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왕세자 사생팬 성녀

4화

회랑을 밝히는 가스등은 매일 저녁 같은 시각에 불이 켜지고 같은 시각에 꺼지는 것으로 유명했는데, 그 규칙적인 빛 아래를 지나는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사연을 안고 걸음을 옮기곤 했다. 회의실을 나선 한서아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그런 규칙 속에서 가장 예상치 못한 사람이었다. 회랑 끝, 가스등 불빛 아래 서 있던 이헌은 평소와 다름없이 온화한 표정을 짓고 있었으나, 그 시선이 한서아에게 닿는 순간 그녀의 심장은 걷잡을 수 없이 뛰기 시작했다. 몰래 사진으로만 담아왔던 그 얼굴이, 지금은 자신을 정면으로 마주 보고 있다는 사실이 그녀에게는 감당하기 힘든 일이었다. 발끝이 절로 멈춰 섰다. 숨을 어떻게 골라야 할지 몰라 잠시 시선을 바닥으로 떨어뜨렸는데, 그 짧은 순간에도 머릿속으로는 몇 달간 몰래 찍어온 사진들이 스쳐 지나갔다. 계단을 오르는 뒷모습, 창가에 기대어 서류를 읽는 옆모습, 회의를 마치고 나오며 옷깃을 정리하는 손끝. 그 모든 순간들을 훔쳐보듯 담아왔던 자신이, 지금 이 순간 정면으로 마주하게 되었다는 사실이 우습고도 두려웠다. "성녀님." 이헌이 먼저 입을 열었다. 목소리는 낮고 부드러웠으나, 그 안에는 이미 사건의 전말을 알고 있는 사람의 미묘한 긴장이 섞여 있었다. "이번 일, 유감입니다. 누군가 성녀님의 사생활을 침해했다는 것 자체가 왕실의 관리 부실이니, 그 책임을 함께 지겠습니다." 예의를 갖춘 그 말속에서 한서아는 이상한 위화감을 느꼈다. 그는 아직 그녀가 올린 게시물의 내용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 눈치였는데, 알았다면 지금처럼 태연하게 마주할 수는 없었을 것이다. 만약 그가 알았다면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한서아는 순간 그런 상상을 하다가 스스로 놀라 고개를 저었다. 자신이 매일 밤 숨죽여 올렸던 그 계정의 주인이라는 것을, 그가 안다면 지금처럼 온화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볼 수 있을까. 아니, 그럴 리 없었다. 예의는 곧 무너질 것이고, 그 자리에는 경멸이나 실망 같은 것들이 대신 들어설 것이었다. "전하께서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입니다." 한서아는 애써 목소리를 가라앉히며 대답했다. 얼음 같은 표정을 유지하는 것이 지금처럼 어려운 순간은 없었다. 그녀의 눈앞에 있는 사람은 밤마다 몰래 사진을 찍어 올렸던, 자신의 유일한 해방구의 대상이었으나, 지금 이 순간 그녀는 그 대상 앞에서 자신의 정체를 숨겨야 하는 이중의 압박에 짓눌리고 있었다.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그것을 감추려 손을 소맷자락 속으로 밀어 넣었는데, 이헌은 그런 그녀의 태도를 그저 긴장한 성녀의 몸짓으로 여기는 듯했다. 오해를 받는 것이 다행인지 불행인지 판단할 겨를도 없이, 대화는 계속되었다. "하루의 시간을 받으셨다고 들었습니다." 이헌이 말을 이었다. "제가 도울 방법이 있다면 돕겠습니다. 사실 이번 사건, 저도 조금 이상하다고 느끼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 말에 한서아는 순간적으로 고개를 들었다. "어떤 부분이 이상하다고 느끼셨습니까." 그녀의 물음에 이헌은 잠시 침묵하다가, 신중하게 답했다. "성녀궁의 결계는 외부인이 함부로 침입할 수 없도록 짜여 있습니다. 그런데 누군가 성녀님의 방에 접근해 도촬을 했다는 것은, 결계를 넘을 수 있는 자, 즉 궁 내부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는 뜻입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한서아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궁 내부 사람. 그 말은 곧 자신을 둘러싼 사람들 중 누군가가 진범이라는 뜻이었고, 그것이 얼마나 좁은 범위인지를 생각하면 두려움이 앞섰다. 매일 아침 인사를 나누는 시녀들, 식사를 나르는 하인들, 성녀궁을 지키는 경비병들까지. 