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화란국 왕자가 도착한 것은 자정이 넘은 시각이었다.
빗기운이 채 가시지 않은 밤이었다. 나는 잠들지 못한 채로 궁 앞뜰까지 나가 있었다. 슬픔을 정리할 새도 없이 새로운 인물을 맞아야 한다는 사실이 우스웠지만, 아무도 우습다고 말하지 않았다.
시종들은 등불을 든 채 줄지어 서 있었고, 그 불빛이 젖은 돌바닥 위에서 흔들렸다. 나는 그 불빛들 사이에 서서,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왜 서 있어야 하는지를 다시 한번 생각했다. 강도현의 부고를 받은 지 채 열흘도 되지 않았다.
'이런 날에도 나라는 굴러가야 한다는 건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나는 자리를 지켰다. 도망칠 곳이 없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마차가 궁문을 지나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바퀴가 젖은 돌 위를 굴러오는 소리는 유난히 크게 울렸다. 한지원은 마차에서 내리자마자 주변을 둘러보았다. 키가 크고, 자세가 곧았다. 옷차림은 화려하지 않았지만 단정했고, 걸음걸이에는 낭비되는 움직임이 없었다.
그의 시선이 나에게 닿았을 때, 나는 그가 나를 관찰하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위에서 아래로, 아래에서 다시 위로. 그 시선이 무례하다고 느껴지지는 않았다. 다만 익숙하지 않았다.
"당신이 이서연 공주?"
존댓말과 반말 사이의 애매한 어조였다. 나는 그 애매함이 그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아 짧게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먼 길이었는데, 마중까지."
"제 나라의 손님이니까요."
그는 웃었다. 웃음이 지나치게 여유로웠다.
"소문보다 조용하시네요."
"어떤 소문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까다롭고, 제멋대로고, 곁을 잘 안 준다고들 하던데."
"틀린 말은 아니네요."
그는 다시 웃었다. 이번에는 조금 더 낮게. 소문이라는 말에 나는 되묻고 싶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궁 안 사람들이 나를 어떻게 말하고 다녔는지 궁금하지 않았다. 궁금해할 여유가 없었다.
어머니는 그를 반기며 곧바로 편전으로 안내했다. 어머니의 걸음은 평소보다 빨랐고, 목소리는 평소보다 밝았다. 강도현의 부고를 받은 지 열흘도 안 된 사람의 목소리치고는 이상할 만큼 생기가 있었다.
나는 그 뒤를 따라 걸으며, 이상한 위화감을 느꼈다. 불과 하루 전까지 나는 이 궁에서 나름의 자리를 가지고 있었다. 아버지의 첫째 딸, 제1공주.
그런데 이 낯선 남자가 도착한 순간, 그 자리는 사라진 것처럼 느껴졌다. 시종들의 시선이 나에게서 그에게로 옮겨갔다. 그들은 그의 짐을 나르고, 그의 방을 정리하고, 그의 편의를 물었다.
"왕자님, 침수는 어느 쪽 방으로 준비할까요."
"음료는 따뜻한 것으로 올릴까요, 아니면."
"이불은 새로 짜온 것으로."
질문이 쏟아졌다. 나는 그 사이에서 방향을 잃은 사람처럼 서 있었다. 누구도 나에게 무엇을 원하는지 묻지 않았다.
"공주님도 곧 익숙해지실 겁니다."
시녀 하나가 내게 위로처럼 건넨 말이었다. 그녀는 내 눈을 피하며 덧붙였다.
"저, 그러니까… 나쁜 뜻은 아니고요, 그냥… 이제부터는 왕자님 위주로 일이 돌아갈 테니까요…"
그 말이 오히려 나를 더 낯설게 만들었다. 익숙해져야 하는 사람이 나였다는 것이.
편전에서 어머니와 한지원이 나누는 대화가 문 너머로 들렸다. 두 사람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복도의 정적이 그 소리를 또렷하게 실어 날랐다.
"혼례는 언제쯤?"
"곧 상의드리겠습니다."
"화란국에서도 서둘러야 한다는 뜻이지요?"
"양국 모두에게 그럴 것입니다."
곧이라는 말이 얼마나 빠를 수 있는지, 나는 아직 알지 못했다. 다만 그 단어가 나온 순간, 목덜미가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나는 편전 밖 복도에 서서 그 대화를 듣다가, 문득 강도현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가 이 상황을 보았다면 뭐라고 했을까.
"공주님, 저 왕자님 마음에 드세요?"
그가 살짝 웃으며 그런 식으로 물었을 것 같았다. 나는 대답할 것이었다.
"안 들어."
"그렇게 단칼에요?"
"응. 단칼에."
"보자마자 그러기엔 너무 빠른데요."
"보자마자 알 수 있는 것도 있어."
짧고 건조하게. 그가 그 대답에 다시 웃었을 것이다. 눈을 접듯이 웃는, 그 얼굴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하지만 그는 이제 여기 없었다. 나는 복도 벽에 등을 기대고 눈을 감았다. 눈물이 나지 않았다. 슬픔이 슬픔의 형태로 나오지 못하고, 그냥 몸속 어딘가에 갇혀 있는 느낌이었다.
다음날 아침, 나는 궁 안에서 내 방 위치가 바뀌었다는 통보를 받았다. 원래 있던 별채는 한지원의 처소로 배정되었고, 나는 더 작은 방으로 옮겨야 했다.
"이건 관례입니다, 공주님."
관례라는 말이 참 편리하게 쓰였다. 나는 이 나라에서 그런 관례를 들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그걸 따질 기력도 없었다.
"제 물건 중에 상자 하나는 제가 직접 옮기겠습니다."
"굳이 그러실 필요는…"
"직접 옮기겠습니다."
시녀는 더 말리지 못했다. 나는 짐을 옮기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항의할 자리도, 슬퍼할 자리도, 이 궁 안에서 나에게 허락된 것은 아무것도 없어 보였다.
새로 옮긴 방은 창이 작았고, 벽지는 낡아 있었다. 예전 방보다 반절도 안 되는 크기였다. 나는 짐 상자를 내려놓고 방 안을 둘러보았다. 아버지가 쓰던 낡은 회중시계 하나만이 그 상자 안에서 나를 따라왔다.
그날 밤, 나는 새로 옮긴 방의 작은 창문을 열었다. 비가 다시 내리기 시작했다. 빗방울이 창틀에 부딪혀 튀는 소리가 방 안까지 들려왔다.
그리고 나는 그 비를 보며, 이틀 전 느꼈던 이상한 감각이 다시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때도 이렇게 비가 내렸고, 그때도 이렇게 몸 안쪽에서부터 무언가가 당겨지는 느낌이 있었다.
'또야.'
나는 창틀을 붙잡았다. 손끝이 차가웠다.
무언가가 나를 부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