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화톳불 앞에 선 순간 소하는 수십 개의 시선이 자신과 선우결을 향해 동시에 꽂히는 것을 느끼며 숨을 죽였다. 불빛이 일렁일 때마다 그림자들이 늘어졌다가 줄어들었고, 그 그림자 사이로 마을 아낙들 몇이 서로 팔꿈치를 찌르며 낮게 웃었다. 그 웃음 속에는 명백한 조롱이 섞여 있었는데, 소하는 그 웃음소리가 마치 바늘처럼 살갗을 파고드는 것을 느꼈다.
"촌장이 무능해서 저런 것까지 짐이 됐구먼." 누군가의 목소리가 바람을 타고 소하의 귓가에 정확히 꽂혔다. 옆에서 또 다른 목소리가 낮게 맞장구를 쳤다. "왕실 도련님이라니 무슨 헛소리래. 저 옷차림 좀 보게, 어디서 주워 온 것마냥."
소하는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끼며 저도 모르게 선우결의 손을 놓으려 했으나, 그는 오히려 더 힘주어 그녀의 손을 붙잡았다. 그 손의 온도가 유난히 차가웠는데, 그것이 분노 때문인지 수치심 때문인지 소하로서는 가늠할 수 없었다.
너희들이 뭘 안다고.
소하는 속으로 이렇게 되씹으며 입술을 깨물었으나, 겉으로는 애써 무표정을 유지했다. 이런 시선쯤이야 이미 익숙했다. 촌장의 딸이라는 이름 아래, 늘 누군가의 뒷말과 흘겨보는 눈초리가 뒤따랐으니까.
선우결은 낯선 시선들 속에서도 등을 곧게 펴고 있었는데, 그 태도가 훈련된 자의 것임을 소하는 어렴풋이 느꼈다. 아무리 눈초리가 따가워도 흔들리지 않는 저 자세, 저건 하루아침에 배운 것이 아니었다. 마치 어릴 때부터 수백 개의 시선 아래 서 있는 법을 몸에 새긴 사람처럼, 그는 턱을 살짝 들고 시선을 정면으로 두었다.
그 모습을 보며 소하는 문득 궁금해졌다. 저 아이는 대체 어떤 곳에서 자라, 저런 표정을 가지게 된 것일까. 그러나 그 물음은 오래 머물지 못했다. 풍악 소리가 잠시 멎으며 마당 초입에서 낯익은 여인의 목소리가 울렸기 때문이었다.
"오늘 추수제에 귀한 손님이 오셨다고 들었는데, 다들 대접이 이 정도인가?"
강지안이었다. 그녀는 화려한 남빛 두루마기 대신 마을 여느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은 소박한 옷을 걸치고 있었으나, 그 걸음걸이만큼은 여전히 미끄러지는 물뱀처럼 우아했다. 발소리조차 거의 들리지 않는 그 걸음이 화톳불 사이를 가로지르며 사람들의 웅성거림을 차츰 가라앉혔다.
그녀가 다가오자 방금까지 수군거리던 아낙들은 슬그머니 시선을 피하며 입을 다물었다. 누군가는 황급히 옷매를 다잡고, 또 누군가는 헛기침을 하며 시선을 발밑으로 떨어뜨렸다.
"이 도련님은 사하국 왕실의 귀빈이시다." 강지안이 마을 사람들을 향해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목소리에는 흔들림이 조금도 없었다. "청화촌이 이분을 어찌 대하는지, 산 너머까지 소문이 퍼질 거라는 걸 다들 알아두는 게 좋을 게다."
그 말에 마을 사람들의 표정이 순식간에 달라졌다. 왕실이라는 말의 무게가 그들의 경계심을 밀어내고 그 자리에 계산적인 호기심을 채워 넣은 것이었다. 방금 전까지 비웃던 아낙 하나는 이제 어색하게 웃으며 선우결에게 고개를 숙였고, 옆에 있던 노인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를 훑어보며 중얼거렸다. "생긴 게 귀티가 나긴 하는구먼."
몇몇 청년이 슬쩍 다가와 선우결에게 서투른 손짓으로 인사를 건넸고, 아이들은 신기한 눈으로 그의 옷자락을 만져보려 했다. 한 꼬마 아이가 손을 뻗어 옷깃의 은실 자수를 조심스레 쓸어보며 물었다. "이거 진짜 은이에요?" 선우결은 잠시 당황한 듯했으나 이내 고개를 끄덕였고, 그 반응에 아이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친구들에게 자랑하듯 소리쳤다.
강지안은 소하를 향해 눈짓을 하며 낮게 속삭였다. "이럴 때는 웃어야 한다. 저 아이가 불안해할 테니."
