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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화

눈을 떴을 때 나는 계곡 바닥에 등을 대고 누워 있었다. 등 뒤로 닿는 돌바닥이 차갑고 축축했다. 물소리가 들렸고, 밤공기가 서늘하게 얼굴을 스쳤다. 팔다리는 여전히 아팠다. 특히 오른쪽 어깨가 빠질 것처럼 시큰거렸는데, 이상하게 정신은 또렷했다. 마치 방금 전까지 취해 있다가 갑자기 찬물을 뒤집어쓴 기분이었다. 몸을 일으키려다가 목에 걸린 옥패가 눈에 들어왔다. 은은하게 빛나고 있었다. 자주색 빛이었다. 촛불처럼 흔들리는 게 아니라, 물속에 잠긴 형광봉처럼 일정한 채도로 뿜어져 나오는 빛. "···뭐야 이거." 내 목소리가 계곡의 물소리에 묻혀 작게 흩어졌다. [놀라지 마십시오. 저는 이 패에 새겨진 안내 인격입니다.] 목소리는 차분하고 예의 발랐다. 성별을 특정하기 어려운, 너무 다듬어진 목소리였다. 어딘가 익숙한 느낌이 들었는데, 이유는 알 수 없었다. 마치 예전에 들어봤던 라디오 안내 방송 같기도 하고, 아니면 그냥 내 뇌가 헛소리를 만들어내는 건지도. "패에 인격이 있다고? 그럼 넌 누구야, 옥패님?" 나는 반쯤 정신이 나간 채로 물었다. 지금 상황에 존댓말이 나오는 게 웃겼다. 목숨이 위험한 마당에 예의는 무슨. [저를 편하게 부르셔도 됩니다. 다만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강소의 님께서 남기신 자옥생연결법을 지금 전수하겠습니다.] 강소의. 내 어머니라는 여자 이름이 나오자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살아있는지 죽었는지도 모르는, 얼굴조차 기억나지 않는 그 이름이 이런 순간에, 이런 식으로 튀어나올 줄은 몰랐다. "잠깐, 잠깐만. 그게 뭔데 갑자기 다짜고짜—" 【심궁 생성 시작】 【심궁 등급: 미확인】 【자옥생연결법 각인 완료】 내 말은 끝까지 나오지 못했다. 뭔가가 가슴 한복판에서 폭발하듯 열이 퍼졌다. 나는 소리도 못 지르고 그대로 몸을 웅크렸다. 위장이 뒤집히는 것 같았고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뜨겁고, 저리고, 아팠다. 마치 누가 가슴 속에 뜨거운 숯덩이를 집어넣고 그걸 다시 손으로 쑤셔대는 느낌이었다. 눈앞이 하얗게 번쩍였다가 다시 새카매졌다. ···이러다 진짜 죽는 거 아니야? 숨을 쉬려고 했는데 폐가 말을 안 들었다. 입을 벌렸지만 바람만 새어 나갔다. [정상적인 반응입니다. 곧 지나갑니다.] 지나가긴 개뿔, 이라고 대답하고 싶었는데 목소리가 안 나왔다. 대신 침이 목구멍에 걸려서 사레들린 것처럼 헐떡거렸다. 손끝이 땅바닥을 긁었다. 손톱 밑에 흙이 잔뜩 끼는 게 느껴졌는데, 그런 사소한 감각까지 다 살아 있다는 게 오히려 더 무서웠다. 한참을 그렇게 뒹굴었다.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 모르겠지만, 뜨거움이 서서히 가라앉고 대신 몸 안쪽에서 이상한 감각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물이 흐르는 소리처럼, 뭔가가 순환하고 있었다. 가슴 한가운데서 시작된 흐름이 어깨를 타고 내려가 팔뚝을 지나 손끝까지, 다시 되돌아와 배꼽 아래로 흘러 들어갔다. 마치 몸속에 새로 수도관을 깐 것 같은, 이질적이면서도 묘하게 안정적인 느낌이었다. 【심궁 형성 완료】 【외장경 1단계 도달】 나는 숨을 몰아쉬며 반쯔 몸을 일으켰다. 손바닥으로 땅을 짚었는데, 팔이 떨리지 않았다. 방금까지 다 죽어가던 몸이었는데. "···외장경이 뭔데." 