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화
‹ ›그 목소리의 주인은 마차 문이 열리기 전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는데, 서연은 어둑한 마차 안에서 그 정적이 오히려 더 무서웠다.
바퀴가 자갈길 위를 구르는 소리, 말발굽이 규칙적으로 땅을 두드리는 소리, 그 사이사이 스며드는 인기척 하나 없는 침묵이 서연의 손끝을 차갑게 만들었다.
치맛단을 움켜쥔 손에 땀이 배었고, 그 땀이 낯선 옷감에 스며드는 감각조차 이상하게 낯설었다.
'서인아, 나 지금 네 이름으로 여기 있어.'
그런 생각을 몇 번이나 곱씹었는지 몰랐다.
문이 열리고, 검은 관복을 입은 키 큰 남자가 손을 내밀었을 때, 서연은 반사적으로 그 손을 잡으면서도 시선을 어디에 두어야 할지 몰라 그의 가슴께쯤에 눈을 고정했다.
손은 크고 단단했으며, 손바닥 어딘가에 오래된 굳은살이 배겨 있는 게 느껴졌는데, 그 감촉이 왠지 검을 쥔 손 같다는 생각이 스쳤다.
은색 가면이 오른쪽 얼굴을 가리고 있었고, 그 가면 아래로 드러난 반쪽 얼굴은 지나치게 단정해서, 서연은 순간 이 사람이 정말 사람인지 조각인지 헷갈릴 지경이었다.
콧날이 곧고, 입술 끝이 아주 살짝 아래로 처져 있는 것이, 웃음이라는 걸 오래전에 잊어버린 사람 같아 보였다.
"강혁이오."
짧은 인사말이었지만, 그 어조에는 어떤 여지도 남기지 않는 단호함이 배어 있었다.
서연은 서인의 이름을 빌려 자신을 소개해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입술이 얼어붙은 듯 떨어지지 않아 그저 고개만 조아렸는데, 그 침묵을 강혁은 수줍음쯤으로 해석한 듯 별다른 표정 변화 없이 몸을 돌렸다.
그의 등이 마차 옆에 늘어선 시종들 사이로 멀어지는 걸 보며, 서연은 그제야 참았던 숨을 조금 뱉었다.
'저 사람, 목소리도 얼굴도 다 너무 진짜 같아서 무서워.'
저택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서연을 맞이한 것은 서늘한 대리석 복도와 그 위로 낮게 깔린 향냄새였는데, 어딘가 나무를 태우는 냄새와 섞여 이상하게도 마음을 가라앉히는 데가 있었다.
높은 천장에는 오래된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었고, 그 불빛이 복도 벽에 그려진 문양들을 흐릿하게 비추었는데, 문양들 하나하나가 어떤 짐승의 발자국처럼 보이기도 했다.
시녀들이 줄지어 나와 고개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고, 그중 한 명이 서연의 손에서 짐 보따리를 조심스레 받아가며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공작님께서 미리 준비해두신 옷들이 방에 있습니다."
서연은 그 말에 잠깐 의아함을 느꼈는데, 서인의 치수도 제대로 전달되지 않았을 텐데 어떻게 미리 옷을 마련해두었을까 하는 생각이 스쳤지만, 곧 여독 탓에 예민해진 것이라 여기고 넘겼다.
방에 놓인 드레스들은 하나같이 서연의 몸에 꼭 맞을 듯한 크기였고, 그 사실이 묘하게 신경을 긁었지만 입 밖으로 꺼낼 처지는 아니었다.
옷장을 열어보니 색색의 옷감이 마치 진열장 속 전시품처럼 정갈하게 걸려 있었는데, 그중 어느 것도 손을 댄 흔적이 없어 보였다.
'이걸 다 누가 골랐을까.'
서연은 옷자락을 만지며 잠시 생각에 잠겼지만, 답이 나올 리 없는 질문이었다.
저녁 식사 자리에서 강혁은 식탁 맞은편에 앉아 거의 말을 하지 않았는데, 그 침묵이 서연에게는 어떤 심문보다도 무겁게 느껴졌다.
긴 식탁 위에는 은촛대가 몇 개나 놓여 있었고, 그 불빛이 그의 가면 표면에 반사되어 이따금 서연의 눈을 찔러왔다.
포크와 나이프가 그릇에 닿는 소리마저 조심스러워질 만큼, 방 안의 공기는 팽팽하게 당겨져 있었다.
서연은 수프를 뜨는 손이 떨리지 않도록 애를 썼지만, 숟가락이 그릇 테두리에 부딪히는 작은 소리조차 유난히 크게 울리는 듯했다.
