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결혼식이라고 부르기엔 너무 조용했다.
하객도 없었고, 꽃도 없었고, 축가도 없었다. 그저 신전 안쪽 작은 방에서 사제 한 명이 서류에 도장을 찍는 소리만 들렸을 뿐이었다. 창문으로 들어오는 햇빛조차 인색해서, 방 안은 종일 그늘진 겨울 오후처럼 서늘했다.
나, 한서연은 그렇게 이경헌 백작의 아내가 되었다.
도장이 찍히는 소리는 생각보다 작았다. 쿵, 하고 뭔가 무너지는 소리를 기대했는데, 그냥 톡, 하고 마는 소리였다. 인생이 바뀌는 순간이 이렇게 시시할 수도 있구나. 그 생각을 하며 나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았다.
아버지는 도장이 찍히는 순간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그것도 아주 크게, 참았던 숨을 몰아서 뱉는 것처럼. 그 표정을 보고 나는 웃음이 나올 뻔했다. 딸을 팔아넘긴 사람의 얼굴이 저렇게 편안해 보일 수 있다니. 마치 밀린 세금을 다 낸 사람 같은 표정이었다.
어쩌겠어. 원래 그런 사람이었으니까.
한도윤 백작가는 삼 년 전부터 빚에 허덕이고 있었다. 아버지의 사업 실패가 시작이었고, 거기에 오빠 한서준의 방탕한 소비가 기름을 부었고, 언니 한서인의 사교계 유지비가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파티마다 새 드레스를 맞추고, 마차를 새로 들이고, 보석을 사들이는 언니를 보면서도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말해봤자 소용없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그렇게 저택 하나를 겨우 붙들고 있는 처지에서, 그 빚을 단번에 갚아준 사람이 이경헌 백작이었다. 조건은 하나, 나였다.
왜 나였는지는 아직도 모른다.
언니가 아니라 나. 예쁘고 사교성 좋은 언니 대신, 그 집에서 제일 조용하고 눈에 안 띄는 나를 골랐다는 게 이상하지 않은가. 언니는 그 소식을 듣고 방문을 세게 닫으며 화를 냈다. 정확히는, 나한테 화를 낸 게 아니라 자기가 선택받지 못했다는 사실에 화를 낸 거였지만.
“왜 하필 너야?”
그게 언니가 나한테 한 마지막 말이었다. 나도 그게 궁금했는데, 언니 입에서 들으니까 더 웃겼다. 왜 하필 나냐고? 나도 알고 싶다고요, 언니.
하지만 이상한 걸 따질 처지가 아니었다. 조건을 따지고 이유를 캐물을 자격은, 이 집안에서 나에게 없었다. 나는 그저 이 결혼으로 이 집에서 벗어난다는 사실 하나에만 집중하기로 했다.
조용히 살고 싶었다. 그게 다였다.
귀족 사회에서 튀지 않고, 누구의 시선도 끌지 않고, 그저 이름 없는 백작 부인으로 살아가는 것. 그거면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더는 누구의 방패막이가 되지 않아도 되는 삶. 더는 언니의 봉사 활동을 대신 뛰고, 오빠의 실수를 뒤집어쓰고, 동생의 변명을 대신 만들어주지 않아도 되는 삶.
생각해보면 나는 이 집에서 늘 그런 역할이었다. 누구도 원하지 않는 일을 대신 하는 사람. 언니가 무도회에서 실수하면 내가 사과하러 다녔고, 오빠가 도박으로 진 빚은 내가 상인들을 찾아다니며 사정을 설명했다. 그런데 이제는 아니다. 이제는 그냥 이경헌 백작의 아내, 그거 하나만 하면 된다.
그거 하나면, 남편이 누구든 상관없었다.
마차에 올라탈 때 이경헌 백작을 처음으로 제대로 보았다.
금발이 햇빛을 받아 반짝였고, 눈은 겨울 호수처럼 푸르렀다. 소문대로 잘생긴 얼굴이었다. 사교계에서 도는 이야기로는, 웬만한 초상화 화가도 그 얼굴을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다고 했다. 직접 보니 과장이 아니었다.
