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화
‹ ›가로챘다는 소문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인지 처음엔 이해가 안 됐다.
편지를 손에 쥔 채로 한참을 멍하니 서 있었다. 아침 햇살이 창문으로 들어와 종이 위에 얼룩처럼 내려앉는데, 그 위에 쓰인 글자들은 하나도 이해가 안 됐다. 윤재하 남작? 처음 듣는 이름이었다.
나는 그 사람을 만난 적도 없었다. 얼굴도, 목소리도, 심지어 어떻게 생긴 사람인지도 몰랐다. 그런데 내가 그 사람의 혼처를 가로챘다니.
이게 무슨 억지야, 진짜.
편지를 몇 번이나 다시 읽었다. 아버지의 필체는 늘 그렇듯 급하고 거칠었다. 글자 하나하나가 종이를 파고들듯 진하게 눌려 있었는데, 이건 아버지가 화가 났을 때 나오는 특징이었다. 뭔가 급박한 일이 생기면 늘 남에게 뒤집어씌우는 방식으로 문제를 해결하려는 사람이었으니, 이번에도 그런 걸까 싶었다.
역시나였다.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이랬다.
윤재하 남작은 원래 언니 한서인과 혼담이 오가던 상대였다. 두 집안 사이에 어느 정도 이야기가 진행되고 있었다고 했다. 그런데 그 혼담이 갑작스럽게 깨졌고, 대신 내가 이경헌 백작과 결혼했다는 소식이 퍼지면서 이상한 소문이 돌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한서연이 언니의 혼처까지 가로챘다.』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나는 이경헌 백작과의 결혼 자체도 원한 게 아니었는데, 어떻게 언니의 혼처를 가로챘다는 소리를 듣는 건지. 애초에 내가 원해서 한 결혼도 아니고, 아버지가 다 결정해놓고 나한테는 통보만 한 거였는데.
억울해서 코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소문은 이미 사교계에 퍼지고 있었고, 그 소문의 진원지는 아무래도 우리 집안 쪽인 것 같았다. 노명자가 지나가듯 흘린 말들을 모아보면 대충 그림이 맞춰졌다.
왜 그런 소문을 냈을까 생각해보니, 답은 뻔했다. 자기 딸 하나가 유리한 결혼을 했다는 게 알려지면 좋을 게 없다고 생각한 거겠지. 백작 부인이 된 딸이 있다는 건 자랑거리가 될 수도 있었을 텐데, 아버지는 그걸 다르게 봤다. 그래서 이야기를 살짝 비틀어서, 언니가 원래 더 좋은 자리를 놓쳤다는 식으로 만든 거다. 그러면 언니가 안쓰럽게 보이고, 나는 얌체처럼 보이게 되니까.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나왔다. 이게 다 무슨 짓인지.
아버지 입장에서는 그럴듯한 그림이었을 거다. 나는 원래 이 집에서 늘 뒷전이었으니까. 언니가 손해를 봤다는 이야기가 돌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나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게 될 테고, 그럼 아버지는 다시 언니 편에서 위로하는 좋은 아버지 역할을 할 수 있는 거다.
정말이지, 이렇게까지 머리를 잘 쓸 거면 진작 재산 관리나 좀 잘하시지.
"이건 좀 심각한 문제일 수도 있어."
경헌이 편지를 읽고 나서 미간을 좁혔다. 그 표정이 평소보다 훨씬 굳어 있었다. 늘 여유로운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던 사람이 이렇게 진지한 얼굴을 하는 건 처음 보는 것 같았다.
"윤재하 남작이라는 사람, 어떤 사람인가요?"
"그렇게 유명한 인물은 아니지만, 자존심이 강하고 뒤끝이 긴 걸로 알려져 있어. 이런 소문이 자기 명예를 건드렸다고 생각하면 쉽게 넘어가지 않을 거야."
"저는 그 사람을 만난 적도 없는데요."
"그게 문제가 아니야. 소문은 진실 여부와 상관없이 퍼지니까."
그 말이 맞았다. 진실이 뭐든 상관없이, 소문은 이미 살아서 움직이고 있었다. 사교계라는 게 그런 곳이었다. 누가 뭘 했는지보다 누가 뭘 했다고 말했는지가 더 중요한 곳.
"이 일, 부인 집안에서 만든 거야."
경헌이 낮게 말했다. 확신에 찬 어조였다. 눈빛도 흔들림이 없었다.
"어떻게 그렇게 확신하세요?"
"부인 아버지가 보낸 편지 내용을 보면, 마치 부인이 뭔가 잘못을 저지른 것처럼 몰아가고 있잖아. 자기들이 만든 소문의 뒷수습을 부인한테 시키려는 거지."
정확한 분석이었다. 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냥, 이 사람이 우리 집안을 너무 잘 알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 이상하게 느껴졌을 뿐이었다. 결혼한 지 열흘도 안 됐는데, 어떻게 우리 아버지가 어떤 식으로 생각하는지까지 이렇게 정확하게 짚어낼 수 있는 걸까.
"그렇게 잘 아세요, 저희 집안을?"
"결혼 전에 조사는 다 하고 결정하는 거니까."
너무 당연하다는 듯한 말투에 헛웃음이 나올 뻔했다. 그렇지, 이 사람한테 이 결혼은 계약이었으니까. 계약 전에 상대방 뒷조사는 기본이었겠지.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실 건데요?"
"이 일은 내가 처리할 거야. 부인은 신경 쓰지 마."
"제가 어떻게 신경을 안 써요, 저에 대한 소문인데."
"그럼 이렇게 하지. 부인은 나를 믿고, 나머지는 나한테 맡겨."
믿으라니, 그게 그렇게 쉬운 말인가. 결혼한 지 겨우 열흘도 안 된 남자한테 뭘 믿으라는 건지. 아직 서로 이름도 제대로 못 부르는 사이인데.
"믿으라는 말이 참 쉬우시네요."
"쉬운 말이 아니라 사실이야."
말투가 어찌나 단호한지, 반박할 틈도 안 주는 사람이었다. 이런 식으로 말하면 다들 그냥 넘어갈 거라고 생각하는 걸까.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의 눈빛을 보면 정말 믿어도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 눈빛에 담긴 게 단순한 자신감이 아니라, 뭔가 더 깊은 결의 같은 거였으니까. 내 편을 들어주겠다는 의지 같은 것.
이상한 일이었다. 계약 결혼이라고 그렇게 못을 박아놓은 사람이, 이럴 때는 꼭 진짜 남편처럼 굴었다.
그날 밤, 노명자가 다시 나를 찾아왔다. 지난번처럼 조심스러운 표정으로, 방문 앞에서 한 번 더 주위를 살피고서야 안으로 들어왔다.
"부인, 저번에 말씀드리려던 게 이거였어요."
그녀가 내민 건 작은 종이 조각이었다. 낡고 색이 바랜 종이였는데, 접힌 자국이 여러 번 있는 걸 보면 누군가 오랫동안 지니고 있었던 물건 같았다. 거기엔 익숙한 필체로 뭔가가 적혀 있었다.
내 필체였다.
한 글자, 한 글자, 분명히 내가 쓰는 방식 그대로였다. 자음을 살짝 흘려 쓰는 버릇까지도.
하지만 나는 이걸 쓴 기억이 전혀 없었다.
손끝이 차가워지는 게 느껴졌다. 종이를 든 손이 떨리는 걸 애써 감추면서, 나는 그 위에 적힌 문장들을 다시 한번 천천히 읽어 내려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