"입맛에 맞지 않소?"
강혁이 묻자, 서연은 접시에서 시선을 들지 못한 채 고개를 저으며 짧게 대답했다.
"아, 아니에요. 맛있어요."
그 대답이 너무 작아서 정작 그의 귀에 닿았는지도 알 수 없었지만, 강혁은 잠시 그녀를 바라보다가 시선을 거두었는데, 그 눈빛 속에 담긴 것이 실망인지 관찰인지 서연은 짐작할 수조차 없었다.
식사가 끝날 때까지 그는 몇 마디를 더 던졌으나, 대부분은 날씨나 여정에 관한 형식적인 말들이었고, 서연은 그 사이사이 그가 자신의 접시를 슬쩍 살피는 걸 눈치챘다.
'내가 뭘 잘못 먹기라도 하나.'
그런 생각이 들었지만, 물어볼 용기는 나지 않았다.
강혁은 식사 후 서연을 별채로 데려가며, 이 저택에서 지켜야 할 몇 가지 규칙을 낮은 목소리로 읊었다.
복도를 걷는 그의 걸음은 일정했고, 서연은 그 속도에 맞추려다 몇 번이나 치맛단을 밟을 뻔했다.
"동관 서쪽 서재는 들어가지 마시오. 지하는 허락 없이 내려가지 마시오. 그리고—"
그가 잠시 말을 끊더니, 은색 가면 아래의 눈이 서연을 정면으로 응시했다.
그 시선이 어찌나 곧고 무거운지, 서연은 마치 벽에 등을 붙인 채 심판을 기다리는 기분이 들었다.
"밤에는 방문을 잠그시오. 내가 열쇠를 가지고 있을 것이오."
그 마지막 말이 보호를 위한 것인지 감금을 위한 것인지, 서연은 순간 판단할 수 없었다.
"저, 그럼 만약에 무슨 일이 생기면—"
말을 꺼내려던 서연은 강혁의 표정이 조금도 변하지 않는 걸 보고 나머지 말을 삼켰다.
다만 방문이 실제로 밖에서 잠긴다는 사실을 알게 된 순간, 서연은 자신이 이 저택의 손님이 아니라 무언가의 소유물로 들어왔다는 걸 실감했다.
별채 문 앞에 이르러, 강혁은 열쇠를 문에 꽂아 넣으며 낮게 덧붙였다.
"불편한 게 있으면 시녀를 부르시오. 나는—"
그는 문장을 끝맺지 않고 몸을 돌렸는데, 그 뒷모습이 어딘가 딱딱하게 굳어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날 밤, 서연은 낯선 침대 위에서 몸을 웅크린 채 잠들지 못했다.
이불은 두껍고 부드러웠지만, 그 감촉조차 낯설어서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창밖으로 보이는 하늘은 고향에서 보던 것보다 훨씬 낮고 어두웠으며, 별빛조차 벽처럼 두꺼운 구름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여기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문득 방문 밖에서 들리는 낮은 발소리에 온몸이 얼어붙었다.
발소리는 무겁고 느렸는데, 마치 누군가 일부러 조심스럽게 걷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발소리는 문 앞에서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멀어져 갔는데, 그 몇 초의 정적 속에서 서연은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문고리가 달가닥거리는 소리는 들리지 않았지만, 서연은 이불을 코끝까지 끌어올린 채 한참을 그렇게 굳어 있었다.
'설마 저 사람이었을까, 아니면 다른 누구.'
답을 알 수 없는 질문들이 머릿속을 어지럽혔고, 그 사이 창밖의 어둠은 조금도 옅어지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시녀가 세숫물을 가지고 들어오며 무심히 흘린 한마디가 서연의 귀에 걸렸다.
"어젯밤 지하에서 또 소리가 났다더군요. 공작님께서 친히 내려가셨다는데..."
시녀는 그 말을 하면서 대야를 내려놓다가, 손이 살짝 미끄러지는 소리를 냈다.
서연은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세숫물에 손을 담갔지만, 손끝이 물속에서 떨리는 걸 감출 수는 없었다.
"또, 라고 하셨나요?"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질문에, 시녀는 그제야 아차 싶은 얼굴로 입을 다물었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제가 괜한 말을 했습니다."
시녀는 서둘러 고개를 숙이고 방을 나갔지만, 서연의 심장은 이미 차갑게 내려앉은 뒤였다.
지하에서 나는 소리, 그리고 그 소리를 확인하러 내려가는 공작.
그 두 조각이 머릿속에서 맞춰지지 않은 채로 뒤엉켰고, 서연은 세숫물에 비친 자신의 얼굴이 유난히 낯설게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