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설곰이 파혼녀를 주웠다

4화

대전의 촛불이 낮게 떨리고 있었다. 창끝과 창끝이 부딪히는 소리, 병사들의 거친 숨소리, 그 모든 소란 속에서 정소혜 왕비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이상하게도 그 순간부터 공기의 흐름이 달라졌다. 왕비 한 사람의 움직임이 수십 개의 창끝을 동시에 흔든 것이다. 병사들은 저마다 자신이 겨눈 방향이 옳은지 확신하지 못하는 얼굴로, 창을 든 손을 조금씩 늦추었다. 왕비는 병사들 사이를 천천히 걸어 대전 중앙으로 나섰다. 그 걸음걸이에는 조금의 서두름도 없었는데, 오히려 이 걸음이 느릴수록 이 소란이 자신의 손바닥 위에 있다는 사실이 더 선명하게 드러난다는 걸 아는 사람의 걸음이었다. 청연국 왕실에서 정소혜라는 이름이 지닌 무게를, 이서준은 평생 옆에서 지켜보며 자랐다. 어머니가 저렇게 걸을 때는 이미 결론까지 계산이 끝나 있다는 뜻이었다. "다들 무기를 내리세요." 왕비가 다시 말했다. 이번에는 명령이 아니라 권유처럼 들렸으나, 그 말이 끝나자 놀랍게도 양측 병사들이 조금씩 창을 내렸다. 대전 안의 공기가 처음으로 느슨해지는 순간이었다. 누군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고, 누군가는 여전히 창을 완전히 놓지 못한 채 왕비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왕비는 도윤서 앞에 멈춰 섰다. 그녀는 베일 안의 얼굴을 굳이 확인하려 하지 않고, 오히려 도윤서의 침묵 그대로를 존중하듯 시선을 맞추었다. 도윤서는 그 시선 앞에서 미동도 하지 않았는데, 그 고요함이 오히려 대전 안의 시선을 전부 그녀에게 끌어모으고 있었다. "참으로 훌륭한 예법이군요." 왕비가 말했다. "이런 자리에서, 이런 모욕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서 있을 수 있는 신부라니. 저는 오늘 이 자리에서 참으로 오랜만에 귀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 말에 대전 안이 잠시 조용해졌다. 왕비의 말은 도윤서를 향한 것이었지만, 그 안에는 강주헌을 향한 냉소가 분명히 섞여 있었기 때문이었다. 몇몇 사절들은 시선을 슬쩍 피했고, 몇몇은 오히려 흥미롭다는 듯 강주헌의 얼굴을 살폈다. 강주헌이 얼굴을 붉히며 무언가 말하려 했으나, 왕비는 그의 말이 나오기 전에 먼저 입을 열었다. "루한국 왕태자 전하께서 이 자리에서 혼약을 파기하셨으니, 이제 이 혼약은 완전히 끝난 것이겠지요." 왕비가 말했다. 목소리에는 조금의 흔들림도 없었다. "그렇다면 도윤서 님은 이제 자유로운 신분이라는 뜻이 되는군요." "그게 무슨 뜻입니까." 강주헌이 물었다. 목소리가 미묘하게 갈라져 있었다. "뜻 그대로입니다." 왕비가 답하며 이서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 시선이 닿는 순간 이서준은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제 아들 이서준은 아직 미혼이고, 도윤서 님은 이제 막 자유로워지셨으니, 이보다 더 자연스러운 흐름이 어디 있겠습니까." 그 말에 이서준은 숨이 멎는 것 같았다. 어머니가 즉흥적으로 상황을 장악하는 데는 익숙했지만, 이런 방식으로 자신을 이 소란 한복판에 세울 줄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심장이 이상하게 빨리 뛰었는데, 그것이 당혹감인지, 아니면 다른 무엇인지 스스로도 알 수가 없었다. 대전 안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쏠리는 걸 느끼며, 이서준은 애써 표정을 관리했다. 어머니는 왜 하필 지금, 이 사람들 앞에서 이런 말을 꺼낸 걸까? 도상현 경 역시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했으나, 곧 냉정을 되찾고 왕비에게 물었다. "왕비 전하, 이는 다온국 왕실과의 협의가 필요한 사안입니다." 목소리에는 예의를 잃지 않으려는 노력이 배어 있었지만, 그 밑에는 분명한 경계심이 깔려 있었다. "물론이지요." 왕비가 부드럽게 답했다. 그녀는 마치 이미 이 질문을 예상했던 사람처럼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말을 이었다. "하지만 지금 이 자리에서 확인해야 할 것은, 도윤서 님이 더 이상 흠결을 지닌 존재가 아니라, 이 소란을 명예롭게 견뎌낸 여인이라는 사실입니다. 그것이 확인된다면, 나머지는 시간이 해결할 문제일 뿐이겠지요." 그 말은 언뜻 도윤서를 위한 배려처럼 들렸으나, 사실은 이 자리에 있는 모든 사절들에게 하나의 서사를 새로 심어주는 발언이었다. 결함 있는 신부가 아니라, 명예를 지킨 신부. 그 한 문장이 대전 안에 퍼지는 순간 사람들의 표정이 조금씩 바뀌는 것을, 이서준은 놓치지 않고 보았다. 어머니는 말 한마디로 소문의 방향을 바꾸고 있었다. 이서준은 어머니의 이런 화법을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으나, 그것이 자신의 혼담에 이렇게 직접 쓰이는 건 처음이었다. 강주헌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어졌다. 그는 입술을 한 번 깨물었다가, 애써 침착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청연국 왕비께서 이런 식으로 개입하시는 건, 루한국에 대한 결례가 아닌지요." "결례라니요." 왕비가 웃으며 답했다. 그 웃음은 지나치게 온화해서 오히려 서늘하게 느껴졌다. "저는 그저 전하께서 스스로 끝낸 혼약의 뒷정리를 돕고 있을 뿐입니다. 아, 그리고," 왕비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다시 이었다. "노강 선정왕 전하께 안부 전해주세요. 오랜만에 이런 자리에서 다시 마주치게 되었네요." 그 이름이 나오는 순간, 대전 안의 몇몇 나이 든 사절들의 얼굴빛이 미묘하게 변했다. 정소혜 왕비와 노강 선정왕 사이에 오래된 원한이 있다는 걸 아는 이들이었다. 몇몇은 슬쩍 서로 눈짓을 주고받았고, 그 눈짓 속에는 말로 하지 못하는 지난 시절의 소문이 담겨 있는 듯했다. 강주헌은 그 원한의 정확한 내용까지는 알지 못했으나, 아버지의 이름이 언급되자 순간적으로 말을 잃었다. 그의 손이 옷자락을 움켜쥐었다가 다시 펴졌다. 이서준은 그 짧은 정적 속에서 어머니의 눈빛이 순간 날카로워졌다가 다시 부드러워지는 걸 보았다. 그 눈빛의 전환은 너무나 빨라서, 마치 처음부터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보였다. 저 이름 하나에 숨은 것이 무엇인지, 그는 아직 알지 못했다. 다만 어머니의 웃음 뒤에, 오늘 이 대전에서 벌어진 소란보다 더 오래되고 더 깊은 무언가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만은 분명했다. 이서준은 도윤서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베일 너머로 그녀가 지금 무슨 표정을 짓고 있을지, 알 수 없다는 사실이 그를 더욱 불안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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