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화
‹ ›"오랜만이네."
강철수가 안대를 두른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남은 오른쪽 눈에서 뭔가 끈적한 감정이 흘러나오는 게 보였다.
주변 신참들이 우리 둘의 분위기를 눈치채고 슬쩍 물러났다. 훈련장 특유의 흙냄새와 땀냄새가 뒤섞인 공기 속에서, 그 사이에 낀 침묵만 유독 무겁게 가라앉았다.
'저 눈.'
11개월 전이었다.
사망 부대 배치 초기, 강철수는 부대 안에서 이미 작은 권력을 쥐고 있었다. 대장장이 아들이라는 신분과 압도적인 힘으로 약한 병사들을 짓눌렀다. 그때는 아무도 그를 막지 않았다. 막을 이유가 없었다. 다들 각자 살기에 급급했으니까.
홍서준도 그 손아귀 안에 있던 사람 중 하나였다.
그날, 강철수가 홍서준의 목을 조르며 뭔가 웃고 있었다. 재미로 그러는 것 같았다. 사람 목숨을 재미로 다루는 놈이었다.
주변에 사람이 없었던 것도 아니었다. 다들 보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그게 그 부대의 방식이었다.
나는 말리지 않았다. 대신 그의 눈에 검을 꽂았다.
한쪽만.
죽이지는 않았다. 그럴 필요는 없었으니까. 산 채로 그 눈빛을 두고두고 보게 만드는 것이 더 확실한 경고였다.
피가 튀는 소리, 강철수가 내지른 짐승 같은 비명, 그 뒤로 이어진 정적까지도 아직 기억 속에 선명했다.
그날 이후로 강철수는 나를 건드리지 않았다. 대신 자기 세력을 더 키웠다. 힘으로 짓누를 수 없는 상대라는 걸 알았으니, 숫자로 메우려 한 거겠지. 언젠가 갚아주겠다는 눈빛을, 그때부터 종종 느꼈다.
그리고 지금, 그 눈빛이 다시 여기 있었다.
"여기서 또 보네."
강철수가 목검을 고쳐 잡았다. 손아귀에 힘이 들어가는 게 보였다. 나무가 삐걱, 낮은 소리를 냈다.
"오늘 이거, 대련이라고 부르지 말자. 정산이라고 부르자."
주변 신참들이 웅성거렸다. 몇몇은 이미 자리를 넓히며 뒤로 빠졌다. 구현석은 여전히 단상에서 지켜만 볼 뿐이었다. 표정 하나 바뀌지 않았다.
나는 목검을 들었다.
'여기서 실력을 다 드러내면 안 된다.'
피리를 불 때 나오던 그 감정, 채찜질 때 등이 아물던 속도, 그런 것들이 이미 소문으로 번지고 있었다. 여기서 강철수를 압도적으로 꺾어버리면, 그 소문에 확신이 붙는다.
확신이 붙으면, 나는 더 이상 그냥 병사가 아니게 된다.
실험 대상이 되거나, 위협으로 분류되거나.
둘 다 원하는 결과가 아니었다.
'적당히. 딱 적당히만.'
머릿속으로 몇 번이나 되뇌었다. 이길 순 있다. 하지만 이기는 방식이 문제였다.
강철수가 먼저 달려들었다.
목검이 허공을 갈랐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묵직했다. 나는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그걸 피했다.
힘은 확실히 셌다. 정면으로 받으면 손목이 나갈 것 같았다. 하지만 속도는 그렇게 빠르지 않았다. 11개월의 경험이 힘으로만 쌓인 놈이었다.
두 번째, 세 번째 공격이 이어졌다. 매번 무게가 실린 만큼 움직임이 컸다. 큰 동작은 읽기 쉬웠다.
나는 그의 두 번째 공격을 살짝 흘려보내고, 반격을 넣었다.
다만 세게 치지 않았다. 딱 균형을 무너뜨릴 정도로만.
강철수가 비틀거렸다.
주변에서 낮은 탄성이 나왔다. 누군가 숨을 들이켜는 소리도 들렸다.
