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왕도 학원의 정문을 넘는 순간,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 은발이 여기서는 축복이 아니라는 걸.
정문 앞에 서서 한참을 그 자리에 얼어붙어 있었다. 다들 나를 스쳐 지나가는데, 그 스쳐 지나가는 시선들이 하나같이 내 머리끝에서 멈췄다가 다시 아래로 흘러내렸다. 위에서 아래로. 마치 값을 매기듯이.
원래 이 세계의 은발은 귀한 것이다. 마력 친화도가 높은 명문가 혈통의 상징이라던가. 순수한 은발을 가진 아이는 태어나는 순간부터 가문의 자랑거리가 된다고 들었다. 그런데 내 머리카락은 은색이라기보다는 회색빛이 도는, 조금 탁한 은발이었다.
순수한 은발이 아니라는 것. 그게 문제였다.
거울을 볼 때마다 나도 좀 답답했다. 조금만 더 밝았으면, 조금만 더 반짝였으면. 그런데 세상일이 다 내 마음대로 되나. 전생에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저기 봐, 재투성이 낙오자다."
누가 붙였는지도 모르는 별명이 입학식 날부터 나를 따라다녔다. 재투성이 낙오자. 유서 깊은 백작가 영애치고는 참 처량한 호칭이었다. 처음 들었을 땐 웃음이 나올 뻔했다. 재투성이라니, 동화에 나오는 그 신데렐라 취급인가. 그런데 여긴 유리구두도 없고 마법사 대모도 없다는 게 함정이지.
뭐, 어쩌겠어. 나는 원래 이런 시선에 익숙하니까.
전생의 나는 그저 지방대 출신의 별 볼 일 없는 엔지니어였고, 이 세계에 떨어진 뒤로도 딱히 나아진 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더 심해졌다. 여기서는 얼굴색만 봐도 계급이 갈리니까. 최소한 전생에서는 성적이든 스펙이든 노력하면 어떻게든 만회할 여지가 있었는데, 여기선 태어날 때 정해진 색이 곧 신분이었다. 참 편리하고도 잔인한 세상이다.
강의동으로 향하는 복도, 나는 최대한 눈을 낮추고 걸었다. 눈에 띄지 않는 게 최선이다. 이게 내가 이 학원에서 세운 유일한 목표였다.
조용히, 무사히, 3년만 버티기.
목표는 거창하지 않았다. 그저 졸업장 한 장 들고 이 지긋지긋한 학원을 빠져나가는 것. 그거면 됐다. 시선 따위, 별명 따위, 다 무시하고 지나가면 그만이다. 적어도 나는 그렇게 다짐하며 복도를 걸었다.
"어머, 서하윤 영애 아니세요?"
목소리의 주인공을 돌아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강나은. 이 학년 최고 권력자, 강 백작가의 외동딸.
금발에 벽안, 완벽한 미모, 완벽한 마력 친화도. 모든 게 완벽한데 성격만 완벽하게 최악인 애.
발걸음 소리부터가 다르다. 자신이 이 복도의 주인인 것처럼, 또각또각 울리는 구두 소리. 그 뒤로 졸졸 따라붙는 무리들의 소리까지 더해지면, 이건 거의 행진이다.
"안녕하세요, 강나은 영애."
형식적으로 고개를 숙였다. 속으로는 딱 한 마디 튀어나왔다. 아이고, 오늘도 재수 없게 걸렸네.
"머리색이 참… 특이하시네요. 서 백작가에도 그런 색이 나오나 봐요?"
주변에서 웃음이 터졌다. 나은의 뒤에 붙어 있는 애들, 다들 비슷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어쩜 저렇게 다들 똑같은 표정으로 웃는지, 무슨 학원에서 웃는 법도 가르쳐주나 싶었다.
웃어야 하나, 화내야 하나.
나는 그냥 아무 표정도 짓지 않기로 했다. 어차피 어느 쪽이든 저들은 즐거워할 테니까. 화를 내면 재밌어할 거고, 울면 더 재밌어할 거고, 웃으면 비웃을 거고. 어느 쪽이든 손해다.
"타고난 걸 어쩌겠어요."
짧게 대답하고 지나쳤다. 뒤에서 킥킥거리는 소리가 계속 따라붙었지만, 신경 쓰지 않기로 했다. 신경 쓴다고 달라질 게 없으니까. 이럴 때 필요한 건 두꺼운 얼굴, 아니 두꺼운 마음이다. 다행히 나는 전생부터 그 방면으로는 어느 정도 훈련이 되어 있었다.