소하는 그 말에 정신을 차리고 억지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처음에는 어색하게 굳어 있던 그 웃음이 점차 자연스러워졌는데, 선우결이 그런 소하를 보며 따라 웃었기 때문이었다. 그 웃음이 어찌나 밝았는지 주변 사람들의 시선도 조금씩 부드러워지기 시작했다. 방금까지의 냉소는 어느새 흥미와 호기심으로 바뀌어 있었다.
풍악이 다시 울리자 몇몇 처녀들이 소하에게 다가와 추수제 노래를 함께 부르자며 손을 이끌었다. "소하야, 이리 와! 이런 날 혼자 뻣뻣하게 서 있으면 어쩌누." 그중 한 처녀가 소하의 팔을 붙잡으며 웃었고, 소하는 얼떨결에 그 무리에 섞여 들어갔다.
화톳불 주위를 돌며 노래하고 춤추는 사람들 사이에서, 소하는 처음으로 이 마을에서 온전히 받아들여진 듯한 감각을 느꼈다. 불빛이 얼굴마다 황금빛으로 어른거렸고, 노랫소리와 장단 소리가 뒤섞여 마당 전체를 가득 채웠다. 선우결도 어색하게 발을 맞추며 사람들의 손짓을 따라했는데, 그 서툰 몸짓에 마을 아이들이 까르르 웃음을 터뜨렸다. 그 웃음소리는 조롱이 아니라 순수한 즐거움에서 나온 것이었고, 소하는 그 차이를 분명히 느끼며 가슴 한쪽이 뜨거워지는 것을 참아냈다.
이런 순간이 얼마나 갈까.
그런 생각이 문득 소하의 마음을 스쳤으나, 그녀는 이내 그 생각을 밀어내고 다시 노래에 맞춰 발을 굴렀다. 선우결의 손이 자신의 손을 놓지 않고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도 위안이 되었다.
강지안은 그런 두 사람을 멀찍이서 지켜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으나, 그 미소 밑으로는 여전히 무언가 근심이 서려 있는 듯했다. 그녀는 술잔을 든 채 화톳불 곁에 서 있었지만, 그 눈빛만은 흥에 취해 있지 않았다. 이따금 마을 어귀 쪽으로 시선을 돌리곤 했는데, 그 눈빛에는 경계심이 완전히 가시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마치 언제 닥쳐올지 모르는 무언가를 기다리는 사람처럼, 그녀의 손가락은 소매 속에서 조용히 움직이고 있었다.
한참 노래와 춤이 이어지던 중, 소하는 문득 사람들의 웅성거림이 다시 술렁이는 것을 느꼈다. 처음에는 흥에 겨운 소음이라 여겼으나, 곧 그 소리에 다른 색채가 섞여 있음을 알아챘다. 두려움에 가까운 낮은 탄성이 마을 초입에서부터 퍼져오고 있었던 것이다.
노랫소리가 하나둘 잦아들었다. 장단을 맞추던 손들이 멈추었고, 사람들의 시선이 서서히 한 방향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화톳불의 불꽃 튀는 소리만이 정적 속에서 유난히 크게 들렸다.
소하는 선우결의 손을 잡은 채 사람들의 시선이 향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마을 어귀 저편, 화톳불 빛이 닿지 않는 어스름 속에서 말발굽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그 소리는 처음엔 희미했으나 곧 땅을 울리듯 뚜렷해졌고, 그 규칙적인 울림이 마당 전체의 공기를 무겁게 짓눌렀다.
등불 하나 없이 검은 갑주를 걸친 기마 행렬이 산길을 타고 내려오는 모습이 어렴풋이 보였다. 어둠 속에서도 갑주의 표면이 둔탁하게 빛을 삼키고 있었는데, 그 검은빛이 마치 오래된 석고처럼 무채색으로 가라앉아 있었다. 선두에 선 자의 옷자락에서 선우결과 똑같은 문양의 은실 자수가 어스름 속에서도 또렷이 빛나고 있었다.
소하 옆에서 선우결의 손이 순간 얼음처럼 차갑게 굳었다. 그의 얼굴에서 방금까지의 웃음기가 완전히 사라지고, 그 자리에 소하가 이제껏 한 번도 보지 못한 낯빛이 들어차 있었다. 하얗게 질린, 두려움 그 자체의 얼굴이었다.
"결아." 소하가 낮게 그의 이름을 불렀으나, 선우결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의 시선은 오직 다가오는 행렬의 선두, 그 은실 자수 위에 못 박힌 듯 고정되어 있었다.
말발굽 소리가 마당 어귀에 이르렀을 때, 풍악은 완전히 멎었고 화톳불의 타는 소리만이 정적을 메웠다. 마을 사람들은 숨죽인 채 서로의 얼굴을 돌아보았으며,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