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록으로 겨울 저택의 온기

2화

설한국으로 향하는 마차 안은 명화국의 것보다 훨씬 좁고 덜컹거렸는데, 이서연은 창밖 풍경이 점점 삭막해지는 것을 보며 자신이 정말 먼 곳으로 가고 있다는 사실을 실감했다. 나무는 점점 앙상해지고, 눈발이 하나둘 흩날리기 시작했으며, 마차를 끄는 말들의 입김마저 하얗게 얼어붙는 듯 보였다. 명화국에서는 아직 늦가을의 색이 남아 있었는데, 국경을 넘는 순간부터 세상이 완전히 다른 계절로 바뀌어버린 것 같았다. 이서연은 무릎 위에 얹은 두 손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백작가의 영애였던 손이, 이제는 요리사로서 이 낯선 나라의 부엌을 책임져야 하는 손이 되었다는 사실이 여전히 낯설게 느껴졌다. 대체 내 인생이 어디서부터 이렇게 어긋난 걸까……, 그런 생각을 하다가도, 뭐 어쩌겠는가, 이미 벌어진 일이니 밥값이라도 제대로 하고 살아야지, 하는 생각으로 이어지는 것이 스스로도 우스웠다. "춥지 않소." 맞은편에 앉은 조하준이 문득 말을 걸었는데, 그 말투가 여전히 딱딱하고 예스러워서 이서연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춥지 않냐는 질문을 저렇게 명령처럼 던지는 사람은 처음 보았다. 마치 '춥지 않은 것이 좋을 것이오'라고 통보하는 듯한 말투였다. "조금……, 춥습니다." 그녀가 솔직하게 답하자, 그는 잠시 침묵하다가 자신의 외투를 벗어 그녀 쪽으로 밀어놓았다. 겨울 밤하늘 같은 그 파란 눈이 창밖을 향한 채였는데, 그 무심한 듯한 손짓이 오히려 더 어색해서 이서연은 외투를 받아 들면서도 뭐라 말해야 할지 몰라 그저 고개만 숙였다. 외투에서는 낯선 향이 났다. 눈과 나무, 그리고 아주 옅게 스민 서늘한 향수 같은 냄새였는데, 그것이 이 남자를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 이서연은 괜히 얼굴이 화끈거렸다. "감, 감사합니다." "별것 아니오." 그는 그렇게 짧게 대답하고는 다시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는데, 그 옆얼굴이 마치 섬세하게 다듬어진 것 처럼, 이서연은 저도 모르게 그를 힐끔거리다가 눈이 마주칠까 싶어 얼른 시선을 돌렸다. 얼음의 악마라 불리는 사람이 저런 얼굴을 하고 있다니, 정작 소문과는 너무 다르지 않은가. 그렇게 짧게 대화가 끊긴 채로 마차는 며칠을 더 달렸다. 하루는 눈보라가 심해 객잔에서 하루를 묵기도 했고, 또 하루는 길이 얼어붙어 마부가 몇 번이나 마차를 세워야 했다. 그 며칠 동안 이서연은 조하준이 말은 별로 없지만 필요한 순간에는 정확하게 지시를 내리는 사람이라는 것을, 그리고 자신에게 불편함이 생기면 굳이 묻지 않아도 먼저 알아채고 조치를 취하는 사람이라는 것을 조금씩 알게 되었다. 그것이 다정함인지 그저 책임감인지는 아직 판단이 서지 않았지만. 마침내 설한국의 국경을 넘어섰을 때 이서연은 창밖으로 보이는 거대한 공작저를 보고 입을 다물지 못했다. 하얀 눈으로 덮인 첨탑들이 마치 세필로 그린 그림처럼 정교하게 서 있었고, 저택 전체가 얼음 궁전이라 해도 믿을 만큼 서늘하고 아름다운 위용을 자랑했다. 저 많은 창문에 불을 다 켜려면 기름값이 얼마나 들까, 하는 현실적인 생각이 잠깐 스쳤다가, 이서연은 이제 그것이 자신의 걱정거리는 아니라는 사실을 떠올리고는 피식 웃었다. "여기가……, 공작님의 영지인가요." "그렇소. 설한국의 북부, 헬가드라 부르는 곳이오." 마차에서 내려선 이서연을 맞이한 것은 저택의 집사와 몇몇 하인들이었는데, 그들은 그녀를 향해 정중히 고개를 숙이면서도 은근한 눈빛으로 훑어보았다. 명화국에서 온 백작가 영애가 요리사로 왔다는 소식이 이미 퍼진 모양이었다. 몇몇 하인들의 눈빛에는 호기심이, 또 몇몇의 눈빛에는 노골적인 의심이 섞여 있었는데, 이서연은 그 시선들을 다 견디며 애써 담담한 표정을 지었다. 어차피 실력으로 보여주면 될 일이었다. "방을 안내하겠소." 조하준이 앞장서서 걸었고, 이서연은 그 뒤를 따르며 저택 내부를 눈에 담았다. 벽에 걸린 태피스트리는 눈 덮인 산맥을 그린 것이었고, 복도의 은은한 향은 낯선 나무 냄새를 풍겼는데, 그 모든 것이 그녀에게는 신기하고도 낯설었다. 