그는 눈을 부릅뜨고 다시 달려들었다. 이번엔 더 거칠었다. 목검이 아니라 진짜 무기를 쓰는 것 같은 기세였다. 남은 눈에서 핏발이 서는 게 멀리서도 보였다.
"넌 왜 항상."
강철수가 숨을 몰아쉬며 중얼거렸다.
"항상 그렇게, 여유로운 척이야."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이유가 없었다.
그는 계속 몰아붙였다. 목검이 부딪부딪 울리는 소리를 냈다. 나는 계속 힘을 조절했다. 이길 순 있었다. 완전히 압도할 수도 있었다. 한 번의 반격이면 저 남은 눈마저 못 쓰게 만들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딱, 아슬아슬하게 밀리는 것처럼 보이는 선에서 버텼다.
발끝에 힘을 주고, 어깨를 살짝 낮추고, 검을 받아내는 각도를 조금씩 어긋나게. 밀리는 그림을 만드는 것도 실력이 필요했다.
땀이 등을 타고 흘렀다. 채찜질로 아물었던 자리가 미세하게 당기는 느낌이 들었다.
결국 구현석이 손을 들어 대련을 끝냈다.
"거기까지."
강철수가 씩씩거리며 물러났다. 눈빛만은 조금도 가라앉지 않았다. 오히려 더 불이 붙은 것 같았다.
"이번엔 어중간하게 넘어가지만."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목검을 쥔 손에 핏줄이 섰다.
"다음번엔 진짜로 할 거다."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다음번이라.'
그 말이 마음에 걸렸다. 이 부대에서 '다음번'이라는 말은 대개 좋게 끝나지 않았다.
대련이 끝난 뒤, 구현석이 다가와 나를 잠시 훑어봤다. 위에서 아래로, 발끝까지 천천히.
"방금 그거."
"예."
"너, 봐준 거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는 게 가장 안전했다.
구현석의 눈이 가늘어졌다. 뭔가를 가늠하는 눈빛이었다.
"재밌군."
그가 짧게 웃고 자리를 떴다. 웃음소리가 이상하게 오래 귓가에 남았다.
나는 그 뒷모습을 보며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저 남자, 이미 눈치챘다.'
실력을 숨기려 했지만, 완전히 숨기지는 못한 것 같았다. 구현석 같은 사람은 원래 그런 걸 놓치지 않는 부류였다. 앞으로 그의 시선이 더 자주, 더 깊게 나를 훑을 거라는 예감이 들었다.
주변 신참들도 조금씩 흩어졌다. 몇몇은 여전히 나를 힐끔거렸다. 눈빛에 섞인 감정이 두려움인지 경계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그날 저녁, 훈련장 한쪽 그늘에서 소월이 나를 조용히 불렀다. 손에 작은 약병을 든 채였다. 주변을 살피는 눈치가, 누구에게도 들키고 싶지 않은 모양이었다.
"공주님이 전하래요."
목소리가 낮았다. 조심스러운 손끝이 약병을 내 손에 건네는 동안에도 떨리는 게 느껴졌다.
나는 그 약병을 받아 들며, 등에 남아 있던 채찜질의 감각이 다시 스멀스멀 떠오르는 걸 느꼈다. 낮에 강철수와 부딪히며 당겼던 자리가 아직도 뻐근했다.
병 안에는 짙은 색의 액체가 담겨 있었다. 흔들면 은은한 향이 코끝을 스쳤다. 약초 향인지, 다른 뭔가인지 구별이 되지 않았다.
서한별이, 도대체 무슨 생각으로 이걸 보낸 건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소월은 이미 뭔가를 더 알고 있는 눈치였지만, 입을 열지 않고 조용히 자리를 떠났다.
병을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공주가 왜.'
강철수의 눈빛, 구현석의 웃음, 그리고 지금 손에 든 이 정체불명의 약병까지.
오늘 하루 사이에 얽힌 것들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그 얽힌 실 끝이 어디로 이어지는지, 나는 아직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