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신탁까지 100일

4화

익명의 편지는 사흘 만에 문제가 됐다. 채원이 그 편지를 그대로 이모님, 청하 자작부인에게 보여드린 게 화근이었다. 채원 입장에서는 당연한 행동이었다. 낯선 경고를 받았으니 어른에게 알리는 게 맞았으니까. 나였어도 그렇게 했을 거다. 그러니 채원을 탓할 수는 없었다. 탓해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건 필체를 어설프게 바꾼 나 자신이었다. 문제는 바로 그 필체였다. "이 필체, 낯설지가 않구나." 이모님이 응접실 테이블 위에 그 편지를 펼쳐 보이며 말했을 때, 나는 최대한 무표정을 유지했다. 종이를 응시하는 이모님의 손끝이 편지 위를 천천히 훑고 지나갔다. 마치 필적 하나하나를 눈에 새기려는 것처럼. 식은땀이 등을 타고 흐르는 게 느껴졌다. '설마 진짜로 알아채신 건 아니겠지.' 필체를 바꿔 쓰긴 했지만, 완벽하게 바꾸진 못했던 모양이었다. 급한 마음에 대충 흘려 쓴 게 화근이었을까. 아니면 원래 필체 습관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지워지는 게 아닌가 보다. "서윤이 너, 이거 아니지?" 어머니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 목소리에서 이미 절반의 확신이 느껴졌다. 어머니는 나를 너무 잘 알았다. "제가 왜 그런 걸 보내겠어요." 나는 최대한 담담하게 대답했다. 표정 하나 흔들리지 않고, 눈도 피하지 않고. 형식적으로는 완벽한 부정이었다. 속으로는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고 있었지만, 겉으로는 티 내지 않는 게 이 집안에서 살아가는 최소한의 생존 기술이었다. 다행히 그 자리에서는 별다른 일이 벌어지지 않았다. 이모님도 더 이상 캐묻지 않으셨고, 어머니도 그쯤에서 화제를 돌리셨다. 나는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이 정도면 넘어간 건가, 하고. 그런데 그날 오후, 신전에서 사람이 왔다. 신전 감시자라 불리는 이들이었다. 신탁을 받은 이를 보호하고, 동시에 감시하는 역할을 맡은 신관들. 신탁이 내려진 이후로는 그 사람의 주변 인물 전부가 감시의 대상이 된다고 들었다. 좋은 뜻으로 붙이는 건지, 아니면 그저 통제하기 위한 명분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회색 로브를 입은 젊은 신관이 우리 저택 응접실에 들어섰을 때, 나는 그 눈빛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무언가를 캐내려는 듯한, 상대의 표정을 하나하나 뜯어보는 듯한 눈빛이었다. "윤채원 양께 접촉한 이들의 명단을 파악하는 중입니다." 신관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억양 없이, 마치 미리 준비해온 문장을 그대로 읽는 것처럼. "최근 익명의 서신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만." "저희 쪽에서도 알아보는 중이에요." 어머니가 대신 답했다. 신관의 시선이 잠깐 나에게 머물렀다. 아주 짧은 순간이었는데도, 그 시선이 몸에 콱 박히는 느낌이었다. "이서윤 양께서는, 채원 양과 자주 만나신다고 들었는데요." 그가 물었다. "사촌이니까요." 나는 짧게 대답했다. 더 길게 말할수록 의심을 살 것 같았으니까. "그렇군요." 신관은 더 이상 캐묻지 않았지만, 나는 그 시선에서 뭔가 남은 의심을 느꼈다. 완전히 믿는 눈빛은 아니었다. 그저 지금은 확신할 근거가 없어서 넘어가는 것뿐이라는, 그런 눈빛. 신관이 돌아간 뒤에도 그 눈빛이 계속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나는 방으로 올라가서도 한참을 진정하지 못했다. 그날 밤, 나는 정원 벤치에 앉아 생각을 정리하고 있었다. 밤바람이 제법 찼다. 겉옷을 좀 더 챙겨 입고 나올걸, 하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지만 다시 들어가기는 귀찮았다. 이럴 때 보면 나도 참 게으른 인간이다 싶다. 편지를 보낸 게 들켰다면 위험할 수도 있었다. 신전 쪽에서 나를 채원의 신탁에 개입하려는 사람으로 볼 수도 있었으니까. 그렇게 되면 나 역시 감시 대상이 될 거고, 어쩌면 더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릴 수도 있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두렵지가 않았다. 