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팔려갔더니 흡혈귀 영주라니

4화

성 앞 경매장은 내가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삭막한 곳이었다. 나무로 얼기설기 짜맞춘 단상 위에 아이들이 하나둘 세워졌고, 상인들과 시종들이 그 아래에서 저마다의 눈빛으로 물건을 고르는 그 광경은, 이게 사람을 사고파는 자리라는 사실을 자꾸 잊게 할 만큼 사무적이었다. 누군가는 아이의 팔을 붙잡고 근육을 확인하듯 만져보았고, 누군가는 이빨을 보여달라며 턱을 잡아 벌렸다. 마치 가축 시장에 온 것 같은 광경이었는데, 문제는 여기 서 있는 게 짐승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거였다. 나 포함해서. 나는 순응하기로 마음먹은 만큼 최대한 눈을 내리깔고 조용히 서 있으려 했는데, 심장은 그와 반대로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겉으로는 태연한 척, 속으로는 오만 생각이 다 들었다. 이게 사람이 상품이 되는 순간이구나, 라는 생각이 들자 속이 뒤틀렸다. 두촌에서 배운 대로라면 이런 순간엔 그저 버티는 게 최선이었다. 눈에 띄지 말고, 소리 내지 말고, 시키는 대로 하다가 기회가 오면 도망친다. 계획은 그럴싸했는데, 실행 단계에서 계획이란 늘 배신을 때리는 법이었다. "다음, 저 애." 진행자가 나를 가리켰을 때, 나는 순순히 단상 위로 올라섰다. 발밑의 나무판이 낡아서 삐걱거리는 소리를 냈는데, 그 소리조차 지금 이 순간엔 유난히 크게 들렸다. 여러 사람의 시선이 나에게 쏟아졌는데, 그 시선들 중에 유독 다른 색깔의 시선이 하나 있었다. 단상 아래 조금 떨어진 곳, 검은 로브를 두른 여인 하나가 팔짱을 낀 채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 시선을 마주친 순간, 나는 온몸에 소름이 돋는 걸 느꼈다. 이건 단순한 시선이 아니었다. 마치 내 안의 무언가를 꿰뚫어 보는 듯한, 설명하기 힘든 압도감이 있었다. 다른 상인들이 물건을 고르듯 훑어보는 시선과는 질적으로 달랐다. 저건 마치, 뭐랄까, 이미 다 알고 있다는 눈빛이었다. 뭘 알고 있다는 건데? 나도 모르는 걸 저 여자가 어떻게 아는데? "저분이..." 나는 옆에 서 있던 다른 아이에게 조용히 물었다. 아이는 겁에 질린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성주님이셔. 선유라님." 그 말을 하는 아이의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는데, 나는 그 떨림이 뭘 의미하는지 굳이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그 이름을 듣는 순간, 나는 다리에 힘이 풀리는 걸 느꼈다. 선유라. 곽만석과 마을 사람들의 입을 통해서만 듣던 그 이름이, 지금 내 눈앞에 실체로 서 있었다. 마을 사람들은 그 이름을 입에 올릴 때마다 목소리를 낮췄고, 아이들을 재울 때 겁주는 용도로도 곧잘 써먹었다. "말 안 들으면 선유라님이 잡아간다"는 식으로. 그런데 그 무서운 이름의 주인이 지금 내 눈앞에서, 나를, 정확히 나를 보고 있었다. 겉모습은 이십 대 후반쯤으로 보이는 여인이었는데, 새하얀 피부와 짙은 붉은 눈동자가 인상적이었다. 피부가 너무 하얘서 오히려 부자연스러울 정도였고, 붉은 눈동자는 마치 살아있는 보석 같았다. 그 눈동자가 나를 응시하는 순간, 나는 숨쉬는 법을 잊은 것처럼 그 자리에서 굳어버렸다. 숨을 쉬어야 한다는 사실조차 뒤늦게 자각하고 헐떡이듯 숨을 들이켰는데, 그 순간에도 그 여자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은 채 계속 나를 보고 있었다. "저 아이로 하겠네." 낮고 서늘한 목소리가 경매장을 울렸다. 진행자가 즉시 고개를 숙이며 가격을 흥정하려 했지만, 선유라는 손을 살짝 들어 그 흥정을 잘라버렸다. "값은 부르는 대로 주지. 대신 서두르게." 그 말 한마디에 진행자의 허리가 더 깊이 굽었다. 여기서 이 여자의 위치가 어느 정도인지 굳이 설명이 필요 없었다. 순식간에 상황이 정리됐다. 나는 은화 뭉치와 교환되어 선유라의 시종처럼 보이는 여인, 나중에 박순덕이라는 이름을 알게 된 그 사람의 손에 넘겨졌다. 박순덕은 나를 마차 쪽으로 이끌면서도 눈길 한 번 제대로 주지 않았는데, 그 무심함이 오히려 더 소름 끼쳤다. 사람 하나를 넘겨받는 일이 이렇게까지 일상적일 수 있다니. 모든 게 너무 빠르게 진행되어서, 나는 정신을 차릴 틈도 없이 마차에 실렸다. 이게 지금 벌어지고 있는 일인가, 라는 실감이 조금씩 뒤늦게 찾아왔다. 순응하며 눈에 띄지 않게 살겠다는 다짐은, 세워지기도 전에 무너졌다. 나는 이미 이 세계에서 가장 위험하다는 존재의 손에 팔려버린 뒤였다. 계획이 실행 첫 단계에서 이렇게 완벽하게 박살날 줄은 몰랐는데, 두 번째 삶이라고 뭐가 다르겠나 싶기도 했다. "놀란 얼굴이구나." 마차 안에서 선유라가 나를 힐끗 보며 말했다. 