목이 잠겨서 목소리가 갈라졌다. [가문에서는 심궁 3단계 이상이라야 진입 가능한 초입 경지입니다. 도윤 님은 방금, 없던 심궁으로 그 경지에 곧바로 도달하셨습니다.] "없던 심궁으로, 라니. 그거 원래 순서 무시하고 그냥 막 새치기한 거잖아." [정확한 비유입니다.] 순간 나는 웃음이 나왔다. 아파서 웃겨서인지 진짜 웃긴 건지도 모르겠지만. 배를 부여잡고 웃다가 다시 옆구리가 아파서 인상을 찌푸렸다. "그거 자랑해도 되는 거야?" [대외적으로는 절대 자랑하시면 안 됩니다.] "왜, 뭐가 문젠데. 심궁 없는 천출이 갑자기 외장경이라니 놀랍지 않아? 대박이잖아." [대박이기 때문에 문제입니다. 정상적인 방식으로는 도윤 님 연령대에서 절대 나올 수 없는 결과입니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축하가 아니라 의심을 받게 됩니다.] "의심? 무슨 의심." [존재 자체에 대한 의심입니다.] 뭔 소리인지 정확히 이해는 안 됐지만 어감이 심상치 않았다.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 말이 끝나기도 전에 나뭇가지 부러지는 소리가 들렸다. 우지끈. 바스락거리는 소리와 함께 발걸음이 여러 개,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쪽이다! 냄새가 여기서 끊겼어!" 태식의 목소리였다. 심장이 다시 쿵 내려앉았다. [추격자들입니다. 몸을 낮추십시오.] "그걸 몰라서 안 낮추고 있냐!" 나는 낮게 씹어뱉으며 바위 뒤로 몸을 숨겼다. 손이 떨렸다. 저놈들이 여기서 나를 찾으면, 방금 각성한 이 심궁이라는 게 뭔지 밝혀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그리고 그게 알려지면 어떻게 될지, 감이 좋게도 하나도 안 왔다. 방금 옥패가 한 말이 자꾸 귓가에 맴돌았다. 존재 자체에 대한 의심이라니. 뭘 어떻게 의심한다는 건지 물어볼 시간도 없었다. 발소리는 점점 커졌다. 흙을 밟는 소리, 낙엽을 스치는 소리, 그리고 숨소리까지 들릴 정도로 가까워졌다. 나는 숨을 아예 참았다. 폐가 답답해서 터질 것 같았지만 지금은 숨소리 하나가 목숨을 가를 수도 있었다. "저기 있다!" 들켰다. 횃불 세 개가 어둠 속에서 흔들리며 다가왔다. 붉은 빛이 나무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다. 태식과 다른 두 명이었다. 도망친 낙오자를 잡으러 일부러 여기까지 온 모양이었다. 하필 이런 곳까지 쫓아올 정성이 있으면 그 시간에 잠이나 자지, 라는 생각이 스쳤다. "천제 새끼, 겁도 없이 도망을 가?" 태식이 이죽거리며 손을 들었다. 그 끝에서 다시 빛이 뭉쳤다. 지난번 저택에서 봤던 그 잔재주였다. 손바닥 위로 뭉치는 빛이 마치 작은 태양처럼 응축되고 있었다. 나는 몸을 움직였다. 정확히는, 움직이려고 생각도 안 했는데 몸이 먼저 반응했다. 발이 땅을 밀었고 순식간에 태식의 사각지대로 이동했다. ······뭐야, 지금 이거. 머릿속은 여전히 느렸는데 몸만 저 혼자 빨랐다. 시야가 흔들렸다가 다시 안정되는 그 짧은 순간에 나는 이미 다른 자리에 서 있었다. [외장경 신체 강화입니다. 놀라지 말고 활용하십시오.] 놀라지 말라니, 지금 놀랄 시간도 없이 몸이 저 혼자 움직이는데. 이거 완전 사기 아니야? 태식의 빛이 허공을 갈랐다. 콰앙. 원래 서 있던 자리를 정확히 스친 빛이 뒤편 나무를 그대로 태워버렸다. 나무껍질이 시커멓게 그슬리며 매캐한 냄새가 확 퍼졌다. "뭐, 뭐야?" 놈의 목소리에 처음으로 당황이 섞였다. 나는 그 틈을 타 다시 이동했다. 몸이 가벼웠다. 