교실에 들어서자 이번엔 다른 종류의 시선이 나를 맞았다. 무관심. 아니, 무관심을 가장한 경계심이라고 해야 하나.
은발 귀족들 사이에서 나는 이물질이었다. 그들의 세계에 잘못 끼어든, 색이 조금 빠진 얼룩. 다들 나를 보고도 안 보는 척, 대화를 나누다가도 내가 지나가면 슬며시 화제를 바꾸는 척. 그런 미묘한 배제가 오히려 노골적인 조롱보다 더 지치는 법이다.
창가 자리에 앉아 창밖을 봤다. 왕도의 하늘은 오늘도 맑았다. 저 하늘 아래, 나만 유독 흐린 색을 하고 있다는 게 좀 웃기지 않나. 하늘은 죄가 없는데 내 머리색만 이렇게 미운털이 박혔다.
"서하윤 씨, 자리 잘못 앉으신 것 같은데요."
이번엔 다른 애였다. 나은의 무리 중 하나. 이름은 기억 안 나지만 얼굴은 익다. 아마 이 학원 전체에서 저런 얼굴들은 다 어디서 찍어내나 싶을 만큼 비슷비슷했다.
"제 자리인데요."
"여긴 원래 강나은 영애님 자리 옆이라서요. 다른 곳으로 옮겨주시겠어요?"
말도 안 되는 소리였지만, 여기서 싸워봤자 손해라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자리가 뭐 그렇게 대수인가. 뒷자리든 앞자리든 수업만 잘 들으면 되지. 나는 조용히 짐을 챙겨 뒷자리로 옮겼다.
뒷자리에 앉아, 나는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정도는 각오했다. 그런데 첫날부터 이렇게 노골적일 줄은 몰랐지. 3년이 벌써부터 아득하게 느껴졌다.
수업이 시작되고, 교수는 신입생들에게 이번 학기 목표에 대해 말했다. 마력 이론, 실기, 그리고 마도구학. 나는 마도구학이라는 단어에 귀가 쫑긋 섰다.
마도구학이라면, 나도 좀 알거든.
아니, 좀이 아니라 사실 꽤 많이 안다. 전생에 배웠던 공학의 개념들이 이곳의 마도구 이론과 놀랍게도 겹치는 부분이 많았다. 회로 설계, 에너지 변환, 효율 계산. 이름만 마법으로 바뀌었지 원리는 비슷했다. 처음 그걸 깨달았을 때 나는 하늘이 나에게 딱 하나 준 선물이 이거였구나 싶어 헛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그건 여기서 밝힐 수 없는 비밀이었다. 왜냐면 내 진짜 얼굴, 진짜 정체는 이 교실 안에 있는 게 아니라 저 왕도 지하 깊은 곳, 마탑의 어느 연구실에 있으니까. 낮에는 재투성이 낙오자, 밤에는 익명의 연구자. 이중생활이라니, 남들은 로맨스 소설에나 나올 법한 화려한 이중생활을 하는데 나는 왜 이렇게 궁색한 이중생활을 하고 있나 싶어 잠깐 서글퍼지기도 했다.
교수의 말이 이어지는 동안 나는 노트에 몇 개의 기호를 슬쩍 적어봤다. 마력 회로의 기본 구조. 익숙한 패턴이 눈에 들어오자 손이 저절로 움직였다. 다행히 누구도 내 노트를 들여다볼 만큼 나에게 관심이 없었다.
수업이 끝나고 복도를 지나가는데, 뒤에서 발소리가 따라왔다. 돌아보지 않아도 느껴지는 압박감. 강나은이었다.
또각, 또각. 저 발소리는 이제 어지간히 익숙해져서 듣기만 해도 누군지 알 것 같았다.
"서하윤 영애, 잠깐 이야기 좀 할까요?"
웃는 얼굴이었는데,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대체 뭐지, 저 눈빛은.
낮에 복도에서 보였던 여유로운 조롱의 눈빛과는 뭔가 달랐다. 그건 순수한 재미로 나를 놀리는 눈이었는데, 지금 이 눈은 뭔가를 확인하려는, 아니면 경계하는 듯한 눈이었다. 마치 방금 전 내가 노트에 적어놓은 기호들을 어디선가 목격한 것 같은.
설마.
나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