그중 누구라도 그 사진들을 찍었을 수 있다는 사실이 그녀를 아득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동시에, 이헌이 이렇게 냉철하게 사건을 분석하고 있다는 사실이 그녀에게는 낯설고도 놀라웠다. 그녀가 사진으로만 봐온 그는 그저 온화하고 위엄 있는 왕세자였을 뿐, 이런 통찰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것은 새롭게 느껴지는 발견이었다. 렌즈 너머로만 보았던 사람이 이렇게 가까이에서, 이렇게 다른 얼굴로 말을 걸어온다는 것이 신기하기까지 했다. "전하께서 그렇게까지 신경 써 주실 줄은 몰랐습니다." 한서아가 조심스레 말했다. 그 말에 이헌은 옅게 웃으며 답했다. "성녀는 왕실의 얼굴입니다. 그 얼굴에 오점이 남는다면, 결국 왕실 전체의 위신이 흔들리는 일이니까요." 그 대답은 표면적으로는 예의를 갖춘 것이었으나, 한서아는 그 말속에서 개인적인 관심이 아니라 정치적 계산이 앞선다는 것을 느꼈고, 그 사실이 묘하게 그녀를 서글프게 만들었다. 왕실의 얼굴. 그 말이 귓가에 맴돌았다. 결국 그에게 자신은 지켜야 할 명예의 일부일 뿐, 한 사람의 여성으로서의 존재는 아니었던 것이다. 알고 있던 사실이었으나 직접 듣는 것은 또 다른 무게로 다가왔다. 씁쓸함이 목구멍 아래로 넘어가는 기분이었다. 두 사람의 대화가 이어지던 그때, 회랑 저편에서 윤소혜가 다시 나타났다. 구두 소리가 또각또각 울리며 다가오는데, 그 소리만으로도 이미 그녀의 심기가 편치 않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는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자마자 눈빛이 날카롭게 변했다. "전하, 여기서 무엇을 하고 계십니까." 그녀의 목소리에는 명백한 경계심이 담겨 있었다. 이헌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성녀궁의 결계 문제로 몇 가지 확인 중이었습니다." 그 말에 윤소혜는 한서아를 힐끗 쳐다보며 입꼬리를 비틀었다. "조사는 궁내부에서 알아서 할 일인데, 전하께서 굳이 나서실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만." 그 말속에는 이헌이 한서아에게 관심을 두는 것 자체를 경계하는 기색이 짙게 배어 있었다. 윤소혜의 시선이 잠시 한서아의 옷자락 끝에서부터 얼굴까지 훑고 지나갔는데, 그 눈빛에는 단순한 경계를 넘어선 무언가가 있었다. 마치 상대의 약점을 찾아내려는 사냥꾼의 눈처럼. 한서아는 그 시선을 느끼며 조용히 물러섰다. 괜히 더 있어 봐야 좋을 것이 없다는 판단이었다. "저는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전하, 소혜 님, 시간 내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녀는 짧게 목례를 하고 회랑을 벗어났는데, 등 뒤로 두 사람의 대화가 낮게 이어지는 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말을 나누는지까지는 알 수 없었으나, 윤소혜의 목소리가 조금 더 높아진 것으로 보아 두 사람 사이에 미묘한 긴장이 흐르고 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 소리를 뒤로한 채 걸음을 옮기는 한서아의 마음속에는, 이헌의 냉철한 분석보다 더 크게 자리 잡은 하나의 생각이 있었다. 이 사건의 배후에 있는 자가 궁 내부 사람이라면, 그중에는 자신이 전혀 상상하지 못한 인물이 포함되어 있을 수도 있다는 불안이었다. 매일 얼굴을 마주하며 인사를 나누던 이들 중 누군가가, 밤마다 자신의 방문 앞에 서서 렌즈를 겨누고 있었다는 상상만으로도 팔에 소름이 돋았다. 성녀궁으로 돌아가는 복도는 유난히 길게 느껴졌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자신을 지나치는 시녀들의 얼굴 하나하나를 다시 살펴보게 되었는데,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게 지나쳤을 그 얼굴들이 오늘만큼은 전부 의심의 대상처럼 보였다. 누구를 믿어야 할지, 누구를 경계해야 할지조차 알 수 없는 이 상황이 그녀를 더욱 지치게 만들었다. 하루의 시간. 그 안에 진범을 찾아내지 못한다면 자신에게 어떤 일이 벌어질지, 한서아는 애써 생각을 밀어내려 했으나 그 불안은 쉽게 가라앉지 않았다.
♡ 좋아요 0 · 로그인 후 좋아요/별점/댓글 참여 가능

댓글 0

  • 첫 댓글을 남겨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