아니, 가볍다기보다는—내가 조종하는 게 아니라 몸이 알아서 최적의 경로를 찾아가는 느낌이었다. 발끝이 땅을 밀면 무릎이 알아서 각도를 잡고, 허리가 알아서 회전을 이끌었다. 마치 누군가가 내 몸에 이미 정해진 동선을 미리 새겨놓은 것 같았다. 나는 태식의 손목을 붙잡고 그대로 밀었다. 쿵. 태식이 나무에 부딪혀 쓰러졌다. 등이 부딪히는 소리가 둔탁하게 울렸다. "이, 이 새끼가—" 남은 두 명이 얼어붙은 채 나를 쳐다봤다. 횃불이 흔들리면서 그 얼굴에 그림자가 어지럽게 오갔다. 나도 내가 뭘 한 건지 잘 몰랐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손끝이 저릿저릿했다. 태식의 손목을 잡았던 손바닥에 아직 그 온도가 남아 있었다. "뭐, 뭐 하는 거야, 저거 심궁이 생긴 거야?" "저 새끼 천제잖아, 심궁 없는 놈이잖아!" 혼란스러운 건 저쪽이나 나나 마찬가지였다. 다들 눈만 크게 뜨고 서로 눈치를 보고 있었다. 누구도 먼저 움직이지 못했다. [지금 도망치는 게 좋습니다.] "그걸 이제 말하면 어떡해!" 나는 대답과 동시에 다시 몸을 던져 어둠 속으로 뛰어들었다. 발밑으로 낙엽이 부서지는 소리가 났고, 뒤에서 태식이 소리치는 게 들렸지만 쫓아오는 발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다들 방금 본 걸 이해하지 못해 얼어붙은 모양이었다. 나는 정신없이 달렸다. 방향도 없이, 그냥 나무가 없는 쪽으로, 물소리가 나는 쪽으로. 몇 번이나 나뭇가지에 얼굴을 긁혔고, 발이 돌부리에 걸려 넘어질 뻔했지만 몸이 알아서 균형을 잡아줬다. 이게 외장경이라는 건가. 신기한데 무섭기도 했다. 내가 내 몸을 완전히 믿을 수 없다는 느낌은, 생각보다 훨씬 낯설고 오싹했다. 그날 밤, 나는 계곡 어딘가 바위틈에 숨어서 밤을 지새웠다. 좁은 틈에 몸을 구겨 넣고 무릎을 끌어안았다. 물소리가 계속 들렸고, 바람이 틈 사이로 불어와 목덜미를 스칠 때마다 몸이 움찔거렸다. 몸은 여전히 아팠지만, 가슴속에서는 뭔가 뜨거운 것이 계속 돌고 있었다. 마치 몸속에 작은 화로 하나가 생긴 것처럼, 꺼지지 않고 은은하게 타고 있는 느낌이었다. 배가 고팠다. 이 난리를 겪었는데도 위장은 순진하게 밥 생각을 하고 있었다. 짜장면이 먹고 싶다는 생각이 스쳤다가, 지금 이 상황에 그런 생각을 하는 내가 어이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이거, 뭔가 크게 잘못된 것 같은데, 나쁘게 잘못된 건 아닌 느낌이다. [정확한 판단입니다. 다만 지금부터가 더 위험합니다.] "위험하다는 게 정확히 뭔데. 아까부터 자꾸 위험하다고만 하고 설명은 안 해주잖아." [가문의 규율상 심궁 없는 자가 외장경에 도달하는 것은 곧, 도윤 님의 신분 자체를 재조사하게 만드는 사건입니다.] "신분 재조사라니, 나 원래 천출이야. 재조사해서 뭐 나오는데." [그건 저도 알 수 없습니다. 다만 강소의 님께서는, 이 순간을 대비해 자옥생연결법을 남기셨습니다.] 옥패의 목소리는 여전히 차분했지만, 그 안에 뭔가 조심스러운 기색이 섞여 있었다. 나는 그 침묵의 틈을 파고들어 물었다. "그러니까 대체 내 어머니가 뭘 알고 있었던 건데." 대답은 바로 오지 않았다. 바람 소리만 계곡을 울렸고, 옥패는 여전히 자주색 빛을 은은하게 뿜어내고 있었다. 나는 그 빛을 내려다보며, 이 밤이 끝나기 전에 뭔가 더 큰 게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예감을 지울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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