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신탁까지 100일

5화

이모님을 의심하게 된 뒤로, 나는 채원을 더 유심히 지켜보게 됐다. 채원은 여전히 아무것도 몰랐다. 여전히 밝게 웃었고, 여전히 초대받은 자리마다 순수하게 반가워했다. 그 애는 방문을 열고 들어올 때마다 치맛자락을 팔랑거리며 뛰어왔고, 서신 한 장에도 온 얼굴이 환해졌다. 그 애의 순진함이 이제는 걱정스러웠다. 예전에는 그냥 부럽던 그 순진함이, 지금은 마치 얇은 유리 같아서 조금만 세게 쥐면 깨질 것처럼 위태로워 보였다. 한지혁과의 접촉도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서신은 이제 거의 사흘에 한 번씩 도착했고, 그마다 채원의 방에는 새로운 장식 하나씩이 늘어났다. 리본, 손수건, 조그만 세공 브로치. 그 애는 그것들을 침대 위에 늘어놓고 나에게 하나하나 자랑했다. "오늘도 한 도련님이 서신을 보내셨어요." 채원은 그 서신을 흔들며 신나 했다. "다음 주 사냥 대회에 초대하셨는데, 언니도 같이 가실래요?" "글쎄." 나는 애매하게 대답했다. 사냥 대회라니. 웃음이 나올 뻔했다. 한지혁이 사냥을 잘한다는 얘기는 들어본 적도 없는데, 굳이 그런 자리를 만드는 이유가 뭘까. 사람들 앞에서 채원을 에스코트할 명분이 필요했던 거겠지. 나는 서신 겉면에 찍힌 한백작가의 인장을 물끄러미 바라봤다. 한지혁이 채원에게 마음을 두는 건, 사실 내가 신경 쓸 일이 아니었다. 그 실이 나에게서 풀려나는 거니까. 오히려 나는 그게 다행이라고 생각했었다. 나한테 얽혀 있던 혼담의 끈이 저절로 풀리고 있으니까. 그런데 이 모든 게 이모님의 손 안에서 조종되고 있다면, 얘기가 완전히 달라졌다. 채원은 도구가 되고 있었다. 그것도 자기가 도구가 되고 있다는 것조차 모르는 채로. 그게 제일 마음에 걸렸다. 적어도 알고 이용당하는 거라면 억울하지나 않을 텐데, 채원은 그저 자신이 사랑받고 있다고 믿고 있었다. "채원아, 사냥 대회 말고, 그 다음 신전 공표식은 어떻게 준비하고 있어?" 나는 조심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아, 그거요? 이모님이 다 알아서 해주신다고 하셨어요. 저는 그냥 예쁜 옷 입고 가면 된대요." 채원이 순진하게 웃었다. "어떤 옷인지 알아?" "아직 몰라요. 이모님이 특별히 맞춰주신다고 하셨거든요. 색깔도 비밀이래요! 저는 그냥 기대만 하면 된다고." 비밀이라는 말이 마음에 걸렸다. 보통 이런 자리의 예복은 가문의 문양과 색을 미리 알려서, 다른 초대 손님들의 옷차림이 겹치지 않게 조율한다. 그런데 비밀이라니. 나는 그 대답을 들으며, 뭔가 확신에 가까운 불안을 느꼈다. 채원은 여전히 눈치채지 못한 채 옷장 앞에서 리본 색을 고르고 있었고, 나는 그 애의 등을 바라보며 속으로 계산을 시작했다. 다음 날, 나는 어머니에게 조용히 물었다. "어머니, 이모님이 요즘 한백작가랑 왕래가 많으신가요?" 어머니는 찻잔을 내려놓으며 살짝 눈을 크게 떴다. "글쎄, 왜 그런 걸 묻니?" "그냥, 궁금해서요." "그러고 보니 최근에 자주 만나시더구나. 채원이 혼처 문제로 상담하시는 것 같던데." 어머니는 아무 의심 없이 대답했다. "네 이모가 워낙 채원이를 아끼시니까. 그 애 어릴 때부터 손수 키우다시피 하셨잖니." 아끼는 것과 이용하는 것 사이의 거리는, 생각보다 가까웠다. 어머니의 얼굴에는 한 치의 의심도 없었다. 나는 찻잔을 들었다가 다시 내려놓았다. 입맛이 없었다. 나는 그날 오후, 이도윤 오라버니를 다시 찾아갔다. 