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화
‹ ›이튿날 아침, 이서연은 저택의 주방에 들어서자마자 눈앞이 캄캄해지는 것을 느꼈다. 명화국의 주방과는 완전히 다른 재료들이 늘어서 있었기 때문이었다. 낯선 향신료가 담긴 유리병들이 선반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처음 보는 뿌리채소들이 바구니마다 뒤섞여 쌓여 있었으며, 냉동고를 열자 그녀가 한 번도 다뤄본 적 없는 생소한 생선들이 얼음처럼 굳은 채 층층이 쟁여져 있었다. 명화국의 부엌이라면 눈을 감고도 재료의 이름을 댈 수 있었을 텐데, 이곳에서는 그야말로 이방인이 된 기분이었다.
"이건……, 뭐죠?"
그녀가 낯선 뿌리채소 하나를 집어 들며 묻자, 옆에서 시중을 들던 하녀 마리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에그노브인데요, 명화국엔 없나요?"
"처음 봐요. 색도……, 흙빛이라기보다는 잿빛에 가깝네요."
"이걸로 죽을 끓이면 몸이 따뜻해진다고들 해요. 특히 겨울에 인기가 많은데, 공작님도 좋아하시고요."
마리가 손끝으로 껍질을 톡톡 두드리며 설명을 이어갔다. 껍질이 두껍고 단단해서 명화국의 감자와는 결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손에 쥔 순간부터 느껴졌는데, 무게마저 묘하게 실했다. 따뜻한 것을 좋아한다던 조하준의 말이 떠올라, 이서연은 그 뿌리채소를 유심히 들여다보며 이리저리 돌려보았다. 어쩐지 이 도전이 재미있게 느껴졌다. 처음엔 막막했던 낯선 재료들이, 하나씩 이름을 알아갈수록 조금씩 친근하게 다가오는 것도 신기한 일이었다.
"삶으면 되는 건가요?"
"삶아서 으깨는 게 보통인데, 향신료를 안 넣으면 좀 심심할 거예요. 여기 이 붉은 가루를 조금 섞으시면……"
"이건 또 뭐죠?"
"모르실 만하네요. 설한국에서만 나는 거라."
마리가 웃으며 가루병을 건네주었고, 이서연은 코를 가까이 대고 향을 맡아보았다. 알싸하면서도 은은한 향이 코끝을 스쳤는데, 정확히 어떤 맛일지는 짐작이 가지 않았다. 결국 감으로 부딪히는 수밖에 없었다.
그날 오후, 이서연은 처음으로 설한국 재료로 요리를 시도했다. 에그노브를 삶아 으깨고, 명화국식으로 크림을 더해 부드러운 스프를 만들었는데, 향신료의 배합을 몰라 몇 번이나 실패를 거듭했다. 처음엔 너무 매워서 마리가 눈물을 찔끔 흘렸고, 두 번째엔 너무 싱거워서 죽처럼 밍밍한 맛이 났다. 세 번째, 네 번째……, 냄비를 몇 번이나 다시 씻어내면서도 이서연은 포기하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조하준의 얼굴이 자꾸 떠올랐다. 그가 이 스프를 먹으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함이 자꾸만 손을 부지런히 움직이게 했다. 그렇게 몇 번의 실패를 거듭한 끝에야 그럭저럭 봐줄 만한 맛이 나왔다.
식사 시간, 조하준이 식탁에 앉아 스프를 한 술 떠먹었을 때, 그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하는 것을 이서연은 숨죽여 지켜보았다. 검은 머리카락이 촛불에 비쳐 잔잔하게 흔들렸고, 안개 낀 숲처럼 짙은 눈동자가 그릇 위에 고요히 머물렀다. 얼음의 악마라 불리는 그가, 스프 한 그릇에 이토록 진지한 얼굴을 하는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했다.
"이건……, 에그노브요?"
"네. 향신료 배합이 부족한 것 같은데, 어떤가요."
"괜찮소."
