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화
›명화국의 늦가을 하늘은 유난히 맑았는데, 이서연은 그 맑음이 오히려 원망스러웠다. 사람들의 시선이 이토록 선명하게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날이라면, 하늘이라도 흐려서 눈을 가려주었으면 싶었기 때문이었다. 혼약 파기라는 말이 사교계 전체에 퍼지는 데는 반나절도 걸리지 않았고, 그녀는 지금 자신의 방 안에서 짐을 정리하다가도 문득 손이 멈추곤 했다. 정윤호의 마지막 말이, 그 냉랭한 얼굴이, 그리고 그 곁에 서 있던 한소이의 화사한 미소가 자꾸만 눈앞에서 재생되었기 때문이었다.
······됐다. 이제 와서 그 얼굴을 떠올려봤자 무엇이 달라지겠는가.
이서연은 애써 고개를 저으며 옷가지를 정리하던 손을 다시 움직였다. 방 안 가득 널브러진 짐가방들 사이로, 하녀들의 시선조차 예전 같지 않다는 것을 그녀는 이미 눈치채고 있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아가씨, 아가씨' 하며 종종거리던 이들이, 오늘은 눈도 마주치지 않고 방문 앞을 서둘러 지나갔으니까. 파혼당한 영애란 그런 존재였다. 어제까지의 신분이 무색해지고, 오늘부터는 그저 짐짝처럼 취급받는.
돌아갈 곳도 없었다. 하린 백작가는 이미 그녀를 짐짝처럼 취급하기 시작했는데, 아버지는 편지 한 장으로 "당분간 조용히 지내라"는 말만 남겼을 뿐이었다. 조용히 지내라니, 그 말이 곧 얼굴 들고 다니지 말라는 뜻임을 모를 리 없었다. 편지지를 손에 쥔 채 이서연은 헛웃음을 터뜨렸다. 아버지라는 사람이, 딸의 안위보다는 가문의 체면을 먼저 걱정하고 있다는 사실이 새삼스럽지도 않았다.
그런 그녀 앞에 나타난 것이 조하준이었다.
"요리사를 구하고 있소."
그가 처음 던진 말은 그것뿐이었다. 응접실 문턱에 선 채로, 마치 날씨 이야기라도 하듯 무심하게 내뱉은 그 한마디에, 이서연은 처음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검은 머리와 겨울 밤하늘 같은 파란 눈을 지닌 그 남자는, 사교계에서 '얼음의 악마'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설한국의 공작이었는데, 그 별명이 무색하지 않게 표정이라곤 조각처럼 굳어 있었다. 세필로 그린 듯 단정한 이목구비에 어울리지 않는 무뚝뚝함이, 오히려 그를 더 낯설게 만들었다. 이서연은 처음엔 그것이 자신을 향한 조롱이라 생각했다. 파혼당한 영애에게 요리사 자리를 제안하다니, 이 무슨 모욕인가 싶어서.
"공작님, 저는 백작가의……"
"알고 있소. 하린 백작가의 영애라는 것도, 파혼당했다는 것도."
그가 담담하게 말을 자르자 그녀는 얼굴이 화끈거리는 것을 느끼면서도 애써 표정을 다잡았다. 이 남자가 지금 자신을 동정하는 건지, 아니면 정말로 요리사가 필요한 건지 알 수 없어서, 그녀는 잠시 말을 고르다가 되물었다.
"왜 저를……?"
"당신이 만든 사과 타르트를 먹어봤소. 지난 다과회에서."
그 말에 이서연은 순간 숨이 막혔다. 그날의 사과 타르트는 그녀가 별생각 없이, 그저 손이 심심해서 만들었던 것이었는데, 그것을 이 낯선 나라의 공작이 기억하고 있다는 사실이 묘하게 낯설고도 신기했다. 대체 다과회에 참석한 사람이 몇이었던가. 그 많은 손님들 중에, 왜 하필 이 남자만이 그 타르트를 기억하고 있는 걸까.
"그때…… 손도 대지 않으셨던 것 같은데요."
"먹었소. 조금."
"조금이요?"
"한 조각."
이서연은 저도 모르게 눈을 깜빡였다. 한 조각. 그 짧은 대답이 어쩐지 우스워서, 그녀는 웃음이 새어 나올 뻔한 것을 겨우 참았다.
"음식에는……, 그러니까, 재능이 있는 것 같더군."
조하준은 그렇게 말하며 시선을 살짝 피했는데, 그 순간 그의 귀가 옅게 붉어진 것을 이서연은 알지 못했다. 그저 그가 자신을 놀리는 건 아닐까 의심하기에 바빴을 뿐이었다. 얼음의 악마라는 별명을 가진 사내가, 겨우 타르트 한 조각을 이유로 자신을 요리사로 삼겠다니. 그것이 진심인지 아닌지 그녀로서는 도무지 가늠할 수 없었다.
