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이도현 백작가의 응접실은 겨울에도 난로를 아끼는 집답게 서늘했는데, 창틀 틈으로 스며든 바람이 커튼 자락을 살짝 흔들 때마다 그 냉기가 서연의 발끝까지 스며드는 것 같았다. 두 손을 무릎 위에 가만히 겹쳐 놓은 채, 그녀는 아버지의 입에서 나올 다음 말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찻잔에서 올라오는 희미한 홍차 향마저도 이 방의 서늘함을 데워주지는 못했다.
한씨 부인은 찻잔을 내려놓으며 딱히 딸을 향한 것도 아닌 시선으로 창밖을 바라보았고, 그 무심함이 오히려 서연에게는 익숙한 온도였다. 어머니의 눈길이 자신을 스치고 지나갈 때마다 서연은 늘 그 자리에 없는 사람처럼 느껴졌는데, 오늘도 다르지 않았다.
"강혁 공작가에서 혼사를 원한다는구나."
아버지의 목소리는 사무적이었고, 그 말이 누구를 향한 것인지 서연은 처음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강혁이라는 이름은 사교계에서도 함부로 입에 올리지 못하는 이름이었으니, 그 정도의 가문에서 청혼이 들어왔다면 응당 축하할 일이었을 것이다. 다만 그 축하의 대상이 자신이 아니라는 것을, 서연은 곧 알게 되었다.
원래 지명된 사람은 여동생 서인이었다는 사실을, 서연은 그 순간 깨달았다.
서인은 소파 끝에 앉아 손수건으로 눈가를 찍어내며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남자와 혼인해야 한다는 두려움을 호소했는데, 그 눈물이 지나치게 매끄러워 보여서였을까, 서연은 이상하게도 동생의 슬픔이 조금도 마음에 와닿지 않았다.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것도 아니고, 손수건에 조심스레 찍혀나가는 그 모양새가 마치 무대 위 배우의 몸짓 같아서, 서연은 속으로 '연습이라도 한 걸까' 하는 생각을 했다가도 그 생각을 곧 스스로 지웠다. 지금은 그런 걸 따질 자리가 아니었다.
"언니가 대신 가주면 안 돼?"
서인이 말끝을 흐리며 던진 그 한마디에, 방 안의 공기가 순식간에 서연을 향해 방향을 틀었다는 것을 그녀 자신도 느낄 수 있었다. 아버지의 시선이, 어머니의 시선이, 심지어 벽에 걸린 초상화 속 조상들의 시선까지도 일제히 그녀에게 쏠리는 것 같아서, 서연은 저도 모르게 등을 곧게 세웠다.
가문의 빚은 이미 발밑까지 차올라 있었고, 강혁 공작가에서 제시한 예물은 그 빚을 단번에 씻어낼 만큼 막대했으므로, 부모의 결정에는 애초에 딴 여지가 없었을 것이다. 다만 그들은 서연에게 묻지 않았을 뿐이었다. 묻는다는 절차조차 아까웠던 걸까, 아니면 물어봤자 대답이 정해져 있으니 굳이 입을 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던 걸까.
"너는 어차피..."
한씨 부인이 말을 하다 멈추었는데, 그 뒤에 이어질 말이 무엇인지 서연은 굳이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시집갈 나이는 지났고, 매력도 없고, 어차피 아무도 원하지 않을 딸이니 이런 자리라도 감사히 여겨야 한다는 말. 서연은 그 말을 대신 삼켜주는 어머니의 배려심 없는 배려에 오히려 헛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그러나 웃지 않았다. 웃을 자리가 아니었으니까.
문제는 신분이었다. 계약서에 적힌 이름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서인'이었고, 공작가에 전해진 초상화 역시 서인의 얼굴이었으므로, 서연이 그 자리에 대신 들어간다는 건 곧 이름 하나를 빼앗아 입어야 한다는 뜻이었다. 얼굴은 자매답게 닮았다 해도 완전히 같지는 않았는데, 그 미묘한 차이를 누군가 알아챈다면 어떻게 되는 걸까.
"들키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서연이 묻자 아버지는 대답 대신 눈을 피했고, 그 침묵이 오히려 가장 정확한 답이었다. 방 안의 벽시계가 째깍거리는 소리만이 유난히 크게 들렸고, 그 소리 사이로 서연은 자신의 심장이 조금씩 빠르게 뛰기 시작하는 걸 느꼈다.
서인은 벌써 안심한 얼굴로 손수건을 접어 넣고 있었는데, 언니의 등에 올라타 자신은 물에 젖지 않겠다는 계산이 뻔히 보이는 표정이었다. 그 표정에는 미안함이라는 감정이 아주 조금이라도 섞여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서연이 아무리 살펴봐도 그런 기색은 찾을 수 없었다.