복도를 걷는 동안 몇 개의 방을 지나쳤는데, 문마다 얼음을 조각한 듯한 손잡이가 달려 있어서 이서연은 이 저택 전체가 정말로 '얼음의 악마'라는 별명에 맞춰 지어진 것은 아닐까 하는 실없는 생각을 했다. "이곳은……, 정말 춥네요." "이 저택은 원래 그런 곳이오. 익숙해질 것이오." 익숙해질 것이라니, 그 말이 어쩐지 다정한 위로처럼 들려서, 이서연은 또 한 번 속으로 놀랐다. 이 남자는 자기가 무심하게 던지는 말이 얼마나 이상하게 들리는지 전혀 모르는 것 같았다. 방에 도착하자 조하준은 문 앞에서 멈춰 서서, 처음으로 조금 진지한 표정을 지었다. "몇 가지 규칙이 있소." "말씀하세요." "첫째, 식사는 하루 세 번, 정해진 시간에 준비하시오. 둘째, 재료는 창고에서 자유롭게 쓸 수 있으나, 부족한 것은 집사에게 요청하시오. 셋째……" 그가 여기서 잠시 말을 멈추었는데, 그 침묵이 묘하게 길어서 이서연은 무슨 대단한 규칙이 나올까 긴장했다. 혹시 특정 재료를 못 쓰게 한다거나, 특별한 식단이 있다거나, 아니면 자신을 감시할 사람을 붙인다거나 하는 생각들이 순식간에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음식이 맛없으면 정직하게 말할 것이오." 그 말에 이서연은 순간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났다. 이 남자가 진지하게 규칙이라고 내세우는 것이 겨우 이런 것이라니. 저렇게 심각한 얼굴로 저런 말을 하는 사람은 태어나서 처음 보았다. "그, 그건……, 당연한 일 아닌가요?" "당연한 것이 아니오. 이전 요리사들은 내 앞에서 늘 거짓말을 했소." 그가 그렇게 말하며 눈살을 살짝 찌푸리는 모습이, 이서연에게는 왜인지 서글퍼 보였다. 얼음의 악마라 불리는 그가 실은 이런 사소한 것에 서운함을 느끼는 사람이었다니. 아마도 그의 권위가 두려운 요리사들이 맛없는 음식을 내놓고도 맛있다고 우겼을 것이고, 그는 그 뻔한 거짓말을 알면서도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장면을 상상하니 이서연은 이유 없이 마음이 조금 아렸다. "알겠습니다. 맛없으면 정직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좋소." 짧은 대답과 함께 그가 방을 나서려 하자, 이서연은 문득 궁금해져서 그의 뒷모습에 물었다. "공작님은……, 뭘 좋아하십니까." 그가 걸음을 멈추고 돌아보았는데, 그 순간 그의 표정에 아주 잠깐, 정확히 명명할 수 없는 감정이 스쳐 지나가는 것을 이서연은 보았다. 겨울 안개가 낀 숲 같은 그 눈동자가 잠시 흔들리는 듯도 했는데, 그것이 착각인지 진짜인지 그녀로서는 확신할 수 없었다. "따뜻한 것." 짧은 대답이었지만, 그 말이 이상하게도 그녀의 가슴에 오래 남았다. 얼음의 성에 사는 남자가 원하는 것이 따뜻한 음식이라니, 그 단순한 말 속에 얼마나 많은 것이 숨어 있을지 이서연은 감히 짐작하지 못했다. 그가 방을 나가고 문이 닫히자, 이서연은 그제야 방 안을 제대로 둘러보았다. 침대는 명화국의 것보다 훨씬 두꺼운 이불로 덮여 있었고, 창문 너머로는 여전히 눈이 소리 없이 내리고 있었다. 벽난로에는 이미 불이 지펴져 있어서, 방 안은 저택의 다른 곳들과 달리 제법 온기가 느껴졌다. 누군가가 미리 준비해둔 것일까, 하는 생각에 이서연은 문득 조하준의 얼굴을 떠올렸다가, 아니겠지, 그냥 집사가 알아서 한 것이겠지, 하고 스스로 고개를 저었다. 밤이 되어 방 안에 홀로 남은 이서연은 창밖으로 쏟아지는 눈발을 바라보며, 낯선 나라에서의 첫 밤이 생각보다 무섭지 않다는 사실에 스스로도 놀랐다. 벽난로의 장작이 타는 소리와, 창밖에서 눈이 쌓이는 고요한 소리가 뒤섞이며, 이 낯설고 서늘한 저택이 조금씩 견딜 만한 곳으로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놀라움 속에는, 아직 이름을 붙이지 못한 작은 온기 하나가 숨어 있었다. 내일부터는 정말로 이 저택의 부엌을 책임져야 한다는 사실이, 이서연의 마음을 다시 조금 무겁게 만들었다. 얼음의 악마가 원하는 '따뜻한 것'이 과연 무엇일지, 그녀는 이불을 끌어당기며 오래도록 생각에 잠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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