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완벽한 낙제 영애

1화

궁의 알현실은 언제나 서늘했다. 대리석 바닥은 아무리 볕이 들어도 온기를 품지 않았고, 높은 천장에 매달린 샹들리에는 빛을 산산이 흩어 놓기만 했다. 벽을 두른 붉은 융단마저 이 방에서는 차갑게 보였다. 나는 그 차가운 바닥 위에 서서 그를 기다렸다. 이헌. 왕태자 이헌은 언제나 정해진 시간보다 늦게 나타났다. 오늘도 그랬다. 시녀들은 이미 물러나 있었고, 알현실에는 나 혼자였다. 발걸음 소리 하나 없는 정적 속에서, 나는 손끝으로 옷자락을 매만졌다. 긴장할 때 나오는 버릇이었다.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을 때, 나는 등을 곧게 펴고 예를 갖췄다. 어릴 적부터 배운 대로, 흐트러짐 없이. "오래 기다렸소." 그의 목소리는 담담했다. 마치 날씨 이야기를 하듯. 나는 고개를 들었다. 검은 머리, 짙은 눈동자. 언제 봐도 흔들림이 없는 얼굴이었다. 오늘은 그 얼굴에서 뭔가 다른 기색이 읽혔다. 확신에 가까운 무언가였다. '평소와 다르네.' 그런 생각이 스쳤다. 이헌은 늘 무표정했지만, 오늘은 그 무표정 아래 뭔가가 도사리고 있었다. 나는 그것이 무엇인지 짐작하지 못했다. 짐작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그와 나 사이엔 특별한 대화가 오갈 일이 없었으니까. "긴히 드릴 말씀이 있소." 그가 말을 이었다. 나는 답했다. "말씀하세요, 전하." 존댓말을 쓰는 건 습관이었다. 정혼자라 해도 신분의 격차는 여전히 존재했으니까. 그는 다음 왕이 될 사람이었고, 나는 그저 그 곁을 지킬 예정인 여인이었을 뿐이다. "우리의 혼약을 파기하고자 하오." 그 말은 너무 짧았다. 짧아서, 처음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그 문장을 몇 번이나 되풀이해 읽었다. 파기. 혼약. 우리. 단어 하나하나는 익숙한데, 그것들이 이어지는 순서가 낯설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소." 그가 말을 이었다. 표정 하나 변하지 않은 채였다. "한산 남작가의 한소이 양이오." 한소이. 귓가에 그 이름이 박혀 들었다. 숨을 쉬는 법을 잠깐 잊었다. 나는 그 이름을 몰랐다. 아니, 정확히는 알고 있었다. 사교계에 드문드문 오르내리던 이름이었다. 분홍빛 머리, 분홍빛 눈동자를 가진 남작가의 규수. 사랑스럽다는 평이 자주 따라붙던. 무도회에서 몇 번 스쳐 지나갔을까. 웃음이 많고, 목소리가 유독 낭랑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는 그저 인상 좋은 규수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그 이름과 이헌이 나란히 놓이는 순간이 올 줄은 몰랐다. "……언제부터였습니까." 내 목소리가 낮게 갈라졌다. "오래되었소." 그는 죄책감조차 느끼지 않는 얼굴로 답했다. "진 소저와의 혼약은 처음부터 가문의 결정이었고, 나는 그것을 따랐을 뿐이오. 하지만 이제는 더 이상 그럴 수 없소." 손끝이 차가워졌다. 주먹을 쥐었다. 손톱이 손바닥에 박혔다. 바닥이 순간적으로 미세하게 진동했던 것 같았다. 나는 그것이 내 능력 때문인지, 아니면 단순한 착각인지 구분할 겨를도 없었다. 나는 오랫동안 이 자리를 위해 준비했다. 왕태자비가 될 수 있도록. 학문을 쌓고, 예법을 익히고, 부족한 것이 없도록. 밤을 새워 역사서를 읽었고, 손끝이 갈라지도록 서예를 연습했다. 누구도 나에게 강요하지 않았지만, 나는 스스로에게 그것을 강요했다. 그 모든 것이 지금 이 순간 아무 의미도 없어졌다. "전하." 나는 겨우 입을 열었다. "이 혼약은 폐하께서 정하신 정식 혼약입니다. 단순히 전하의 개인적인 마음만으로 파기하실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알고 있소."