서연은 그 얼굴을 마주 보며, 알 수 없는 허탈함과 함께 이상하게도 마음 한구석이 가벼워지는 걸 느꼈다. 어차피 이 집에서 자신의 이름으로 대접받은 적이 언제였던가. 생일도, 성인식도, 누구도 제대로 기억해준 적 없던 이름을 이제는 빚을 갚는 값으로 넘겨야 한다는 사실이, 슬프기보다는 차라리 익숙했다. 이름 하나쯤 없어도 그리 아쉬울 게 없다는 생각이 든 순간, 서연은 그 생각의 서늘함에 스스로 놀랐다.
짐을 꾸리던 밤, 시녀 하나가 조심스럽게 방문을 두드리며 서인의 이름이 새겨진 손수건과 목걸이 몇 개를 건네주었는데, 서연은 그것들을 하나씩 몸에 걸치며 마치 다른 사람의 살갗을 빌려 입는 듯한 감각에 손끝이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 목걸이의 사슬이 목덜미에 닿을 때마다 서늘한 금속의 감촉이 소름처럼 번졌고, 손수건의 자수 위에 새겨진 'ㅅㅇ'이라는 글자를 손끝으로 문질러보다가, 서연은 문득 자신의 이름 첫 글자와 너무 닮아 있다는 사실이 얄궂게 느껴졌다.
거울 속의 자신은 분명 서연이었지만, 목에 걸린 서인의 목걸이가 그 얼굴을 조금씩 지워가는 것 같았다. 촛불이 흔들릴 때마다 거울에 비친 그림자도 함께 흔들렸는데, 그 그림자가 정말로 자신의 것인지 의심스러운 순간마저 있었다.
'이제부터 나는 이서인이다.'
속으로 되뇌었지만 그 이름이 낯설어 몇 번이나 다시 발음해봐야 했다. 입 안에서 굴러다니는 낯선 이름의 촉감이, 마치 처음 신어보는 남의 구두처럼 발에 맞지 않는 것 같았다.
마차는 새벽안개를 뚫고 사흘을 달려 산맥 너머의 영지에 닿았다. 첫날은 완만한 구릉과 밀밭이 이어졌고, 둘째 날부터는 나무가 줄고 돌벽이 늘어났으며, 셋째 날 아침에는 창밖으로 스치는 풍경마저 잿빛으로 물들어 있었는데, 하늘은 갈수록 낮고 무거워졌고 그 색이 마치 이제부터 그녀가 살아갈 삶의 명도를 미리 알려주는 것 같았다. 마차 바퀴가 자갈길을 지날 때마다 몸이 덜컹거렸지만, 서연은 그 흔들림보다 가슴속에서 일렁이는 불안이 훨씬 컸다.
동행한 시녀는 말없이 창밖만 바라보고 있었고, 서연 역시 굳이 말을 걸지 않았다. 침묵 속에서 서연은 몇 번이나 자신의 이름을 되새겼는데, 이서인, 이서인, 그 이름이 입 속에서 계속 맴돌면서도 여전히 낯설게만 느껴졌다.
저택의 정문은 검게 칠해진 철문이었고, 그 위로 새겨진 문장은 얼음처럼 차가운 인상을 주는 짐승의 형상이었다. 늑대인지 사자인지 알 수 없는 그 형상은 날카로운 이빨을 드러내고 있었는데, 그것이 마치 이 가문에 발을 들이는 모든 이에게 경고를 보내는 것 같아서, 서연은 저도 모르게 숨을 삼켰다.
마부가 문 앞에서 멈춰 서고, 문지기 몇이 창을 든 채 서연이 탄 마차를 둘러싸듯 다가섰을 때, 서연은 숨을 크게 들이쉬며 무릎 위의 손을 꽉 쥐었다. 손바닥에 땀이 배어 나오는 것이 느껴졌고, 목걸이의 차가운 사슬이 목덜미에 닿는 감촉마저 유난히 선명하게 다가왔다.
문이 무겁게 열리는 소리와 함께, 안개 속에서 낮고 서늘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서인, 맞소?"
그 물음이 마차 문을 두드리기도 전에 이미 안쪽 깊숙이 파고드는 것 같아서, 서연은 대답 대신 심장이 갈비뼈를 두드리는 소리를 들었다. 목소리의 주인이 누구인지, 그 얼굴이 어떤 모습인지조차 알 수 없었지만, 그 짧은 물음 하나에 서연은 자신이 이제부터 짊어져야 할 이름의 무게를 온몸으로 실감했다. 대답을 해야 했다. 그러나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