목소리는 여전히 서늘했지만, 그 안에 묘한 흥미가 섞여 있었다. "겁먹지 않아도 된다. 당장 잡아먹을 생각은 없으니." "감사합니다." 나는 최대한 공손하게 대답했지만 속으로는 당장이 아니면 나중에는 잡아먹는다는 거냐, 라는 반문이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겉과 속의 괴리가 이렇게 심한 건 이 세계에 온 이래로 매번 겪는 일이었지만, 이번엔 그 격차가 유독 크게 느껴졌다. 마차가 덜컹거릴 때마다 나는 속으로 오만 가지 시나리오를 그렸다가 지웠다. 지금 뛰어내리면 살 수 있을까. 아니, 저 여자가 흡혈귀라면 나보다 빠를 텐데. 그럼 그냥 죽는 건가. 이런 생각을 하는 동안에도 겉으로는 얌전히 앉아 창밖을 보는 척했다. 성에 도착한 뒤, 나는 다른 시녀들과 함께 방을 배정받고 몇 가지 규칙을 전달받았다. 방을 안내해주는 시녀들의 얼굴엔 하나같이 묘한 그림자가 있었는데, 그게 두려움인지 무기력인지 구별하기 어려웠다. 그리고 그 규칙들 중 가장 충격적인 건, 바로 그날 밤 알게 되었다. "오늘부터 네가 할 일은 이거다." 박순덕이 무표정하게 나를 방으로 데려가며 말했다. 방 안에는 작은 침대와 화장대, 그리고 낯선 도구들이 놓여 있었다. 처음엔 그 도구들이 뭔지 짐작조차 못 했는데, 은빛으로 반짝이는 작은 칼과 유리병들을 보고서야 뭔가 잘못됐다는 확신이 들었다. "성주님께 정기적으로 혈액을 제공하는 일이야." 혈액을 제공한다는 말을 들은 순간, 나는 온몸이 얼어붙는 걸 느꼈다. 마을에서 소문으로만 듣던 그 일이, 지금 내 앞에 현실로 던져진 것이었다. 두촌 사람들이 밤마다 아이들을 재우며 겁주던 그 이야기가, 알고 보니 전부 사실이었던 셈이다. "거절할 수는... 없는 거죠?" 나는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지만, 그 물음 자체가 이미 답을 알고 있다는 걸 드러내는 질문이었다. "없어." 박순덕의 대답은 짧고 단호했다. "성주님께서 직접 고른 아이야. 영광으로 여겨도 될 정도지." 그녀의 목소리엔 진짜 그렇게 믿는 듯한 확신이 담겨 있었는데, 나는 그 확신이 무서웠다. 이 사람은 진심으로 저게 영광이라고 믿고 있었다. 선유라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이 어디까지 뻗어 있는지, 그 순간 짐작조차 하기 힘들었다. 영광이라니. 내 피를 뽑아가는 게 영광이라니. 이 성 안에서는 상식이라는 게 어떻게 작동하고 있는 건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았다. 그날 밤, 나는 잠을 이루지 못한 채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낯선 침대는 두촌의 초가집보다 훨씬 폭신했지만, 그 폭신함이 오히려 불편하게 느껴졌다. 열이레 전까지만 해도 나는 두촌의 초가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웅크려 자고 있었는데, 지금은 흡혈귀 영주의 성에서 혈액을 제공하는 임무를 맡은 시녀가 되어 있었다. 인생이 이렇게 빠르게 뒤바뀔 수 있다는 걸, 두 번째 삶을 살면서도 새삼 실감하게 될 줄은 몰랐다. 식은땀이 흐르는 걸 느끼며 나는 몇 번이나 이 상황을 되짚어봤다. 도망칠 방법은 없을까. 이 성벽 안에서 어떻게든 존재감을 지우고 조용히 살아갈 방법은 없을까. 창밖을 슬쩍 내다봤는데, 높은 성벽과 그 위를 순찰하는 병사들의 그림자가 보였다. 도망친다는 선택지는 애초에 성립하지 않는 것 같았다. 그럼 순응해야 하나. 그런데 그 순응의 대가가 정기적으로 피를 뽑히는 거라면, 이건 순응이 아니라 그냥 서서히 죽어가는 거 아닌가. 그런 생각들 사이로, 이상하게 자꾸 그 붉은 눈동자가 떠올랐다. 두려움과는 다른, 뭔가 설명하기 힘든 감정이 그 눈동자를 떠올릴 때마다 마음 한구석을 건드렸다. 그게 뭔지 스스로도 정의할 수 없어서 더 답답했다. 무서운 건 확실한데, 그 무서움 안에 다른 뭔가가 섞여 있는 것 같았다. 나는 애써 그 생각을 밀어내고 잠을 청하려 했지만, 잠은 끝끝내 오지 않았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첫 번째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선유라의 방으로 불려갔다. 복도를 걷는 동안 마주친 다른 시녀들은 하나같이 나를 힐끗거리다가 시선을 피했는데, 그 반응이 뭘 의미하는지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알 것 같았다. 문 앞에 서서 나는 심호흡을 몇 번이나 했는데,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이 문을 열고 들어가면, 내 몸에서 처음으로 그 존재에게 피를 내어주는 순간이 시작된다는 걸 알고 있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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