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회의실의 문이 열리는 소리는 유독 크게 울렸다. 겨울 궁의 회의실은 원래도 소리가 잘 반사되는 구조였는데, 대신들이 저마다 숨을 고르며 문 쪽을 바라보는 순간, 그 정적이 소리를 한층 더 부풀린 탓이었다. 그리고 그 문턱을 넘어선 사람은 윤소혜였다. 공작가의 외동딸이자 왕세자 이헌의 정혼자로, 이 궁 안에서 가장 오랫동안 한서아와 악연을 쌓아온 사람이기도 했다. 그녀의 등장에 회의실의 공기가 순식간에 얼어붙었는데, 대신들이 자세를 고쳐 앉는 소리와 그녀가 구두를 딱딱 울리며 걸어오는 소리가 겹치며 이상한 위압감을 만들어냈다. 구두 소리는 정확히 세 걸음마다 한 번씩 대리석 바닥을 두드렸고, 그 규칙적인 울림이 마치 이 방을 자신의 무대로 만들겠다는 선언처럼 들렸다. 윤소혜는 국왕에게 짧게 예를 갖춘 뒤, 곧바로 한서아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오랜만이네, 성녀님." 그녀가 입술 끝만 올려 웃으며 말했다. 웃음이라기보다는 칼끝을 세우는 동작에 더 가까웠다.
두 사람의 악연은 한서아가 평민 출신으로 성녀 후보에 이름을 올렸던 그 시절부터 시작되었다. 당시 열두 살이었던 한서아는 신전에서 실시하는 성력 측정에서 우연히 최고치를 기록했는데, 그 자리에는 이미 성녀 자리를 확신하고 있던 어린 윤소혜가 있었다. 공작가의 딸이자 어릴 때부터 최상급 성력을 훈련받아온 그녀에게, 평민 출신의 아이가 자신을 뛰어넘었다는 사실은 도저히 받아들이기 어려운 일이었다. 그날 신전의 사제들이 축하한다며 손을 내밀었을 때, 한서아는 얼떨결에 그 손을 맞잡았고, 그 순간 윤소혜의 얼굴이 하얗게 굳는 것을 보았다. 어린 나이였음에도 한서아는 그 표정을 잊지 않았다. 그날 이후 윤소혜는 한서아를 마주칠 때마다 신분을 들먹이며 조롱했고, 한서아는 그 조롱에 아무런 대응도 하지 않은 채 그저 표정을 굳히는 것으로 자신을 지켰다. 십 년이 넘는 시간 동안 두 사람 사이에 쌓인 것은 화해할 수 없는 골이었으며, 지금 이 회의실은 그 골이 처음으로 공식적인 무대 위에 오르는 자리였다.
"평민 출신이 성녀가 되었다는 것부터가 이상했지." 윤소혜가 대신들 앞에서 목소리를 높였다. "그런데 이제 보니 성녀라는 신분을 이용해서 전하를 몰래 훔쳐보고, 그걸로 부족해 사진까지 찍어 퍼뜨렸다니. 이건 성녀의 자격이 아니라 인간의 자격을 논해야 할 문제가 아닌지요." 그녀의 말에 몇몇 대신들이 고개를 끄덕였는데, 그중 한 명은 심지어 낮게 탄식하는 소리를 내기까지 했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한서아의 손끝이 미세하게 떨렸다. 억울함과 모욕감이 뒤섞인 감정이었으나, 그녀는 여전히 표정을 바꾸지 않았다. 대신 치맛단 안쪽으로 감춘 손가락에 힘을 주어 스스로를 붙잡았다. 흔들리면 지는 거다. 그렇게 되뇌었다.
"소혜 님." 한서아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저는 계정을 도난당했고, 일기장은 누군가에게 도촬당한 피해자입니다. 사건의 진범이 따로 있다는 것을 밝힐 기회를 주셨으면 합니다." 그녀의 목소리는 낮고 담담했으나, 그 안에는 흔들리지 않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었다. 그러자 윤소혜가 코웃음을 쳤다. "피해자라는 말은 아무나 쓰는 게 아니야. 애초에 그런 마음을 품지 않았다면 도난당할 것도 없었을 텐데." 그 말에 회의실 안이 다시 조용해졌고, 한서아는 반박할 말을 찾지 못한 채 입술을 깨물었다. 논리로는 반박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곳은 논리가 이기는 자리가 아니었다. 누구의 말에 더 많은 사람이 고개를 끄덕이느냐, 그것으로 승부가 갈리는 자리였다.
