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재투성이 천재 장인

2화

강나은이 나를 데려간 곳은 학원 뒤편 정원의 구석진 벤치였다. 사람이 없는 곳으로 골랐다는 게, 벌써부터 좋은 신호가 아니었다. 주변을 슬쩍 둘러봤다. 정원사도, 다른 영애들도, 산책 나온 시녀 한 명도 없었다. 완벽하게 고립된 자리. 이런 자리를 골라놓고 "별건 아니고요"라고 말하는 사람의 말을, 나는 단 한 번도 믿어본 적이 없다. "별건 아니고요." 그녀는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입꼬리는 올라가 있는데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았다. 그 부조화가 이미 대답을 다 해주고 있었다. "우리 학년에 서하윤 영애처럼 특이한 머리색을 가진 사람이 없어서, 좀 궁금했어요. 서 백작가 혈통에 무슨 일이 있었나요?" 노골적인 조롱이었다. 머리색 하나로 가문의 격을 재는 게 이 나라 사교계의 오랜 취미라는 걸, 나도 이제는 잘 안다. 마력 친화도가 높은 혈통일수록 머리색이 진하고 화려하게 나온다는 게 이곳의 상식이었으니까. 내 머리색은 그 기준에서 한참 벗어나 있었다. 나는 웃는 표정을 유지하며 대답했다. "조상 중에 마력 친화도가 낮은 분이 계셨나 봐요." "어머, 안타깝네요. 그런 핏줄로는 이 학원에서 버티기가 쉽지 않을 텐데." 버티기 쉽지 않을 텐데, 라니. 진짜 걱정해서 하는 말은 절대 아니겠지. 걱정이라는 감정을 저 얼굴에서 본 적이 있었나, 곱씹어봐도 없다. 나는 대답 대신 어깨를 살짝 으쓱했다. 이게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반항이었다. 백작가의 이름값이라도 없었으면 벌써 이 벤치에서 밀려나 있었을 거다. 그러니 이 정도 반항이 딱 적당했다. 너무 세게 나가면 다음 화젯거리는 내 태도가 될 테니까. 그녀는 잠시 나를 훑어보다가 문득 다른 화제를 꺼냈다. 훑어보는 시선이 유독 길었다. 뭔가를 더 찾고 있는 눈빛. "그런데 요즘 마탑에서 좀 이상한 소문이 있던데, 들어보셨어요?" 순간 심장이 덜컹했다. 표정 관리, 표정 관리. 지금 이 순간 내 얼굴에서 눈썹 하나만 잘못 움직여도 저 여자는 그걸 붙잡고 늘어질 거다. "무슨 소문이요?" 목소리는 다행히 평소와 다르지 않게 나왔다. 연습이 된 건가, 이런 것도. "누군가 몰래 고대 마도구를 복원하고 있다는 얘기요. 마탑 내에서도 극비리에 진행되는 프로젝트라던데." 나는 애써 무심한 표정을 지었다. 손끝이 조금 차가워지는 게 느껴졌지만, 무릎 위에 올려둔 손을 살짝 말아 쥐어서 가렸다. "글쎄요, 저는 그런 쪽에 관심이 없어서." 관심이 없는 게 아니라, 그게 바로 내가 하는 일이라서 그렇지.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지금 왕도 마탑에서 비밀리에 근무하는 마도구 설계사였다. 겉으로는 학원 신입생, 속으로는 마탑의 감춰진 인재. 이중생활이 벌써 반년째다. 전생의 지식과 이 세계의 마법 이론을 접목시킨 설계도, 그걸 눈여겨본 마탑장이 나를 비밀리에 채용했다. 조건은 딱 하나, 정체를 절대 밝히지 말 것. 왜 숨겨야 하냐고? 마도구 개발자는 언제나 정치적 표적이 되니까. 각 가문이 마도구 개발자를 서로 자기 파벌로 끌어들이려 안달인 나라였다. 개발자 한 명 확보하는 게 영지 하나를 얻는 것보다 낫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으니, 재능이 곧 위험이었다. 가문 간의 힘겨루기에 이용당하기 딱 좋은 재능이었다. 나는 그저 조용히 이 재능을 이용해서 살아남고 싶었다. 눈에 띄지 않게, 조용히, 안전하게. 그거 하나만 지키면서 살면 됐다. 욕심도 부리지 않았다. 그런데 세상 일이 어디 내 마음대로 되던가. 그런데 지금 이 순간, 강나은의 눈빛이 심상치 않았다. "이상하죠. 그 프로젝트에 관련된 사람 중에 우리 학년 학생도 있다는 소문이 있던데." 어떻게 알았지. 등줄기에 식은땀이 흘렀다. 최근 마탑 내에서 정보가 새고 있다는 얘기는 들었지만, 설마 학원까지 소문이 퍼졌을 줄은 몰랐다. 그 소문이 진짜 나를 가리키는 건지, 아니면 그냥 아무 근거 없이 던져보는 그물인지조차 구분이 안 됐다. 