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정식으로 절차를 밟을 것이오. 오늘은 그저, 진 소저에게 먼저 알리고자 했을 뿐이오." 먼저 알린다. 마치 배려하는 듯한 말투였다. 나는 그 순간, 그가 나를 정말로 배려한다고 믿지 않았다. 그는 그저 절차를 지키는 사람이었다. 감정이 아니라 격식으로 나를 대해온 것처럼. 지금 이 순간에도 그는 나를 배려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순서대로 처리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 절차. 그게 다지.' 나는 속으로 그렇게 되뇌었다. 조롱인지 자조인지 알 수 없는 말이었다. "……알겠습니다." 나는 겨우 그 말만을 뱉었다. 다른 말은 떠오르지 않았다. 원망을 쏟아낼 수도 있었고, 매달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어떤 말도 이 상황을 되돌리지 못한다는 걸, 나는 이미 알고 있었다. 이헌은 잠시 나를 응시했다. 그 눈빛에 동정이 섞여 있었던가. 확신할 수 없었다. 그리고 알고 싶지도 않았다. "그럼, 오늘은 이만하겠소." 그가 몸을 돌렸다. 그의 발걸음이 대리석 위에 규칙적으로 울렸다. 나는 그 소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숨을 쉬어야 한다는 것도 잊고서. '끝났구나.' 머릿속으로 그 말이 맴돌았다. '몇 년을 준비했는데.' 어릴 때부터 나는 언제나 오빠의 그림자 안에 있었다. 문무를 겸비한 완벽한 후계자, 진하준. 그리고 부모의 사랑을 독차지하는 사랑스러운 동생, 진서은. 그 둘 사이에서 나는 그저 평범했다. 집안 어른들의 눈에도, 사교계의 시선에도, 나는 늘 오빠의 다음 순서였다. 재능도, 사랑도, 관심도. 무엇이든 그의 것이 먼저였고, 나는 그 나머지를 받았다. 그래서 나는 학문에 매달렸다. 왕태자비가 될 만한 자격을 갖추는 것. 그것이 내가 스스로에게 부여한 가치였다. 누구도 나를 특별히 사랑해주지 않아도, 최소한 이 자리는 내 것이라 믿었다. 내가 노력해서 얻어낸, 흔들리지 않는 자리라고. 그런데 지금, 그 가치가 통보 하나로 사라졌다.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니.' 나는 그 말을 몇 번이나 되새겼다. 사랑. 나와 그 사이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던 것. 그런데도 그 단어가 이렇게 아프게 다가올 줄은 몰랐다. 가슴 한가운데가 뭔가에 짓눌리는 듯했다. 물리적인 통증은 아니었지만, 그와 비슷한 무게였다. 알현실 밖으로 나오자, 시녀 하나가 다급히 다가왔다. 숨이 거칠어 보였다. 급히 뛰어온 모양이었다. "진 소저, 왕비 전하께서 부르십니다." 숨이 턱 막혔다. 오늘, 이 순간을 왕비가 안다는 뜻이었다. '벌써 알고 계신다고?' 이헌이 내게 통보한 지 얼마나 지났다고. 이 정도의 속도라면, 왕비는 이미 훨씬 전부터 이 일을 알고 있었을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면 오늘의 통보조차, 그저 정해진 순서 중 하나였을 뿐이다. "……지금 말인가?" "예. 급히 오시라 하셨습니다." 시녀의 얼굴에는 조심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 나를 안쓰럽게 여기는 것인지, 왕비의 부름이 두려운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아직 정리되지 않은 마음을 안고, 다시 걸음을 옮겨야 했다. 왕비의 부름은, 언제나 좋은 소식이 아니었다. 그리고 오늘, 그 앞에서 내가 무슨 얼굴을 하고 서 있어야 할지, 나는 전혀 알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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