오히려 확실해진 게 하나 있었다. 누군가는 채원을 압박하고 있고, 신전 쪽도 그 압박의 배후를 아직 완전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 그렇지 않다면 저렇게 사람을 보내서 이것저것 캐물을 이유가 없었다. 신전이 확신을 갖고 있었다면 이미 뭔가 조치가 있었을 테니까. '그럼 나는,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나.' 계속 뒤에서 편지나 보내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번처럼 필체가 들키면 다음엔 정말 큰일이 날 수도 있었다. 좀 더 확실한 정보가 필요했다. 채원을 압박하는 배후가 누구인지, 그 목적이 뭔지. "거기 앉아서 뭘 그렇게 생각해?" 이도윤 오라버니가 다가와 옆에 앉았다. 손에 들고 있던 겉옷을 슬쩍 내 어깨에 걸쳐주면서. "오라버니, 신전 감시자가 왔던 거 아세요?" "들었어." 오라버니가 대수롭지 않게 대답했다. "그 편지, 네가 보냈지?" 나는 순간 굳었다. 심장이 쿵 내려앉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어떻게 아셨어요?" "필체가 너무 어설프게 바뀌어 있던걸." 오라버니가 픽 웃었다. 그 웃음이 얄미울 정도로 여유로웠다. "다행히 아버지나 이모님 쪽에서는 아직 확신을 못 하시는 것 같더라." "저 혼내실 거예요?" "아니." 오라버니는 뜻밖의 대답을 했다. "오히려 잘했다고 생각해." 나는 그 말에 조금 놀랐다. 이렇게 순순히 넘어갈 줄은 몰랐는데. "진짜요? 저 완전 혼날 각오하고 있었는데." "혼낼 일이었으면 진작 혼냈지." 오라버니가 팔짱을 끼며 벤치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네 판단이 맞았어. 그 다과회 초대장들, 알아보니까 전부 특정 인물이 주선한 자리였더라." 오라버니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평소의 여유로운 표정이 사라지고, 뭔가를 신중하게 고르는 듯한 얼굴이었다. "청하 자작부인과 가깝게 지내는 쪽에서 마련한 자리들이야." 청하 자작부인. 이모님. 나는 잠깐 숨을 멈췄다. 밤바람이 갑자기 더 차갑게 느껴졌다. "이모님이…… 채원이를 압박하는 쪽에 서 계신다는 뜻이에요?" "확실친 않아." 오라버니가 고개를 저었다. "그런데 이상한 점이 하나 있어." 오라버니가 목소리를 낮췄다. 마치 벽 너머에 누가 있을까 조심하는 것처럼. "이모님이 최근에 한백작과 자주 서신을 주고받으신다는 얘기가 있어." 한백작. 한지혁의 아버지. 나는 그 순간 등줄기가 서늘해지는 걸 느꼈다. 밤바람 때문이 아니었다. 채원의 신탁, 한지혁의 관심, 이모님의 개입. 이 세 가지가 우연히 겹치는 게 아니라면, 그렇다면 이건 정말 큰 그림의 일부라는 뜻이었다. "오라버니, 설마……" "아직 확신할 단계는 아니야." 오라버니는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벤치에 걸쳐준 겉옷을 다시 벗기지 않고 그대로 두고서. "하지만 조심해서 지켜봐. 네가 이미 이 안에 들어와 있으니까." 그 말이 유난히 무겁게 들렸다. 나는 그 말을 곱씹으며 방으로 돌아왔다. 계단을 올라가는 발걸음이 평소보다 느렸다. 어쩌다 이렇게 된 걸까. 나는 그냥 조용히 신탁을 피해 가려던 것뿐인데. 채원한테 몰래 편지 한 통 보내서, 위험한 자리 조심하라고 슬쩍 알려주려던 것뿐인데. 그런데 이제는, 이 모든 것의 한복판에 서 있었다. 이모님. 한백작. 그리고 그 사이에서 위태롭게 흔들리는 채원의 신탁. 나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어두운 정원 위로 달빛이 옅게 깔려 있었다. 저 멀리, 이모님이 계시는 별채 쪽 창문에서 아직도 불빛이 새어 나오고 있었다. 이 밤중에 저렇게 불을 켜두고 뭘 하시는 걸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지금 이 순간, 이모님도 나처럼 누군가와 편지를 주고받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나는 그 불빛을 한참 동안 바라보다가, 결국 커튼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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