하지만 소문에는 없던 것도 있었다.
그 눈이 나를 보는 방식이었다.
마치 오래 잃어버린 뭔가를 다시 찾은 사람 같은 눈빛. 그게 이상하게 낯설지가 않았다. 아니, 낯설어야 정상인데 낯설지 않았다는 게 더 이상했다. 나는 이 남자를 오늘 처음 봤는데, 저 눈빛은 마치 몇 년을 알고 지낸 사람을 보는 것 같았다.
기분 탓이겠지. 결혼식 날이라 다들 예민해지는 거니까.
“불편한 게 있으면 바로 말해.”
그의 첫 마디는 그거였다. 명령형이었지만, 명령보다는 부탁처럼 들렸다. 목소리도 낮고, 어딘가 조심스러운 데가 있었다. 백작이라는 신분에, 저런 얼굴을 가진 남자가 저렇게 말할 줄은 몰랐다.
“네, 알겠습니다.”
나는 형식적으로 대답했다. 속으로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불편한 거 있어도 말 안 할 거예요, 괜히 트집 잡히기 싫으니까. 이 결혼 생활이 얼마나 갈지도 모르는데 벌써부터 요구 사항을 늘어놓을 순 없잖아. 조용히, 눈에 안 띄게, 그게 내 목표니까.
마차 안은 조용했다. 창밖으로 익숙한 거리 풍경이 지나갔다. 내가 십팔 년을 살았던 동네였는데, 이상하게 낯설게 느껴졌다. 이제 다시는 저 거리를 내 집으로 돌아가는 길로 걷지 않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가 이따금 나를 힐끔거리는 게 느껴졌다. 그 시선이 부담스러워서 창밖만 보고 있었는데, 문득 그가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뭐라고요? 되물으려 했지만 그는 이미 창밖으로 시선을 돌린 뒤였다. 표정도 다시 무심하게 돌아와 있었다. 방금 그 말을 한 사람이 맞나 싶을 정도로.
못 들은 척했다. 이상한 걸 캐물어봐서 좋을 게 없다는 건 이 집안에서 자라면서 배운 유일한 생존 기술이었으니까. 궁금한 걸 참는 데는 도가 텄다.
마차는 예상보다 오래 달렸다. 창밖 풍경이 도심에서 점점 넓은 영지로 바뀌어 갔다. 나무가 많아지고, 사람들이 줄어들고, 대신 잘 손질된 정원과 울타리가 보이기 시작했다. 이경헌 백작가의 영지가 이렇게 넓었나. 소문으로는 들었지만 직접 보니 실감이 났다.
저택에 도착했을 때, 나는 상상했던 것과 완전히 다른 광경을 마주했다.
냉담한 남편, 형식적인 대우, 방구석에 처박혀 지내는 백작 부인 생활. 그런 걸 예상했다. 결혼했으니 최소한의 격식은 차리겠지만, 그 이상의 관심은 없을 거라고. 나는 그 정도로 만족하려고 했다.
그런데 저택 앞에 늘어선 하인들의 수가 이상할 정도로 많았다. 얼핏 세어도 스무 명은 훌쩍 넘었다. 백작 부인 한 명 맞이하는 데 이렇게 많은 인원이 필요한가?
그리고 그들 모두가 나를 보며 인사를 하는데, 그 표정이 하나같이 긴장돼 있었다. 마치 뭔가 엄청난 일이 벌어질 걸 예감하는 사람들처럼. 몇몇은 나를 보고 눈을 크게 뜨더니, 옆 사람과 눈짓을 주고받기도 했다.
대체 뭐지, 저 눈빛들은.
나는 조용히 살고 싶어서 왔을 뿐인데, 이 저택은 마치 나를 위한 무언가를 준비해놓고 기다리고 있었던 것 같은 분위기였다. 등줄기가 서늘해졌다.
“부인을 위해 준비를 좀 했습니다.”
경헌이 그렇게 말하며 저택 문을 열었을 때, 나는 그 ‘좀’이라는 단어의 무게를 전혀 짐작하지 못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