국왕은 두 사람의 대치를 지켜보다 손을 들어 제지했다. "소혜 양의 발언은 참고하겠으나, 지금은 사건의 진위를 가리는 자리다." 그 말에 윤소혜는 순순히 입을 다물었지만, 입가에는 여전히 옅은 웃음이 남아 있었다. 자신이 이미 이겼다는 것을 알고 있는 사람의 여유였다. 그리고 대신 중 한 명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전하, 이번 사건은 단순한 개인의 일탈로 끝날 문제가 아닙니다. 공작가와의 혼사가 걸린 시점에, 성녀가 이런 추문에 휘말렸다는 것 자체가 왕실의 체면과 직결되는 문제입니다." 다른 대신이 뒤이어 거들었다. "게다가 신전 측에서도 이번 일을 예의주시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성녀의 자격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벌써부터 나오고 있다지요." 그 말에 한서아는 비로소 이 사건이 자신의 문제만이 아니라는 것을 실감했다. 대신들의 시선은 더 이상 사건의 진위를 궁금해하는 눈빛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이 사건을 어떻게 이용할지를 계산하고 있는 눈빛이었다.
이곳의 권력 구도는 단순하지 않았다. 왕실은 오랫동안 공작가의 군사력과 재정을 의지해왔고, 그 균형을 유지하기 위해 왕세자와 윤소혜의 정략결혼이 몇 년째 준비되어 온 터였다. 성녀는 그 자체로 신성한 존재였으나, 동시에 왕실의 위신을 상징하는 얼굴이기도 했으므로, 성녀가 스캔들에 휘말린다는 것은 곧 왕실의 위신이 흔들린다는 뜻이었다. 그리고 그 틈을 타 공작가는 자신들의 입지를 더욱 견고히 다지려 하고 있었다. 성녀의 자리가 흔들리면 왕실은 더욱 공작가에 의지할 수밖에 없을 것이고, 그 계산을 윤소혜가 모를 리 없었다. 그녀의 웃음은 단순한 승부욕이 아니라, 이 판 전체를 읽고 있는 자의 여유에서 나온 것이었다. 한서아는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이 사건이 단순한 도촬 소동이 아니라 더 큰 정치적 흐름 속에 놓여 있다는 것을 직감했다. 자신은 그 흐름 속에서 그저 밀려나는 돌멩이일 뿐인가. 그런 생각이 스치자 명치 끝이 서늘해졌다.
"제가 하루를 드리겠습니다." 국왕이 다시 입을 열었다. "단, 그 안에 진범을 찾지 못한다면, 소혜 양의 말대로 그대의 자격을 재고할 수밖에 없다." 회의실 안의 시선이 일제히 한서아에게 쏟아졌다. 그 시선들 속에는 동정도 있었고, 호기심도 있었고, 이미 결론을 내린 듯한 냉담함도 있었다. 한서아는 고개를 숙였다. 겉으로는 순응하는 태도였으나, 속으로는 이 하루 안에 반드시 진범을 찾아야 한다는 절박함이 차오르고 있었다. 하루. 겨우 하루. 그 시간 안에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계정을 훔친 자, 일기장을 도촬한 자, 그것을 퍼뜨린 자. 그 모든 것이 한 사람의 소행인지, 여러 사람이 얽힌 것인지조차 아직 알지 못했다. 그러나 지금은 물음을 던질 시간조차 아까웠다.
윤소혜는 그 모습을 보며 만족스러운 듯 입꼬리를 올렸다. "기대할게요, 성녀님. 하루 만에 진범을 찾는 그 대단한 능력." 그녀의 말투에는 명백한 확신이 담겨 있었다. 성녀가 결코 그 시간 안에 답을 찾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 그녀는 부채를 펼쳐 얼굴 반쪽을 가리며 옆에 선 대신에게 무언가를 속삭였고, 그 대신은 낮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웃음소리가 유독 크게 들렸다.
회의실을 나서는 한서아의 뒤로, 윤소혜의 낮은 웃음소리가 오래도록 따라붙었다. 복도의 가스등이 하나둘 켜지며 그림자를 길게 늘어뜨렸고, 한서아는 그 그림자를 밟으며 걸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웃음소리가 마치 시계 소리처럼 규칙적으로 느껴졌다. 하루. 남은 시간을 세는 소리처럼. 그리고 그 웃음소리 너머로, 회의실 구석에서 조용히 지켜보던 또 다른 시선이 있었다는 것을, 한서아는 그때는 알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