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새벽마다 성벽 위로 안개가 걷히는 걸 보면서 나는 오늘도 며칠째인가를 세어보는 버릇이 생겼는데, 정확히는 이 성에 팔려온 지 열이레째 되는 날이었다. 열이레. 손가락으로 꼽아보면 별거 아닌 숫자 같지만, 그 안에 들어찬 사건들을 하나씩 되짚어보면 숫자 자체가 무섭게 느껴지는 그런 종류의 시간이었다. 나는 아직도 새벽에 눈을 뜨면 천장을 보고 잠깐 멍해지는데, 여기가 병원이 아니라는 걸, 내가 서른두 살의 서은채가 아니라 열 살짜리 두촌 소작농의 딸이라는 걸 다시 확인해야 하는 그 짧은 순간이 하루 중 가장 낯설었다. 이건 습관이 안 될 만도 한데 습관이 되어가고 있다는 게 더 무서운 일이었다.
"은채야, 뭐 하니, 물이나 길어 와."
주방 시녀 하나가 나를 부르는 소리에 나는 얼른 표정을 정리하고 뛰어갔다. 겉으로는 예예, 알겠습니다, 하며 순한 얼굴을 유지했지만 속으로는 이 새벽부터 물지게를 지우다니 노동청에 신고하고 싶다는 생각이 스쳐 지나갔는데, 물론 이 세계엔 노동청이 없었다. 노동청이 없다는 걸 깨달을 때마다 나는 이곳이 얼마나 무법지대인지를 새삼 체감하곤 했다. 성 안의 하루는 겉보기엔 평온했다. 아침이면 빵 굽는 냄새가 돌담을 넘어오고, 시녀들은 재잘거리며 복도를 오갔으며, 정원에는 이름 모를 붉은 꽃이 피어 있었다. 그런데 이 평온함의 밑바닥에는 언제나 하나의 사실이 깔려 있었다. 이 성의 주인이 사람이 아니라는 것.
선유라. 이 성의 영주이자, 나를 은화 몇 닢에 사들인 존재의 이름이었다. 나는 아직 그 이름을 입 밖에 낼 때마다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걸 느꼈는데, 그게 두려움인지 다른 무엇인지는 정확히 설명하기 어려웠다. 물지게를 지고 우물로 향하는 길에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내가 여기까지 오게 된 경위를, 누군가 다시 물어본다면 나는 뭐라고 대답해야 할까. 사실 대답할 필요도 없었다. 아무도 내 진짜 정체를 궁금해하지 않았으니까. 서른두 살에 교통사고로 죽었다가 열 살짜리 아이의 몸으로 다시 태어났다고 말하면 누가 믿어주기나 할까. 마녀로 몰려도 할 말이 없는 소리였다.
그날, 그러니까 내가 이 세계에서 처음 눈을 뜬 날의 기억은 지금도 선명했다. 나는 서울 강변북로에서 신호 대기 중이었다. 야근을 마치고 돌아가는 길이었고, 라디오에서는 흘러간 노래가 나오고 있었으며, 나는 핸들에 손을 얹고 하루 빨리 집에 가서 씻고 싶다는 생각만 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다음 순간은 없었다. 정확히는 다음 순간이 있긴 했는데, 그게 너무 늦게, 너무 다른 형태로 도착했다는 게 문제였다. 눈을 떴을 때 나는 낮고 어두운 방 안에서 갓 태어난 아기의 눈으로 세상을 보고 있었다. 시야는 흐릿했고, 팔다리는 내 것 같지 않게 짧고 통제가 안 됐으며, 누군가 나를 안아 올리며 아이고 딸이다, 딸이야, 하고 우는 목소리를 들었다. 그 목소리의 주인이 훗날 내 아버지가 될 사람이라는 걸 알았을 때, 나는 소리 없이 울었다. 갓난아기의 몸으로 울 수 있는 방법은 그냥 우는 것뿐이라 다행이었다.
죽었다는 자각과 다시 태어났다는 자각이 동시에 오는 경험은,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절대 이해 못 할 종류의 혼란이었다. 나는 몇 달간 그냥 아기처럼 먹고 자고 싸는 일에만 몰두했는데, 사실 그게 최선이었다. 성인의 자의식을 가진 채로 몸이 자라기를 기다리는 시간은 지루하다 못해 고문에 가까웠고, 그 와중에 조금씩 이 세계의 정보를 흡수했다. 이곳은 한서국이라는 왕국이었고, 나는 그 변두리, 두촌이라는 이름의 빈농촌에서 태어난 셈이었다. 부모는 소작농이었고, 위로 오빠가 둘, 아래로는 아직 어린 남동생이 하나 있었다. 가난은 상상 이상이었다. 겨울이면 흙벽 틈으로 바람이 새어 들어왔고, 하루 두 끼를 먹으면 그날은 운이 좋은 날이었다.
나는 그 가난 속에서, 서른두 살 서은채의 기억을 조금씩 써먹기 시작했다. 화학 전공자로서 알고 있던 비료의 원리, 위생 관념, 간단한 의학 지식들. 그게 이 집안을, 나아가 마을을 조금이나마 나아지게 할 수 있을 거라는 순진한 믿음이 있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믿음이 얼마나 무모했는지 웃음이 나올 지경이지만, 그때는 그게 최선이라고 생각했다. 아니, 최선이 아니라 유일한 존재 이유처럼 느껴졌다는 게 더 정확했다.
우물가에 도착해 물을 받으며 나는 다시 현재로 돌아왔다. 손끝이 시렸다. 열이레 전, 나는 이 우물 대신 두촌의 좁은 개울가에서 물을 긷고 있었다. 그리고 그로부터 채 며칠도 지나지 않아, 나는 마녀로 몰렸고, 그로부터 또 얼마 지나지 않아 여기, 성벽 안으로 팔려왔다. 그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떠올리려면, 나는 조금 더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야 했다. 물통을 채우며 나는 그 기억들을 하나씩 다시 꺼내보기로 했다. 어차피 오늘 하루도 지루하게 물지게를 나르는 일로 시작될 텐데, 회상이라도 하면서 시간을 죽이는 게 낫지 않겠나.
두촌에서의 삶은 겉으로는 평범했다. 나는 남들보다 조금 조숙한 아이로 통했고, 부모는 내가 유독 말을 잘 알아듣고 손이 빠르다는 걸 신기해하면서도 딱히 의심하지는 않았다. 아이가 좀 똘똘하네, 그 정도의 평가였다. 나는 그 평가 안에서 안전했다. 문제는 내가 그 안전함에 만족하지 못했다는 데 있었다. 가족이 굶는 걸 보고도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서른두 살의 자의식이란 게 그런 식으로 발목을 잡을 줄은 몰랐다. 아는 게 있으면 써야 한다는 강박, 도울 수 있는데 안 돕는 건 죄악이라는 그 알량한 정의감. 지금 와서 보면 그게 나를 팔려가게 만든 시작이었다는 걸 그때는 몰랐다.
물통을 지고 돌아가는 길, 정원 너머로 성의 본관이 보였다. 붉은 창문들 사이로 오늘도 선유라는 무엇을 하고 있을까.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추고 그 창문을 바라봤는데, 심장이 괜히 두방망이질 쳤다. 이건 두려움일까, 아니면 다른 무엇일까. 정확한 답을 찾기도 전에, 나는 다시 걸음을 옮겼다. 오늘 물을 늦게 가져가면 또 누군가에게 잔소리를 들을 테니까. 살아남는 게 우선이었다. 그다음에 감정 같은 걸 정리해도 늦지 않을 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