처음으로 몸으로 확인하는 셈이었다. 살을 파고드는 바람은 대유국의 그것과는 결이 달랐다. 눅눅하고 무거운 것이 아니라 건조하고 날카로운 것이어서, 스치기만 해도 피부가 갈라질 듯했다. 대유국 왕궁에서 나고 자란 것처럼 살았던 세 해 동안, 그녀는 계절이 바뀌는 것도 온전히 자신의 것으로 누려본 적이 없었다. 봄이 오면 성녀의 이름으로 축제를 견뎌야 했고, 여름이면 성녀의 이름으로 순례를 견뎌야 했다. 계절은 그저 견뎌내야 할 일정의 배경일 뿐, 세아 자신의 시간은 아니었다.
성녀의 대역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온 시간이었으나, 실은 성녀라는 이름조차 그녀의 것이 아니었다. 백하린의 얼굴로, 백하린의 목소리로, 백하린이 감당해야 할 위험을 대신 짊어지며 살아온 나날들. 처음엔 그것이 은혜인 줄 알았다. 굶주리던 빈민가의 아이를 궁으로 데려가 먹이고 입혀준 이들이었으니, 세아는 마땅히 감사해야 한다고 배웠다. 하지만 은혜라는 이름의 계산은 언제나 한쪽으로만 기울어 있었다. 명예는 백하린에게 돌아갔고, 상처는 세아에게 남았다. 화살이 날아오면 세아가 맞았고, 저주가 쏟아지면 세아가 받았다. 그 계산은 언제나 그렇게 맞아떨어졌다.
호송 마차는 국경에서 세아를 내려놓은 뒤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났는데, 마차가 눈길 위로 사라지는 소리를 세아는 오래도록 듣고 있었다. 말발굽 소리가 완전히 잦아들 때까지, 그녀는 그 자리에 못박힌 듯 서 있었다. 손목에는 대유국이 마지막까지 그녀에게 채워둔 구속구가 남아 있었다. 마력을 억제하는 사슬이라 했으나, 실은 그녀에게 남은 마지막 존엄을 억제하려는 물건이었다는 걸 세아는 알고 있었다. 대유국의 신관들은 그것을 자비라 불렀다. 죄인의 마력이 폭주하지 않도록 지켜주는 것이라고, 그들은 웃으며 말했다. 자비라는 말이 얼마나 쉽게 폭력의 얼굴을 가리는지, 세아는 세 해 동안 몸으로 배웠다.
흑연이 그녀의 어깨 위에서 낮게 날개를 접으며 사슬을 내려다보았다. 박쥐를 닮은 작은 정령은 백하린이 오랫동안 부려온 사역마였으나, 백하린이 귀찮다는 듯 세아에게 떠넘긴 뒤로 지금은 세아와 새로 이어진 존재였다. 처음 흑연이 그녀의 어깨에 앉던 날, 세아는 이 조그마한 것마저 자신을 경계하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흑연은 그저 심드렁했다. 누구를 섬기든 상관없다는 듯한 무심함이, 오히려 세아에게는 낯선 위로가 되었다.
"그거, 안 풀 거야?" 흑연이 심드렁하게 물었다. 그 무심한 물음에 세아는 문득 웃음이 났는데, 웃음 끝에 눈물이 얼어붙을 것 같은 추위가 따라왔다. 풀 것이냐고 묻는 목소리에 감정이 실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오히려 세아를 붙잡고 있던 긴장을 조금 풀어주었다. 누구도 그녀에게 그런 질문을 해준 적이 없었다. 언제나 명령이었고, 지시였고, 규율이었다. 물어봐 준다는 것. 그것만으로도 낯선 감각이었다.
손목을 움켜쥔 손끝이 떨렸다. 세 해 동안 눌러두었던 것들이, 이제는 아무도 지켜보지 않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을 느끼며 세아는 사슬에 남은 힘을 끌어모았다. 신관들의 눈이, 백하린의 시선이, 궁정의 모든 감시가 사라진 이 순간이 오히려 낯설어서 손이 먼저 떨렸다. 대역으로 살아온 세월 동안 배운 것이 있다면, 자신에게 허락되지 않은 힘도 언젠가는 스스로 찢어낼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것을 깨닫기까지 세 해가 걸렸다는 게 우스웠다.
사슬이 손목에서 끊어지는 소리는 생각보다 작았고, 그 작은 파열음 하나로 세 해의 굴레가 끝났다는 게 오히려 허망했다. 세아는 손목을 문지르며 그 자리에 남은 붉은 자국을 내려다보았다. 자국은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몸에 새겨진 것들은 대개 그렇게 오래 남았다. 자유. 그 단어를 입안에서 굴려보았으나 낯설기만 했다. 세아는 그 낱말이 자신의 것이 될 수 있다는 사실조차 믿기지 않아, 몇 번이고 입술을 움직여 소리 없이 되뇌어 보았다.
그러나 해방의 정적은 길지 않았다. 눈밭을 가르며 다가오는 말발굽 소리가 들리고, 곧이어 창끝이 그녀를 겨눈 채로 병사 여럿이 그녀를 둘러쌌다. 청현국의 국경 수비대였다. 새하얀 눈 위로 검은 갑주를 두른 병사들이 반원을 그리며 다가오는 모습은, 세아에게 마치 대유국의 신전 벽화에서 보았던 심판의 장면 같았다. 죄인을 심판하러 내려온 존재들. 스스로를 그렇게 여긴 적은 없었으나,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런 낙인이 아주 정확하게 그녀를 향해 있었다.
"신원을 밝혀라." 선두에 선 중년의 기사가 낮고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는데, 그 눈빛에는 적의보다는 경계가 짙게 배어 있었다. 세아는 순간 무엇이라 답해야 할지 몰라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대유국에서 쓰던 이름도, 성녀라는 가짜 명함도 이제는 아무 소용이 없었다. 성녀의 대역이라 말하면 오히려 죄인 취급을 받을 것이 뻔했고, 이세아라는 본명은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이름이었다. 이름 하나를 밝히는 일이 이렇게 어려운 일이었던가. 세아는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어깨 위의 흑연이 슬쩍 몸을 숨기며 그녀의 옷 속으로 파고들었고, 세아는 그제야 자신이 이 낯선 땅에서 아무것도 아닌 채로 서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흑연조차 저 창끝 앞에서는 몸을 숨겨야 하는 존재였다. 하물며 자신은 무엇을 내세울 수 있을까. 이름도, 신분도, 지위도 없이 서 있는 이 순간이 세아에게는 세 해의 대역 생활보다 오히려 더 낯설게 느껴졌다.
"이름은... 이세아입니다." 그녀가 겨우 그렇게 말하자, 기사들 사이에서 낮은 웅성거림이 일었다. 방금 끊어진 구속구가 아직도 그녀의 발치에 나뒹굴고 있었고, 그것을 발견한 기사 하나가 눈을 크게 뜨며 상관을 돌아보았다. "대유국 죄인의 것입니다!" 그 외침에 창끝이 일제히 그녀를 향해 조여들었다. 세아는 숨이 가빠 왔다. 자유를 얻은 지 채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세아는 다시 한번 낯선 창끝 앞에 서 있게 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