후자였으면 좋겠는데, 저 눈빛을 보면 확신을 갖고 하는 말 같기도 했다. "소문이란 게 대체로 근거가 없잖아요." 나는 최대한 태연하게 대답했다. 속으로는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지만. 입 안이 마르는 게 느껴졌다. 지금 물이라도 한 잔 마시면 손이 떨리는 게 들킬까 봐, 그것조차 참았다. 강나은은 잠시 나를 응시하다가, 문득 웃음을 흘렸다. 짧은 웃음이었는데 그 안에 뭐가 들었는지 알 수가 없어서 더 신경이 곤두섰다. "그렇겠죠. 뭐, 상관없어요. 그냥 궁금해서 물어본 거예요." 궁금해서 물어봤다는 말을 그대로 믿을 정도로 내가 순진했으면 애초에 이 학원에서 반년을 버티지도 못했을 거다. 그녀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매를 정리했다. 손끝으로 치맛단을 훑는 동작 하나까지 우아했다. 저 사람은 이런 순간에도 자세가 무너지지 않는구나, 싶어서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오늘 이야기 재밌었어요, 서하윤 영애. 다음에 또 봐요." 재밌었다니. 나는 하나도 안 재밌었는데. 그녀가 사라진 뒤, 나는 벤치에 그대로 앉아 있었다. 숨이 턱 막혔다. 한참을 그러고 앉아서야 겨우 숨을 제대로 쉴 수 있었다. 정원의 나무들이 바람에 흔들리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렸다. 그 소리 하나에도 어깨가 움찔했다. 정말로 소문이 그 정도까지 퍼진 거라면, 이건 단순한 조롱이 아니라 진짜 위기였다. 강나은 정도의 정보력으로 그 소문을 주워들었다면, 다른 가문들도 이미 알고 있을 확률이 높았다. 소문이라는 건 한 곳에서만 조용히 머물러 있는 법이 없으니까. 마탑에서 내 정체가 발각되는 순간, 나는 이 학원에서의 안전한 생활도, 마탑에서의 연구도 전부 잃게 될 거다. 최악의 경우엔 정치적 볼모로 이용당할 수도 있고. 백작가의 이름은 나를 지켜줄 만큼 크지 않았다. 오히려 그 정도 크기가, 누군가에게는 딱 삼키기 좋은 크기였다. 밤늦게 마탑으로 향하는 지하 통로를 걸으면서, 나는 계속 그 생각만 했다. 통로는 늘 그렇듯 차갑고 조용했다. 발소리만 벽을 타고 울렸다. 누가 흘렸을까. 마탑 내부에도 나에 대해 아는 사람이 극히 소수인데. 마탑장, 그리고 나를 배정받은 직속 선임 연구원 한 명. 그 둘 중 누군가가 입을 열었을 거라고는 믿고 싶지 않았다. 그럼 대체 어디서. 생각이 자꾸 미로처럼 뻗어나가서, 나는 억지로 걸음을 재촉했다. 지금은 답이 안 나오는 걸 붙잡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일단 연구실로 가서, 오늘 할 일을 마쳐야 했다. 연구실 문을 열고 들어서니, 책상 위에 반쯤 완성된 마도구가 놓여 있었다. 최근 몰두하고 있던 프로젝트, 고대 문헌에서 발견한 설계도를 바탕으로 복원 중인 유물이었다. 이름은 아직 없다. 그냥 '지환'이라고 임시로 붙여둔 이름뿐. 이름 붙이는 데 재능이 없다는 건 나도 안다. 그래도 매일 마주 보는 물건에 이름 하나쯤은 있어야 덜 외롭지 않겠나, 싶어서 붙였다. 반지 형태의 마도구였는데, 표면에 새겨진 마법 문양이 특이했다. 지금까지 본 어떤 마법 회로와도 다른 구조. 고대 문헌에서조차 절반쯤은 훼손된 채로 전해진 도면이라, 나머지 절반은 순전히 내 추론으로 채워 넣은 거였다. 그러니 이게 정말 원래 설계대로 작동할지, 사실 나도 확신이 없었다. 나는 지환을 손끝으로 살짝 만지며 중얼거렸다. "제발 오늘 밤은 조용히 있어줘." 이 말도 벌써 며칠째 반복하고 있다. 매일 밤 똑같은 부탁, 매일 밤 묵묵부답. 지환은 대답하지 않았다. 당연하지, 물건인데. 물건한테 말을 걸고 있는 내 모습이 좀 우습긴 한데, 어쩌겠어. 밤늦게 이 방에서 대화 상대라고는 이거 하나뿐이니까. 그런데 그 순간, 지환의 표면이 아주 희미하게 빛나기 시작했다. 뭐야, 이거. 왜 지금 빛나는 거야. 심장이 다시 덜컹거렸다. 이건 예정에 없던 반응이었다. 오늘 낮에 있었던 그 소문, 이 갑작스러운 빛, 두 가지가 한꺼번에 겹쳐 오니 등골이 서늘해졌다. 빛은 점점 짙어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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