서재 문을 두드리기도 전에 오라버니는 이미 서류를 밀어두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오라버니, 확인해봐야 할 게 있어요. 채원이 신전 공표식 때 입을 옷을, 이모님이 직접 준비하고 있대요." "그게 왜?" "보통 그런 큰 행사에 입는 예복은, 가문의 격을 드러내는 방식으로 정하잖아요. 정해진 절차대로 색을 미리 공표하고요. 그런데 이모님이 직접 나서서, 비밀로 준비한다는 게, 좀 이상해요." 오라버니가 잠깐 생각하더니 물었다. "네 생각엔 뭘 의심하는 거야?" "공표식 날, 채원이가 한백작가와 관련된 색이나 문양을 걸치게 될까 봐요. 그러면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두 가문의 결합을 신탁이 축복한 것처럼 받아들이겠죠. 신전 한복판에서, 모두가 보는 자리에서요." 오라버니의 표정이 굳었다. "그거 꽤 그럴듯한 추측인데." "확인할 방법이 있을까요?" "내가 알아보겠다." 오라버니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창가로 걸어가더니, 잠시 바깥을 내다보며 말을 골랐다. "네 판단력, 생각보다 쓸만하구나." 나는 그 말에 조금 웃었다. "원래도 쓸만했어요." "그래, 그건 이제 아버지께도 말씀드려야 할 것 같다." 오라버니의 표정이 진지해졌다. "이건 우리 가문 문제이기도 해. 신탁의 총애를 받은 사람을 어느 가문이 데려가느냐는, 앞으로 정치적 무게가 완전히 달라지는 문제니까. 한백작가가 신탁을 손에 넣으면, 조정 안에서의 입지가 지금과는 비교도 안 되게 커질 거야." 나는 그 말을 들으며, 처음으로 이 일이 나 혼자만의 걱정이 아니라는 걸 실감했다. 어깨에 얹혀 있던 무게가 조금은 나눠지는 느낌이었지만, 동시에 이 일이 내가 감당할 수 있는 크기를 넘어섰다는 뜻이기도 했다. 그날 밤, 아버지가 나를 서재로 불렀다. 아버지 앞에 앉는 건 오랜만이었다. 늘 문서 더미에 둘러싸여 있는 그 책상 앞에서, 나는 어릴 때처럼 손을 무릎 위에 가만히 올려두었다. 아버지는 서류를 내려놓고 나를 오래 바라보다가, 낮게 물었다. "도윤이한테 들었다. 이모님을 의심한다고?" 나는 순간 긴장했다. "확신은 아니에요. 그냥…… 이상한 점들이 있어서요." "네 판단이 맞다면, 이건 단순한 가정 문제가 아니게 된다." 아버지의 목소리가 낮게 가라앉았다. "한백작가와 청하 자작가가 신탁을 이용해서 무언가를 도모하고 있다는 뜻이니까." "저도 그게 걱정이에요." 아버지는 잠시 침묵했다가, 뜻밖의 말을 꺼냈다. "내일, 신전에서 사람이 다시 온다는구나. 이번엔 노신관이 직접." 나는 그 말에 순간 숨이 막혔다. 노신관이 직접 온다는 건, 이 일이 이미 신전 내부에서도 심상치 않게 다뤄지고 있다는 뜻이었다. 신전이 그렇게 쉽게 사람을 움직이는 곳이 아니라는 걸, 나는 알고 있었다. 특히 노신관은 신전에서도 함부로 발걸음을 옮기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리고 노신관이라면, 내가 받은 그 비밀 신탁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만약 이 자리에서 그가 그 얘기를 꺼낸다면. 머릿속이 하얘졌다. 그 말이 오가는 자리에 아버지가, 오라버니가, 혹시 채원까지 함께 있다면. 나는 그 순간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손끝이 차가워지는 걸 느꼈다. 나는 그 밤, 한숨도 자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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