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왕궁의 겨울은 유난히 조용하게 지나가는 편이었는데, 성녀궁의 새벽은 그중에서도 가장 고요한 시간으로 통했다. 시녀들은 아직 잠들어 있었고, 회랑을 지키는 근위병들의 발소리마저 눈에 파묻혀 들리지 않았으며, 오직 한서아의 방에서만 희미한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사람들은 그녀를 '얼음 성녀'라 불렀는데, 이는 그녀가 치유의 힘을 다룰 때 보이는 냉철함과, 누구에게도 흔들리지 않는 무표정 때문에 붙은 이름이었다. 그러나 그 얼음 같은 얼굴 뒤에는 아무도 모르는 열기가 있었으니, 지금 이 순간처럼 그녀가 침대 위에 엎드려 손바닥만 한 마법 통신구를 붙잡고 숨을 죽이는 장면이야말로 그 열기의 실체였다.
한서아는 전생에 강채화라는 이름으로 살았던 기억을 가지고 있었다. 대한민국의 어느 IT 기업에서 시스템 엔지니어로 일하며, 밤샘 근무와 장애 대응에 시달리던 삶이었는데, 그때도 사람들은 그녀를 얼음이라 불렀다.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얼굴, 실수를 용납하지 않는 말투, 회식 자리에서도 웃음기 없는 표정 때문이었다. 그러던 그녀가 유일하게 무장을 해제하는 시간은 퇴근 후 침대에 누워 좋아하는 아이돌의 팬 계정을 새로 고침하는 순간뿐이었는데, 이곳에 와서도 그 습성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 우스운 일이었다.
지금 화면 속에는 '@이헌만보임'이라는 계정이 떠 있었다. 왕세자 이헌의 뒷모습, 손끝, 걸음걸이만 찍어 올리는 익명 계정으로, 왕궁 내에서 은밀히 도는 마법 통신망 상에서 이미 나름의 마니아층을 형성한 채였다. 그녀는 오늘 아침 회의실 창문 너머로 몰래 찍은 사진 한 장을 올릴지 고민하며 손끝을 떨었는데, 이 사진을 올리는 순간의 심장 박동이야말로 그녀가 살아 있다는 유일한 증거였다.
"성녀님, 또 그거 하십니까." 문이 슬쩍 열리며 박여진이 들어섰다. 시녀 중에서도 가장 오래 한서아를 모신 사람이었고, 우수한 마법 사용자로서 낮에는 성녀궁의 결계를 총괄하고 밤에는 이 은밀한 취미를 함께 나누는 유일한 공범이었다. "어제 찍은 옆모습 사진, 화질 보정 끝났어요. 근데 이거 올리면 또 며칠 못 자시는 거 아시죠?" 박여진이 태블릿 형태의 마법 판을 내밀며 말하자, 한서아는 사진을 받아 든 손을 가늘게 떨었다. 이헌의 옆모습이 마치 조각처럼 담겨 있었는데, 그 완벽한 콧대와 살짝 내려앉은 눈매를 확인하는 순간 그녀의 얼굴에서 얼음이 조금씩 갈라지는 게 보였다.
"완벽해." 그녀가 짧게 중얼거렸다. 그 한마디에 담긴 떨림을 박여진이 놓칠 리 없었다. "성녀님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거, 저 말고 아무도 못 봤으면 좋겠는데요." 박여진이 냉소적으로 덧붙였으나, 그 말투 속에는 오랜 시간 지켜본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애틋함이 섞여 있었다. 한서아는 그 말에 대답 대신 사진을 계정에 올렸다. 손끝이 화면을 두드리는 그 짧은 순간, 그녀는 오늘 하루도 무사히 지나가리라 믿었다.
낮의 한서아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었다. 성녀궁 앞에 늘어선 병자들의 줄을 마주할 때마다 그녀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고 치유의 손길을 뻗었는데, 그 손끝에서 흘러나오는 빛은 늘 정확하고 지체 없었으며, 감사의 말에도 그녀는 짧게 고개를 숙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왕궁 사람들은 그녀의 그런 태도를 두고 '냉정한 것이 성녀답다'고 평했으나, 실은 그 냉정함이야말로 밤마다 계정에 사진을 올리는 자신을 감추기 위한 가면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오직 박여진 하나뿐이었다.
그날 밤에도 어김없이 한서아는 침대에 엎드려 통신구를 켰다. 낮에 우연히 마주친 이헌이 회랑에서 서류를 든 채 걸어가던 모습을 몰래 찍어 두었던 것인데, 그 사진 속에서 그는 무언가에 몰두한 얼굴로 미간을 살짝 찌푸리고 있었고, 그 표정 하나마저도 그녀의 눈에는 완벽했다. 그녀는 사진에 짧은 문장을 붙였다. '오늘도 세자님 미간 주름 하나까지 완벽. 나만 아는 표정이겠지만 공유하고 싶다.' 게시 버튼을 누르는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는데, 이는 오랜만에 느끼는 순수한 기쁨이었다.
게시가 완료되었다는 알림이 뜨는 순간, 그녀는 오랜만에 옅은 미소를 지었다. 얼음 같은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그 미소는, 그녀가 강채화였던 시절부터 간직해온 유일한 낙이 여전히 살아 있다는 증거였다. 그러나 미소가 채 사라지기도 전에, 그녀는 문밖에서 들려오는 여러 사람의 발소리를 들었다. 평소라면 근위병 교대 시간이겠거니 하고 넘겼겠지만, 오늘은 발소리가 명백히 그녀의 방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한서아는 통신구를 황급히 이불 속으로 밀어 넣었다. 심장이 갑자기 빨리 뛰기 시작했고, 손바닥에 땀이 배어났는데, 그것이 두려움 때문인지 확신할 수 없었다.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규칙적으로 세 번 울렸다. 늦은 밤, 이 시간에 성녀의 방을 찾아올 사람은 없었다. 그녀는 숨을 죽인 채 이불 속의 통신구를 손끝으로 꽉 쥐었고, 그 순간 문이 예고 없이 벌컥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