그가 그렇게 말하며 두 번째 술을 떠먹는 것을 보고, 이서연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그 안도가 채 가시기도 전에, 그가 세 번째, 네 번째 술을 연달아 떠먹으며 순식간에 그릇을 비우는 모습을 보고는 그녀는 웃음을 참느라 입술을 깨물어야 했다. 그릇 바닥이 훤히 드러날 때까지 숟가락질을 멈추지 않는 그의 모습이, 평소 저택의 사람들이 두려워한다는 얼음의 악마와는 너무나 어울리지 않았다.
"더, 더 드시겠어요?"
"조금 더 있소."
"그, 그럼……"
결국 그녀는 부엌으로 달려가 남은 스프를 모조리 그의 앞에 가져다 놓았고, 조하준은 그것마저 깨끗하게 비워냈다. 그릇을 든 채 잠시 멈춰 있던 그가, 마지막 한 방울까지 놓치지 않으려는 듯 그릇을 살짝 기울이는 모습을 보고는 이서연은 결국 손으로 입을 가려야 했다. 얼음의 악마가 이렇게 배고픔에 약한 사람이었다니, 그 사실이 어이없으면서도 어딘가 귀엽다는 생각이 들어 스스로도 당황했다.
"공작님, 사실은 배가 많이 고프셨던 거죠?"
"……그런 것이 아니오."
"근데 세 그릇을 순식간에 비우셨는데요."
"양이……, 원래 적었던 것뿐이오."
그가 시선을 피하며 헛기침을 하는 모습에, 이서연은 결국 웃음을 터뜨렸다. 처음으로 이 저택에서 소리 내어 웃은 순간이었는데, 그 웃음소리에 조하준이 놀란 듯 그녀를 바라보았다. 세필로 그린 듯 정교한 그의 얼굴에 순간 당혹감이 스쳤다.
"왜 웃소."
"아, 아니요……, 그냥 공작님이 생각보다 훨씬……"
"훨씬, 뭐요."
"인간적이라서요."
그 말에 조하준은 잠시 말이 없었는데, 그의 귀가 붉어지는 것을 이서연은 이번에도 눈치채지 못했다. 그는 괜히 냄비 뚜껑을 만지작거리다가, 다 먹은 그릇을 괜히 한 번 더 들여다보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듯했지만, 결국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식당을 빠져나갔다.
다만 그가 다음날부터 저녁마다 슬그머니 주방을 어슬렁거리며 뭐 만드는지 묻는 버릇이 생겼다는 것만은, 며칠이 지나면서 그녀도 눈치채게 되었다. 처음엔 우연히 지나가다 들르는 척했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발걸음은 점점 더 노골적으로 주방을 향했다.
"오늘은 뭘 만드시오."
"아직 정하지 않았는데……, 왜 자꾸 물으세요?"
"궁금해서 그렇소."
"혹시……, 또 배고프신 거 아니에요?"
"아니오."
그가 정말로 궁금해하는 얼굴로 냄비 안을 들여다보는 모습을 보며, 이서연은 웃음을 참느라 애를 먹었다. 그의 그런 모습을 볼 때마다, 저택 사람들이 두려워하는 얼음의 악마와 지금 눈앞의 이 남자 사이에 얼마나 큰 간극이 있는지를 새삼 느끼곤 했다. 냄비 뚜껑을 살짝 들어 올려 안을 살피는 그의 진지한 눈빛이라니, 누가 봐도 이건 그냥 궁금해서 온 것이 아니라는 게 뻔했다.
이서연은 이 이질적인 나라에서의 생활이 생각보다 나쁘지 않다는 것을, 아니 오히려 조금씩 즐거워지고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낯선 재료들과 씨름하는 하루하루가, 그리고 그것을 맛있게 먹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이상하게도 그녀의 마음을 조금씩 풀어주고 있었다.
그러나 그 즐거움 뒤편에서, 그녀가 아직 알지 못하는 소식 하나가 이미 국경을 넘어오고 있었다. 그것이 얼마나 차가운 얼굴을 하고 저택의 문턱을 넘어설지, 지금의 그녀는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