"설한국은…… 춥다고 들었습니다."
"춥소. 하지만 굶지는 않소."
그가 그렇게 말했을 때, 이서연은 처음으로 웃음이 새어 나오는 것을 참았다. 이 남자, 얼음의 악마라는 무시무시한 별명과는 달리 어딘가 어긋난 데가 있는 것 같았다. 굶지는 않소, 라니. 그것이 이 제안의 가장 큰 장점이라도 되는 양 진지하게 말하는 얼굴이 우스웠다. 마치 그것 하나만은 자신 있다는 듯한 표정으로.
"공작가의 요리사라면…… 급여가 상당할 텐데요."
"백작가의 딸에게 급여 이야기부터 나올 줄은 몰랐군."
"저는 이제 백작가의 딸이 아니라 요리사 후보인걸요."
그 대답에 조하준의 미간이 아주 살짝 움직였다. 웃은 것도 아니고, 찡그린 것도 아닌, 그 애매한 표정이 이서연의 눈에는 낯설게 다가왔다.
"조건은 무엇인가요."
"숙식 제공, 정당한 급료, 그리고……"
그가 잠시 말을 멈추었다가, 어렵게 이어 붙였다.
"이곳에서보다는 나을 것이오."
그 짧은 문장에 담긴 무언가가 그녀의 가슴을 툭, 하고 건드렸다. 이곳에서보다는 나을 것이라니, 그것은 위로도 아니고 동정도 아닌, 그저 사실을 말하는 것 같은 무뚝뚝한 어조였는데, 오히려 그래서 더 마음에 닿았다. 말로 하기 어려운 감정이 가슴 한켠에서 일었고, 그녀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 수 없어 잠시 말을 잃었다.
밤새 고민한 끝에 이서연은 결심했다. 이곳에 남아 사람들의 눈초리를 견디며 서서히 말라 죽어가는 것보다는, 낯선 나라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는 쪽이 나을 것이라고. 설령 그 남자가 얼음의 악마라 불리든 말든, 적어도 그는 그녀를 조롱하지 않았으니까. 밤늦도록 창가에 앉아 별을 헤아리면서도, 그녀의 머릿속에는 오직 그 한 문장만이 맴돌았다. 이곳에서보다는 나을 것이오. 정말로 그럴까. 낯선 나라, 낯선 사람들 사이에서, 정말로 이곳보다 나은 삶이 기다리고 있을까.
이튿날 아침, 이서연은 조하준에게 짧은 대답을 전했다.
"가겠습니다."
짧은 대답이었지만, 그 한마디에 그녀의 인생이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꺾이고 있었다. 조하준은 그 대답을 듣고도 별다른 표정을 짓지 않았는데, 다만 고개를 한 번 끄덕이는 것으로 답을 대신했다. 그 짧은 끄덕임 속에 어떤 안도가 섞여 있었다는 것을, 이서연은 알아채지 못했다.
"짐은 최소한으로 챙기시오. 설한국까지는 마차로 열흘이 걸리는데, 짐이 많으면 여정이 고될 것이오."
"열흘이나요?"
"국경을 넘어야 하니까."
국경을 넘는다는 말이, 그제야 이 모든 일의 무게를 실감케 했다. 단순히 다른 가문으로 시집을 가는 것도 아니고, 아예 다른 나라로, 그것도 낯선 사내를 따라 떠나는 것이었다. 이서연은 잠시 숨을 고르며 스스로에게 되물었다. 정말 이 선택이 맞는 것일까. 하지만 이미 대답은 뱉어버린 뒤였고, 되돌릴 마음도 없었다.
창밖으로는 여전히 맑은 가을 하늘이 펼쳐져 있었고, 이서연은 짐을 꾸리며 마지막으로 하린 백작가의 저택을 눈에 담았다. 낡은 정원수와 익숙한 회랑, 그리고 한때는 자신의 방이라 여겼던 창문까지도, 이제는 모두 낯선 풍경처럼 느껴졌다. 다시는 이곳으로 돌아오지 않을 것 같은 예감이, 이상하게도 슬프지 않았다.
다만 마차에 오르기 전, 문득 뒤를 돌아본 순간, 저택의 창문 너머로 낯익은 실루엣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본 것 같았는데, 그것이 정윤호였는지 아니었는지, 이서연은 굳이 확인하지 않았다. 이미 지나간 인연에 매달릴 시간도, 마음도 남아 있지 않았으니까.
마차는 곧 명화국의 국경을 향해 출발했고, 그녀가 알지 못하는 설한국의 겨울이 이미 그녀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